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11월 17일, 에디슨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학술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에 발표했다. 그리고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스위스 출신의 모델 제작자 존 크루시(1843~1899)가 이 기계를 위한 스케치를 완성했다. 그러고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18달러를 요구했다. 곧 크루시는 손잡이가 달린 포노그래프를 제작했고, 에디슨은 이 귀중한 기계 가까이에 앉아 7초 동안 진동판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메리에게는 한 마리 양이 있었네, / 털은 눈처럼 희었고,
메리가 가는 곳이면 / 어디든지 따라다녔네.
메리, 그리고 그녀를 어디든 따라다니는 순하고 새하얀 어린 양에 관한 노래……. 동요 가사는 특히 이런 작업의 테스트용으로 적합해 보인다. 에디슨은 실린더를 다시 돌리며 바늘이 물결 모양으로 난 홈을 따라가게 했다. 그랬더니 과연, 음파 에너지가 진동의 형태로 진동판으로 전달되어 작긴 하지만 방금 전에 읊은 가사가 흘러나왔다. --- pp.24-25
EMI는 새로운 스타, 리버풀 출신의 네 젊은이로 구성된 그룹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이들은 데카에서 두 번이나 퇴짜를 맞았는데, 사운드가 데카 측의 마음에 그리 들지 않은 데다가 기타 밴드는 거의 사라지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이 4인조의 이름은 비틀스였다. 그리하여 비틀스의 히트곡들은 모두 EMI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는데, 가령 『그대 손을 잡고 싶어요I Want to Hold Your Hand』, 『어 하드 데이스 나이트A Hard Day’ Night』, 『헬프!Help!』, 『옐로 서브머린Yellow Submarine』, 그리고 현악 4중주가 함께한 『예스터데이Yesterday』 등이 있었다. 1969년 비틀스의 11번째 앨범 『애비 로드Abbey Road』가 발매되었고, 버섯 머리를 한 네 멤버가 유명한 스튜디오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장면이 담긴 커버 사진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이들은 팝 문화의 첫 산물로 자리매김했고, 존 레넌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보다도 더 큰 인기”를 누렸다. 비틀스의 앨범들 가운데 골드 디스크가 속출했고, EMI에서 판매한 앨범만 무려 13억 장에 이를 정도였다. 이는 모든 클래식 레퍼토리를 합한 것과 맞먹는 판매량이다. --- pp.178-179
카라얀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음악가에게는 음반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우선 자신의 연주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조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친구나 호의적인 스승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향한 진정한 비판으로부터 나오는 명쾌한 이야기를 대신 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첼리스트 하인리히 시프는 이렇게 덧붙였다.
예전에 한 녹음이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무엇이 원인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가 잘못 연주한 탓일까? 아니면 연주의 완성도가 아직 충분하지 못한 탓일까? --- p.226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은 레코드를 처음 접했을 때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내 음악을 들을 거라는 상상은 불쾌했고,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나는 녹음이라는 것이 본래적인 의미의 연주와 상충된다고 생각했다. 연주란 원래 단 한 차례만 행해지며, 유일무이한 것, 반복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기억 때문에 그가 녹음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특히 슈나벨은 32개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레코드로 발매했다. 지휘자 세르지우 첼리비다케도 음반을 반대하는 중요한 근거로 연주의 일회성을 내세웠다. 그에게 음반은 소리 나는 “팬케이크, 허섭스레기, 수음 행위”에 불과했다. 예전에는 작곡가가 곡을 쓸 때 연주하는 장소나 동기 혹은 청중의 취향까지 염두에 두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음악가는 청중과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연주하고, 이렇게 저장된 연주는 어디에서나 재생될 수 있다. 음악이 장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바로 이 점이 첼리비다케에게는 거슬렸고, 그렇기 때문에 레코드를 기록 수단으로만 여겼다.
--- 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