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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자의 아메리카사
지도를 들고 떠나는

시간여행자의 아메리카사

지도를 들고 떠나는 시간여행자의 세계사 시리즈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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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2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192쪽 | 620g | 210*275*11mm
ISBN13 9791158710170
ISBN10 115871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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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대륙에서 사용되는 토착어는 600여 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50여 개 언어는 10만 명 이상이 사용하지만, 나머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소수 공동체에서 사용될 뿐 대부분은 멸절 위기에 있다. 그렇다면 유럽인이 상륙하기 전에는 어땠을까? 콜럼버스가 도착한 1492년 이전의 기록은 없지만,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와 주민과 접촉하면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았다. 유럽인의 정보 수집은 서서히 이루어졌으며, 15세기 말에 카리브제도를 시작으로 19세기에 북아메리카 북서부, 20세기에 일부 아마존 지역 등으로 확대됐다. 토착어 지도를 만들 때에 식민지화의 거센 바람이 불기 전, 그러니까 유럽인과 초기에 접촉한 시기로 한정시키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 p.6

잉카 왕조의 시조인 만코 카팍은 1200년경에 잉카제국을 이루었다. 잉카의 7대 황제인 야우아르 우아카크는 쿠스코 유역까지 영토를 넓히고, 비라코아 잉카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비라코아는 찬카족(쿠스케뇨의 대를 이은 적)에 정복당하자 1438년에 쿠스코로 피신했다. 그의 아들 중에 유판키가 반군을 조직하여 야우아르팜파(피의 평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자신이 잉카의 황제라 자처하며 스스로 파차쿠텍(세상의 개혁자)이라 칭하고 의기양양하게 행동했다. 1471년경에 그가 사망하자 잉카제국은 아이마라족의 주요 왕국을 통합시키고 태평양 연안까지 확장하여 치무족의 지역도 합병했다. 그의 아들인 투팍 유판키가 통치한 기간에 잉카제국 군대는 키토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칠레까지 진격하여 아라우칸족과 충돌을 빚었다. 1493년에 잉카의 황제로 즉위한 우아이나 카팍은 키토에서 전쟁을 이어나갔다. --- p.19

1492년 8월에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호를 포함한 군함 3척을 이끌고 에스파냐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10월 12일에 도착한 섬의 이름을 산살바도르라 불렀다. 이 섬은 바하마군도 중 하나로, 와틀링섬으로 불린 곳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보다 좀 더 남쪽인 사마나 산호초의 또 다른 섬일 가능성도 있다. 콜럼버스는 이어서 쿠바의 북동부 연안을 발견하고 히스파니올라(아이티)라고 이름 붙였다. 산타마리아호가 난파당하면서 에스파냐인은 히스파니올라섬 북부 연안의 나비다드에 머물러야 했다. 콜럼버스는 1493년 1월에 유럽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같은 해 9월에 더 큰 규모의 2차 원정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이들은 도미니카와 과들루프를 발견했으나, 나비다드에 남겨두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가까운 곳에 새로운 식민지를 세우고 쿠바의 남부 연안을 탐험하다가 자메이카를 발견하고 산티아고라 이름 붙였다. 그는 1496년에 에스파냐로 돌아가면서 동생 바르톨로메오에게 식민지를 관리하게 했다. --- p.31

19세기 초에 크리오요는 에스파냐 본국에 불만이 많았다. 세금부담은 점점 무거워졌고 페닌술라레스의 지배 권력은 더 가혹해졌으며, 무역의 자유도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온 소수의 크리오요에게 계몽사상이 전해졌지만, 자유와 평등 이론에 동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처럼 식민지 체제를 완전히 거부하는 사람은 더 적었다. 대부분의 크리오요는 유색인의 반응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의 특권을 고집했다(이런 점에서 아이티혁명은 미국이나 프랑스의 혁명보다 더 앞선 지성을 보여준다). 크리오요는 균형의 회복을 바랐지만, 재정적으로 식민지에 의존하던 본국은 이들의 요구에 합의할 의사가 없었다. 당시 에스파냐는 1808년에 반란으로 큰 위기를 겪은 뒤부터 혼란이 이어졌다. --- p.52

영국은 북아메리카에서 군사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 개척자에게 세금을 징수했다. 1764년부터 식민지 개척자는 명예혁명(1689)에서 주창한 바와 같이 대의권 없는 과세 적용에 반발했다. 식민지 개척자는 런던 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않았고, 의회는 각 식민지 대표회의의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의회가 제국의 전 지역에 대해 법률을 제정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고, 식민지를 모두 잃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러한 입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상호간 불신이 전쟁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모든 식민지 개척자가 왕실에 불만을 품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불신한 부류는 새로운 관세법상 금지된 밀수업에 열중하던 보스턴·뉴포트·뉴욕 등지의 상인과, 잦은 징집으로 영국 해군에 반감이 있던 보스턴의 항해사 및 어부, 그리고 영국이 자신보다 인디언을 더 배려한다고 생각했던 경계 지역의 식민지 개척자, 영국의 무역소에 빚을 지고 사회적·정치적 지위를 보장받았던 버지니아의 대농장주였다. --- p.82

서부는 크게 3곳으로 나눌 수 있다. 바로 텍사스에서 캐나다 국경까지의 그레이트플레인스 지역, 넓은 의미의 로키산맥 지역, 태평양 연안 지역이다. 그레이트플레인스 지역에서는 주로 농업이나 목축업을 했는데, 거주민과 인디언이 충돌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인디언을 제외한 인구가 1860년에 75만 명에서 1920년에 1,100만 명에 이르렀다. 로키산맥과 태평양 연안 지역에는 금과 은을 찾는 사람과 삼림개발자가 몰려들었고, 해피 밸리를 찾는 식민지 개척자도 많았다. 그 결과 이 지역에는 1860년에 60만 명에서 1920년에 880만 명으로 인구가 늘었는데, 이 가운데 연안 지역의 3개 주에서 550만 명이 거주했다. 식민지 개척자의 출신지는 매우 다양했다. 예를 들면 동부 시골 출신인 미국 태생의 개척자가 자기 가족이나 독일,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이민자와 함께 오기도 했다. 여기에 수많은 상인, 투기꾼, 협잡꾼 등도 몰렸다. 서부에서는 남북전쟁 이전부터 수많은 이민자의 마차 행렬이 이어졌고, 그 뒤 철도가 발전하면서 이민이 더욱 늘어났다. --- p.99

1960년에 민주당의 존 케네디는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과 근소한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1955년에 소비에트연방과 이룬 화해 분위기도 더 이상 없었고, 1961년부터 베를린장벽이 세워졌다. 케네디 대통령은 베트남과 쿠바 문제에 부딪혔다. 1959년에 설립된 피델 카스트로 체제가 점차 미국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1961년에 카스트로에 반대하는 쿠바인이 워싱턴 정부의 비공식적 지원 아래 피그스만을 침공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쿠바 정부는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았고, 1962년 10월에 미국이 소비에트연방의 핵미사일을 쿠바에서 발견하면서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를 ‘쿠바 위기’라 일컫는 다. 결국 소비에트연방은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고 미국도 쿠바를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 p.107

1898년, 에스파냐에 승리한 미국은 쿠바를 점령했다. 미국 의회는 1901년에 채택한 헌법에 플랫수정안이라는 특별한 개정 조항을 보태, 쿠바에 문제가 발생하면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외교 조약에 대한 통제 권한이 있으며, 관타나모의 해군기지를 양도받는다는 내용을 규정했다. 대신 미국이 쿠바의 설탕을 전량 수입하는 특혜를 누렸다. 이후 1902년에 쿠바가 독립하자 미국 군대가 철수했다. 하지만 1906년 반란에 직면한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 대통령이 망명하면서 쿠바는 행정부 없이 방치됐다. 그 결과 1909년까지 미국이 쿠바를 점령했다. 1912년에 일어난 흑인의 대규모 반란은 1917년에 또다시 개입한 미국 군대로 인해 무자비하게 진압됐다. 1924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된 헤라르도 마차도 장군이 독재정치를 펼치자, 1930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긴장이 고조됐다. 결국 1933년에는 전체 파업으로 이어져 마차도는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 이어서 중사였던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필두로 한 군하사관이 학생들과 함께 혁명정부를 세우고,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을 지도자로 삼았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바티스타가 1934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 p.125

1861년에 멕시코의 대외 부채는 엄청난 규모로 늘어난 상태였다. 멕시코 정부가 이자 상환을 미루자, 영국·프랑스·에스파냐는 군대를 파병하여 1862년에 베라크루스의 세관사무소를 점령했다. 이것이 바로 ‘내정간섭’ 사건의 시작이다. 이후 후아레스는 영국·에스파냐와 합의했고, 프랑스와는 대립관계로 남았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를 기반으로 가톨릭제국을 세워 미국과 세력 균형을 이루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1863년에 프랑스 군대를 멕시코로 파병했다. 나폴레옹 3세는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대공인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에게 압력을 가해 1864년 6월에 멕시코로 오게 하여 그를 멕시코 황제로 추대했다. 보수주의자가 막시밀리안을 지지하고 나서자 베니토 후아레스는 북부 지역으로 후퇴했다. 프랑스 군대와 멕시코 군대는 후아레스를 따르는 자들이 멕시코 전역에서 벌인 게릴라전에 맞서야 했는데, 1866년에 게릴라 세력이 우위를 차지했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물러나기를 권했으나 그는 양위를 거부했다. 결국 프랑스 군대는 1867년에 멕시코에서 철수했고, 그해 6월에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이끄는 공화국 군대가 멕시코를 장악했다. --- p.135

식민지 시대에 칠레는 에스파냐인이 거의 살지 않는 ‘세상의 끝(케추아어로 칠레를 뜻함)’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세기에 칠레는 국가의 결속력과 풍부한 광물자원 덕분에 경제적·군사적 강국으로 성장했고, 이는 주변국에 두려움을 주었다. 본래 칠레는 산티아고계곡의 중앙에 있는 조밀한 나라였다. 그러나 소수의 지주층과 상인, 백인과 메티스 서민층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동질적 사회였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국가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유능한 정치가인 디에고 포르탈레스가 세운 체제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1833년에 제정한 헌법이 1925년까지 이어졌다. 에스파냐인은 채굴 기술이 부족하여 광물자원에 관심을 주지 못했고, 그 덕분에 칠레는 1830년대 말부터 구리 등 풍부한 광물자원을 채굴하여, 주요 수입원으로 만들었다. --- p.169

1822년에 제헌의회 선거가 끝난 뒤, 포르투갈의 주앙 6세 아들인 동 페드루가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페드루 1세라는 이름으로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의회의 더딘 일처리를 견디다 못해 1823년에 의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위원회를 통해 작성한 최초의 헌법을 1824년에 공표했다. 이 헌법은 (매우 제한적 투표를 통해 구성되는) 하원과 상원을 설치하고, 황제에게 중요한 특권을 보장했다. 즉 황제는 내각을 선출하거나 해임할 수 있고, 입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설립된 체제는 2가지 특징을 보였다. (교회의 지지를 얻으며) 계속된 군주제로 말미암아 국가의 통일성이 유지됐고, 황제의 중재 권한이 다양한 지주 집단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이를 통해 당시 에스파냐제국을 계승한 국가의 특징인 파벌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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