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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역사 세트

미국인의 역사 세트

[ 전 2권, 양장 ]
리뷰 총점8.0 리뷰 5건 | 판매지수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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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4월 3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664쪽 | 2532g | 157*233*90mm
ISBN13 9788952273598
ISBN10 8952273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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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역자 : 명병훈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했다.[중앙일보] [경향신문] 등에서 일했다. 현재 인문학을 기반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지식과 열정을 불어넣는 출판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폴 존슨의 『근대의 탄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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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1620년 12월 11일, 훗날 매사추세츠가 되는 뉴플리머스에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최초의 개척민이 상륙했다. 앞선 개척민은 젠틀맨 출신의 모험가,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 계약하인 등이었는데, 이들은 신대륙에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출세하겠다는 공통된 욕구로 단결했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공평과 자유라는 경험에 바탕을 둔 영국의 뿌리 깊은 전통에 따라, 관습법을 공정하게 적용하고, 공통의 이익을 위해 분별 있는 통치를 시행하며, 공동사회 전체의 요구에 따라 법을 제정하고자 했다. 이처럼 그들과 그 자손은 미국의 주요 전통 가운데 한 가지 요소를 형성했다.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 모두에서 실용적이고 절도 있고 창조적인, 어떤 경우에나 유효한 그런 요소를.
메이플라워 호의 남자-와 여자-들은 전혀 달랐다. 그들이 아메리카에 온 것은 돈벌이나 심지어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둘 다를 신의 은총으로 감사히 받아들였지만 그보다는 우선 지상에 신의 나라를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광신자, 이상주의자, 유토피아 추구자, 성직자였으며,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아니 어쩌면 과격하다고 해야 할-사람들은 열광적이고 타협을 모르며 독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또한 매우 정력적이고 끈질기며 용감했다. 그들과 그 자손은 미국의 주요 전통 가운데 또 한 가지 요소를 형성했다. 역시 창조적이지만, 관념적이고 이지적이며, 쉽게 발끈하고 고집스러우며, 때로는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만큼 지독히 비타협적인 요소를. 앞으로 살펴보면서 익히 알게 되겠지만, 이 두 가지 전통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그리고 서로 충돌했다. 어떤 때는 건설적으로 때로 엄청난 창조력을 발휘했으나 어떤 때는 사화와 국가에 위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 pp.65-66

하지만 새로운 지리적 일체감 이상으로 중요한 사실은 의식의 변화였다. 한참 뒤 일이지만,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은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일어났다. 혁명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있었다. 자신들의 의무와 은혜에 대해 종교적인 감정이 변화하고 있었다.” 계몽운동에 의해 촉발된 미국인 엘리트의 합리주의와 대중 사이에서 싹튼 대각성의 정신이 하나가 되어, 혁명이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향하는 여론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었다. 혁명은 마침내 찾아올 종말의 사건과 동일시되었다. 어느 쪽 힘도 다른 한쪽이 없었으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종교적 배경 없이는 혁명은 일어날 수 없었다.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본질적인 차이는 미국혁명이 발단에서 종교적 사건이었던 데 비해 프랑스 혁명은 반종교적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이 미국혁명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형성하고, 그에 따라 생겨난 독립국가의 성격을 결정했다. --- pp.192-193

독립선언은 몇 세대에 걸친 최고의 휘그 사상을 힘차고 훌륭하고 간결하게 요약했다.
무엇보다 그 첫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머리말 두 문단은 더 이상 손댈 여지가 없다고 여겨졌다. 첫 문단에서 우선 비통한 어조로 영국과의 연합을 해소하는 슬픔을 언급하고, 그 이유를 들면서 “인류의 신념에 대한 엄중한 고려”가 요청된다고 말했다. 두 번째 문단은 앞 문단에 이어 전체 핵심을 이루었다-“우리는 이 자명한 진리를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창조주로부터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를 주장할,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정부는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동의를 통해 구성되어야 하며, 이러한 모든 목적에 정부가 부합하지 않을 때 정부의 형태를 바꾸거나 폐지하고, 또 이 원칙에 입각해 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만들 권리가 시민에게 있다.” 이 문장에 이어지는 내용은 어떤 독자라도-조지 3세조차-읽지 않을 수 없었다. --- pp.249-250

대개의 “해방전쟁” 사례가 언제나 그렇듯이 미국 독립전쟁 역시 마찬가지로 참혹한 내전이었다. 오늘날 연구에 따르면 그 당시 미국인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고 추정한다. 애국주의자가 3분의 1, 국왕 지지자가 3분의 1, 나머지는 관망주의자로서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에 가담했다. 하지만 전쟁에 적극 관여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국민의 절반을 훨씬 넘게 차지했다고 간주된다. 전투적인 세력 또한 거의 둘(애국주의자와 국왕 지지자)로 갈라졌다. 국왕 지지자는 그 성격상 지도자가 없었으며 해방주의자를 몰아세우는 과격성도 없었다. 영국의 지도력을 기대했지만 성과는 별로 없어서 국왕 지지자는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다. 현실적으로 모든 것-직업, 집, 토지, 저축, 때로는 자신의 목숨마저-을 잃었다. 영원히 혈연을 끊은 가족도 있었는데 프랭클린 가의 비극이 대표적인 예였다. --- p.274

앞서 살펴보았듯이 미국은 우선 종교적인 목적으로 건국되었고, 신앙 대각성운동이 초창기의 원동력이었다. 미국인은 이전 지배자인 영국인에 비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필그림 파더스는 진정으로 영국인이 부도덕하고 신앙심을 잃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와 “언덕 위의 도시”를 세웠다. 그 후손은 다시 독립과 자유를 선택했는데, 그것은 종속된 상태 자체가 도덕과 신앙에 어긋나며 신의 섭리를 거스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립선언서]는 서명한 사람들에게는 세속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문서였으며, 혁명전쟁이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 미국인은 신의 보살핌 아래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고, 신의 은총으로 정부 형태를 만들었다. 이것은 17세기에 이주민들이 자신들 곁에서 신이 지켜보고 있음을 느끼면서 계약서, 헌장, 규약, 증서 등을 작성한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이런 미국 역사의 초기 문서와 달리 합중국 헌법에는 종교에 관한 합의나 체계 형성 과정이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헌법에서 유일하게 종교를 언급한 부분은 제6조 3항이었다. “어떤 공직이든 그 자격으로서” “종교상의 심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 전부였고, 신과 관련이 있는 것은 마지막에 있는 날짜 “그리스도 기원 1787년”뿐이었다. 심지어 끔찍이 반종교적인 영국에서조차 국교가 있어서 국왕은 종교 의식 절차에 따라 대관식을 거행했고, 의회는 날마다 기도와 함께 개회했다. 미국 헌법이 처음으로 실질적으로 종교를 언급한 부분은 수정 조항 제1조로서 국교를 거부하고 연방의회에 “국교의 수립을 규정하고 신앙의 자유로운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의 제정을 금지했다.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설명할까? --- p.325

이주민이 몰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뱃삯이 점점 싸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때때로 기근으로 발전한 식량 부족을 들 수 있다. 1816년의 기상 악화, 1825~1826년, 1826~1827년, 1829~1830년의 혹독한 겨울, 특히 마지막으로 든 해 겨울의 기록적인 한파는 사람들을 굶주림에 빠뜨렸다. 토머스 맬서스가 주장한 인구가 파국으로 이끈다는 이론이 매우 왜곡된 형태로 서민층에 침투해, 사람들은 대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가족을 데리고 유럽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게다가 무거운 세금 문제도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말기에 유럽 대륙 전체가 세 부담으로 신음했다. 영국에서는 1816년 의회의 반란으로 소득세가 폐지되고, 1820년대에는 관세도 서서히 경감되었다. 하지만 유럽 대륙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국가는 가난한 농민이나 상인에게 재정 부담을 지웠다. 국내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관세 장벽을 설치해 국경을 넘는 거의 모든 물품에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이에 비하면 미국은 마치 천국과 같았다. 군대는 프로이센의 50분의 1 규모였고, 국민 1인당 국가에 내는 비용은 영국의 1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 영국 국세 규모조차 유럽 기준에서 본다면 비교적 작은 편에 속했다. 미국에는 주립 교회 등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구세마저 없었다. 또한 구빈세를 징수하지도 않았다-처음부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말 8필을 소유한 농가가 내는 세금은 1년에 고작 12달러로 유럽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금액이었다. 미국에서는 임금이 높았을 뿐 아니라 그 수입을 오롯이 가족을 위해 쓸 수 있었다. 혜택을 받은 점은 이 밖에도 여럿 있었다. 징병제가 없었고, 정치 경찰과 검열이 존재하지 않았다. 법에 따라 계층을 구별하지도 않았다. 고용주 대부분은 종업원과 함께 식사했다. (노예를 제외하고) 누구도 “주인님” 따위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자리 잡은 이주민이 모국에 보낸 편지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낭독되어 대서양 횡단선의 승객을 모집하는 데 훌륭한 선전이 되었다. 재미있게도 대통령이 의회에서 행한 연두 연설조차 검열관이 금지 조치를 내리기까지는 유럽의 많은 신문에 게재되어 이민 모집에 일역을 담담했다. 「더블린 모닝포스트」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우리는 이 기사를 직접 자신의 생활과 관계가 있는 듯이 읽는다.”
하지만 가장 큰 매력은 값싼 토지였다. 유럽에서 온 이주민은 특히 호주나 아르헨티나에서 원주민의 예전 사냥터에 속한 토지를 값싸게 양도받을 수 있었는데, 그 점에서 가장 흡인력이 있는 곳은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정부는 성가심을 무릅쓰고 가난한 사람들이 토지를 확보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합중국 역사를 통해 이 시기의 토지 구입 제도만큼 자선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기본인 된 정책은 1796년 토지 가격을 1에이커당 2달러로 규정한 조례였는데, 총액의 절반을 지불하고 나머지 대금은 1년 뒤에 갚으면 되었다. 1800년 법령에 따라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 치리코시, 매리에타, 스투벤빌 등 프런티어 최전선에 연방 토지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구입의 최저 단위는 640에이커에서 320에이커로 낮아졌고, 구입자는 선금으로 25퍼센트를 처음에 지불하고 잔금은 그 뒤 4년 안에 갚으면 되었다. 따라서 많은 농장-유럽의 기준에서 보면 터무니없이 넓은 농장-을 불과 160달러 정도의 현금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 pp.452~454

이전의 내각은 합중국 전반에 걸친 이익을 대표하도록 구성되었고, 그 멤버들은 지배계급의 단면이었다(물론 미국에 그런 계급이 존재하는 한)-즉 그들은 젠틀맨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대해 키친 캐비닛은 언론인과 같이 여태껏 권력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사람들을 권력 행사 그룹에 끌어들였다. 켄들은 워싱턴 사교계를 런던이나 파리를 흉내 낸다며 경멸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늦은 만찬”은 “영국의 우스꽝스러운 풍습”이며, 위스키 대신에 샴페인을 마시는 것은 “주제넘은 행위”에 불과하고, 노출이 심한 드레스는 “역겨웠다.”
켄들 같은 인물이 미국을 통치하는 데 일조를 한다는 생각만으로 애덤스 등은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잭슨은 대중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하여 이제는 대중이 여물통에 코를 내미는 형국이었다. 잭슨은 한두 가지 예외는 있었으나 남북전쟁 시대까지 계속된 새로운 정치 왕조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권력 구조를 영구히 변화시켰다. 키친 캐비닛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여 오늘날과 같은 백악관의 거대관료제와 관련 기관이 생겨났다. 이것은 4년마다 치러지는 대통령과 유권자의 개인적인 계약에 의해 조성된 대통령의 권력 강화 산물이었다. 켄들과 같은 인물이 이런 새로운 방식의 상징이 된 것은 나름대로 타당했다. 그리고 잭슨이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계약에 서명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한다면, 신문은 그 계약을 작성하는 수단으로서 일조를 한 셈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통치만 잘된다면 그게 정식 내각이건 키친 캐비닛이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잭슨 시대에는 확실히 사정이 좋았다. 경제가 확대되고 붐을 이루었다. 그 결과 간접세와 토지 매각 수입이 급증해 연방정부의 얼마 안 되는 경비는 어렵지 않게 지출될 수 있었다. 국채도 감소하여 1835년과 1836년에는 채무액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것은 근대 국가가 된 이래 그 전이나 앞으로나 예외가 없었다. 이 검소하고 간소하며, 허식도, 대국과 같은 가식도 없는 대중 정부는 의심할 나위 없이 유권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 pp.539-540

그 이듬해 봄이 되자 전 세계로부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1830년대에 이미 금광 열풍으로 들끓었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캘리포니아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메인 주 커틀러 주민들은 직접 배를 만들어 돛을 달고 혼 곶을 돌아 샌프란시스코 만에 도착했다. 파나마 지협을 거쳐 온 사람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오리건 트레일과 캘리포니아 트레일을 따라 로키 산맥을 넘어 왔다. 초기의 “49년도 사람들”은 철망-그들이 “패닝”(접시로 이는 방법-옮긴이)이나 “플래서”(상자로 거르는 방법)라고 부른 사금 채취법-을 사용해 자갈과 흙을 걸러 금을 채취했다. 또는 “사금을 이는 긴 홈통”이나 세광 홈을 사용해 흐르는 물에서 금을 걸러내기도 했다. 이는 매우 간단한 작업으로 다음과 같은 속요도 생겨났다. “아아 / 캘리포니아 / 나의 땅 / 나 새크라멘토를 향해 떠나네 / 무릎에 세숫대야 올려놓고.”
하지만 지표면의 채굴이 끝나자 수직갱을 설치하고 분쇄기를 이용해 석영에 박힌 금을 채취해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자본과 조직이 필요했다. 실망한 49년도 사람들 대부분은 빈털터리가 된 채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그 수는 한 해에 3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는 황금 이외에 다양한 기회가 널렸기 때문에 그대로 정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인디언을 제외하고 금광 발견 이전부터 이곳에 살던 사람의 숫자는 1만 4,000명이 채 안 되었다. 하지만 1852년에는 25만 명이 넘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도박꾼, 금융업자, 매춘부와 억센 여성, 배우와 통신원, 정치 신인과 사업가 등이 모여들어 인구 2만 5,000명이 들끓는 번창한 도시로 변했다. 최선에서든 최악에서든 모두가 자기 이익만을 위해 싸우는 무한경쟁 사회였다. --- pp.601-602

이처럼 스스로 자문자답을 되풀이하면서 링컨은 미국의 종교 체험이 형성해낸 국가적이고 공화적이며 민주적인 도덕관-아마 특정 교회에 몸담은 이보다 더 완전하고 정확한 도덕관-을 몸소 보여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워싱턴 대통령이 의회에서 퇴임 연설을 할 때와 똑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과 전쟁 중에 그가 보여준 행동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그 당시에 이미-국가 이념과 매우 정확하게 일치하는 듯이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윈스럽 총독이나 최초의 정착민들과는 달리 링컨은 미국이라는 공화국이 “선택받은 국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 나라가 “언제나 정의롭다”라는 것을 암시했는데, 남북전쟁이 일어난 것 자체가 미국에도 잘못이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하지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정의를 실천하려는 의지 역시 있었다. 링컨은 미국인은 “거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남북전쟁은 신의 계획의 일부로서 피 흘리는 쓰라린 고통으로 사람들을 시험하는 커다란 시련이지만, 그 뒤부터는 자선과 재탄생의 길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 p.740

2권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은 20세기 말에 흔히 나타나는 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함과 풍요, 끝없는 변화, 다색 다민족, 물질주의와 이상주의의 심화, 혁신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자부심, 독점욕, 장광설, 요란스러움, 탐구심, 넘치는 정의감, 선행, 부의 추구 등을 꿈꾸며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성숙한 공화국의 온갖 장점과 단점 또한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나 미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근대 세계에서나 보일 법한 선망과 감탄, 충격이 교차하는 반응을 보였다. 금과 은이 풍부하게 매장된 새로운 광맥을 캐내려고 농민과 기계공, 사무원과 교사까지 일확천금의 부푼 꿈을 안고 서부로 몰려가는 모습을 헨리 소로는 “크리슈나 신상을 실은 수레 아래에 무릎 꿇은 힌두교도들의 황홀 상태를 방불케 한다”라고 못마땅하게 묘사했다.
영국과 인도 두 나라 문화의 새로운 천재로서 이 세상에 혜성처럼 나타난 러디어드 키플링에게 뉴욕은 “비참한 미개 상태와 무모한 방종이 낳은 무기력한 산물”이었으며, 그 거리는 “잔지바르 해변과 같거나 줄루 족 마을 진입로와 비슷”했다. 하지만 위대한 시인 월터 휘트먼은 뉴욕을 한없이 사랑하여 “돛대로 둘러싸인 맨해튼만큼 멋지고 당당한 곳이 있을까?”라면서, “우뚝 솟아라, 맨해튼의 드높은 돛대여! 우뚝 솟아라, 브루클린의 아름다운 언덕이여!”라고 소리 높여 읊었다. 괴팍스러운 보스턴의 교양인 헨리 제임스 역시 이 거대한 도시에 압도되어 “열정의 선율 …… 불굴의 힘-매우 사치스러운 도시가 내뿜는 힘의 매력”에 갈채를 보냈다. 또한 “그 산만하고 쓸모없고 시끄럽기만 한 폭발음, 그 거대하고 용감하고 오만한” 것을 거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사랑했다. 새로운 고층 건물들이 “레이스 뜨개질용 베개에 꽂힌 바늘처럼” 빽빽하게 들어섰다고 말했다. --- pp.14-15

이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정치가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숭배하고 귀 기울이며 추종할 지도자를 다른 분야에서 찾고자 했는데, 그런 인물을 경제계에서 발견한 것은 당연했다. 미국은 모험가들과 설교가들에 의해 세워졌고, 젠틀맨 출신 정치가들에 의해 공화제 국가로 변모했지만, 국가를 만들고 국민을 살찌운 것은 사업가들이었다. 국민이 사업가를 존경하면 안 될 이유가 있을까? 1870년대, 1880년대, 그리고 1890년대 미국인들은 스스로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느꼈고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부가 창출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과 사회 기반 시설이 발전해가는 모습을 그들은 어디에서든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이 활기차고 약동하고 풍요로운 체계를 지휘하는 주인공들이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경쟁심을 북돋아주어야 했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영웅은 앤드루 카네기(1835~1919)였다. 카네기는 나름대로 유능한 경제정치 사상가로서 훌륭한 자서전을 썼으며 아울러 1889년 6월 ?노스 아메리칸 리뷰?지에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이라는 중요한 글을 기고했다. 카네기가 태어난 곳은 미국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였다. 칼뱅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세가 컸던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불가지론을 신봉했다. 어느 정도 스코틀랜드인 기질이 남아 있어서 실내를 스코틀랜드의 타탄 격자무늬 벽지로 바르고 만년에는 하일랜드에 있는 스키보 성을 구입했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그것은 부자가 될 자유, 그리고 그 부를 나눠줄 의무였다. 카네기의 삶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완벽하게 수행해냈다. --- pp.75-76

대부분 돈 한 푼 없이 두려움에 떨며 건너온 몇 백만 명에 달하는 이주민들을 자신감 넘치는 시민, 부의 창출자, 사회문화 자산으로 탈바꿈시킨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능력은, 공화국이 확대해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힘이었다. 이 나라는 거의 3세기에 걸쳐 국민을 향해 바로 그와 동일한 것을 줄곧 요구해왔다. 신세계 문화가 더 복잡해질수록, 재능-진정한 천재-의 흥미진진한 조합이 더욱더 실현 가능해졌다. 유럽에서는 거의 생각할 수조차 없는 특징적인 사례는, 토머스 앨바 에디슨(1847~1931)과 루이스 컴퍼트 티퍼니(1848~1933)가 협력하여 1885년 뉴욕에 최첨단 기술과 예술적 혁신이 훌륭하게 결합된 라이시엄 극장을 창조한 일이었다. 에디슨은 여러 가지 점에서 미국인의 전형이라고 할 인물이었다. 아마 당시 미국이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부여했던 모든 자유를 누구보다 다양하게 활용했을 것이다. 긴 생애 동안 발명을 하면서 숱한 결실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규제나 제한, 금지로 좌절을 맛본 적이 전혀 없었다. --- pp.121-122

급진 민주주의 세력이 정부 역할을 제한하는 데 치중했다(이 같은 현상은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국도 같았다). 제퍼
슨 시절, 나아가 잭슨 시절에도 크고 고압적인 정부는 반동 세력, 왕들과 황제들과 연방주의자, 그리고 훗날에는 월 가와 연대를 맺었다. 또한 무거운 세금, 특히 개인 소득세 같은 것은 힘겹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서 국가를 장악한 엘리트들에게 넘기는 음모였으며, 중앙은행은 금융 재벌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정부가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을 민중의 손에서 빼앗아 탐욕에 가득 찬 반 민주적인 엘리트 계층에게 넘겨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견해는 남북전쟁 뒤에도 잠시 남아 있었는데, 공화당의 연방정부가 거대한 권력을 장악하고 각 주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다음 몇 십 년 동안 대기업과 법인이 급격하게 성장한 까닭에 그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점차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대부분의 민주당원들 사이에서, 강력한 연방정부는 광범위한 중재 능력을 발판으로 지나치게 비대해진 법인들로부터 일반 서민들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민간 부문(잠재적인 악으로 감시와 통제가 필요)과 대립하는 존재로서 공공 부문(선으로 확장이 필요)의 존재가 공상적 사회개혁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가 세입을 늘릴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개인 소득세는 특히 그것이 세입 증대와 소득 재분배 기능을 가진 누진과세라면 매우 바람직스러운 제도였다. 20세기 말 현재 국가라는 존재는, 좋게 말하면 필요악으로서 필요한 어떤 일을 추진하기 위한 유일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대적할 존재가 없는 압제자로 간주되고 있다. 여기서 사회에 지적인 분위기가 감돌던 1913년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국가라는 존재는 미국은 물론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빛나는 갑옷을 몸에 걸친 기사라고 여겨졌다. 가난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 괴롭힘을 받는 사람을 구해주러 왔으며, 탐욕스러운 부유층이 개인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저지르는 행위를 객관적으로, 자비롭게 처리하는 존재가 국가였다. --- pp.211-212

미합중국은 하나의 가혹한 기계로서 민족, 종교, 정치, 사회, 문화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수많은 인간들이 그 안에서 한데 뒤섞였으며, 그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탈바꿈하여 마침내는 미국인이라는-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존재가 출현한다는 생각은 공화국 탄생 때부터 생겨났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로드아일랜드는 로저 윌리엄이 그곳에 식민지를 세울 때부터 이미 인종의 도가니를 실제로 가동시킨 좋은 예였다.
멜팅 포트(melting pot), 즉 도가니라는 말은 미국에 귀화해 뉴욕에 정착한 프랑스 태생의 수필가 M. G. 장 드 크레브쾨르가 1782년에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할아버지가 영국인, 할머니가 네덜란드인이고, 아버지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난 4명의 자식들이 각각 다른 나라 여성과 결혼한 그런 일가도 드물지 않다. 미국인이라는 것은 그때까지 가졌던 편견이나 습관을 모두 털어버리고 현재 직면하고 있는 새로운 생활양식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이다. …… 여기서 여러 나라 출신의 개개인이 녹아서 하나의 새로운 인종이 태어난다.” 미국을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는 “미국의 경험”이라는 인종의 야금학이 얼마나 잘 작동할지 의문을 품는 경우도 있었다. 찰스 디킨스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미국 중서부의 열차 안에서 무언가를 오해한 그가 “보시다시피, 저는 외지에서 온 이방인입니다”라고 차장에게 사과하자, 차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우리 미국에서는 모두 이방인이랍니다.” --- pp.258-259

경기 침체는 유용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매서워야 하지만 경제가 자동으로 조절해가므로 기간이 길 필요는 없다. 정부, 경제계,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심이 전부이다. 1920년의 경기 침체는 하딩의 정부 부문 축소에 힘입어 1년도 안 되어 자동 조절을 끝마쳤다. 1929년의 불황이 그것보다 더 길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쿨리지가 말했듯이 미국 경제는 기본적으로 건전했기 때문이었다. 4주 동안이나 계속되던 주가 폭락이 멈춘 11월 13일, 최고치 451을 기록하던 주가지수는 224로 떨어졌다. 여기에는 잘못된 점이 없었다. 1년 동안 급등하던 1928년 12월에도 주가지수는 겨우 245에 불과했으므로, 이 폭락은 단지 투기 요소를 제거하고 배당금 대비 적정 가치에서 건전한 주식만 남겨놓았을 뿐이었다. 이 경기 후퇴 역시 스스로 조절되는 기능에 맡겨놓았더라면 과거의 사례와 비교해볼 때 1930년 말에는 조절을 끝냈을 것이며, 그 결과 신뢰가 회복되어 세계적인 불경기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천천히 그리고 가차 없이 하강을 계속했고 경제적 현실을 더 이상 반영하지 않았다-시장은 진정한 기능을 상실했다. 대신에 파멸로 가는 원동력이 되어 모든 미국 국민, 나아가 세계 사람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1932년 7월 8일자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주식시장의 혼란이 끝날 무렵 산업주의 주가는 224달러에서 58달러로 폭락했다. 유에스스틸의 주가는 1929년 시장이 붕괴되기 전 262달러에 매매되었으나 이제는 겨우 22달러에 불과했다. 세계에서 경영 상태가 가장 좋다던 제너럴모터스의 주가도 73달러에서 8달러로 급락했다. 이쯤 되자 미국의 앞날을 바라보는 눈이 크게 바뀌고 한없이 악화되리라는 전망만 난무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정상적으로 경기가 회복되지 않았을까? --- pp.369-370

또다시 스탈린이 머뭇거리는 미국 전략가들에게 구원의 손을 뻗었다. 봉쇄 경계선이 어디를 통과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으나 1950년 1월 12일 국무장관이 된 딘 애치슨은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대단히 어리석은 연설을 했다. 애치슨은 중국은 지금은 공산주의국가이지만, 독립 노선을 걷는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 지도자 티토 원수처럼 이 나라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반드시 스탈린과 곧 갈등을 일으킬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이 점을 명확하게 밝혀두지만-이 점은 그 뒤 역사에 의해 정당성을 얻었다-그는 타이완과 인도차이나뿐 아니라 한국이 미군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고 말했다. 이 연설을 스탈린이 읽고 그의 주의를 끌었음이 틀림없었다.
스탈린은 티토를 처리할 때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애치슨은 몰랐지만 그 당시 마오쩌둥에게 화해의 움직임을 보냈다. 애치슨이 중국과 소련이 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언급한 것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그 위험성을 상기시켰고, 한국이 미국의 국가 이익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은 그 해결책을 암시했다. 한반도에서 제한적인 대리전쟁이 일어난다면, 중국은 진정한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을 것이라고 스탈린은 판단했다. 만약 이것이 실제 스탈린이 생각했던 것이라면 그의 생각은 옳았다. 한국전쟁은 중국과 소련이 관계를 끊는 것을 10년이나 연기시켰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는 전쟁을 가져다줬다. 스탈린은 1950년 봄 북한의 공산주의 지도자 김일성이 11월에 38선을 넘어 제한된 남침을 감행하도록 허락했던 것 같다. 38선을 경계선으로 한반도는 북쪽의 공산 진영과 남쪽의 민주 진영으로 분단되었고 남쪽에는 500명의 미군이 고문으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신중했을 뿐 아니라 남이 시키는 일이나 하고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스탈린의 귀띔을 전면 침략을 허가한 것으로 받아들여 6월 25일 남침을 개시했다. --- pp.509-510

여기서 이야기는 미국의 중대한 구조 변화로 옮겨간다. 미국은 초창기부터 줄곧 평등한 사회를 유지해왔는데, 남자들은(그리고 실제로 여자들도) 신분의 차이에는, 예를 들어 그것이 존재하더라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누구나 어떤 상대방이든, 심지어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악수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워싱턴은 그 권리를 거부하고 머리 숙여 인사로 대신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 평등 정신은 어떤 몇 가지 이유-경험, 학식, 지위, 부, 관직, 인품 등-에 의해 “보스”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나타냄으로써 균형을 이뤘다. 평등주의와 경의의 조화는 미국이 가진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였으며, 또한 가장 큰 장점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변화가 생겼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보스”라는 말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으며 더 이상 통용되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었다. 경의 그 자체가 권위를 적대시하는 새로운 풍조에 굴복했다. 오랫동안 확립된 계층제도에 도전하고, 반항 또는 무시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이런 풍조가 어디서나 번져나가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곳은 언론(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한마디로 말해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을 가리킨다)의 세계였다. 텔레비전은 여론 형성뿐이 아니라 방송국 자체 내의 의사결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텔레비전으로 유명해진 스타가 늘어남에 따라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원래 직무상의 지위는 낮지만 대중의 인기를 얻어 유명세를 타면서 귀중한 상품이 되었고, 곧 직급이 높은 상사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고 결국에는 (사람에 따라서) 방송국 소유주와 어깨를 견줄 만큼의 높은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마침내 경영진도, 더군다나 주주도 아닌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 진행자가 해설의 논조나 견해의 요지를 결정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조짐은 일찍이 CBS TV 방송국의 사회 문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시 잇 나우(See It Now)”의 사회자 에드워드 R. 머로가 미국 여론 형성의 선구자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1954년 3월 9일에 방송된 매카시의 인터뷰는 이 상원의원의 파멸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프로그램에 관한 모든 것은 머로 자신과 프로듀서가 직접 기획했으며 CBS TV 방송국의 경영진이나 임원, 소유주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의견 형성 권한은 소유주나 경영진에서 프로그램 제작자와 사회자로 서서히 하지만 점차적으로 거의 완전하게 넘어갔다. 1950년대에 들어서기까지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이 현실은 1960년대 말에는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또한 텔레비전의 뒤를 따라 신문 매체의 세계, 특히 동부 지역의 주요 일간지나 잡지에 똑같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약간의 예외는 있었으나 정치에 대한 발언권이 소유주나 대주주에게서 편집자와 기자에게로 옮겨갔다. 허스트나 매코믹(「시카고 트리뷴」지), 퓰리처, 헨리 루스(타임라이프 사) 등 예전에는 간행물의 정치적 방향성을 매우 상세한 부분까지 결정했던 소유주들이 퇴장했고 대신에 실제로 실무를 담당하는 언론인들이 그 권한을 넘겨받았다. 이 언론인들은 매우 진보적인 견해를 보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뿐 아니라 문화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실제로 미국을 전통적인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데 이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것은 없을 것이다. --- pp.544-545

그럼에도 1990년대 중반에는 인구의 약 12퍼센트가 “빈곤선(빈곤 여부를 구분하는 최저 수입-옮긴이) 이하”의 상황에 처했으며, “상류층”과 “하류층”이 존재하며 두 계층은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년에 걸쳐서 최상위 계층 10퍼센트의 소득은 실질적으로 18퍼센트나 상승했고 최하위 계층 10퍼센트는 11퍼센트나 감소했다. 1980년대 말 무렵에 인구의 1퍼센트를 차지한 최고 부유층은 93만 2,000가구였고, 아울러 그들은 전체 인구의 90퍼센트가 소유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했으며 소득의 절반 가까이를 “수동적인 투자”(주식, 채권, 신탁, 은행주, 부동산)에서 획득했다. 근로소득은 불평등의 증대와 같은 경향을 보였다. 1980년대 초 경영 책임자의 평균 소득은 육체 근로자의 평균 소득보다 109배나 많았고, 또한 10년 사이에 경영 책임자 평균 소득이 212퍼센트나 늘어난 데 비해서 육체 근로자 쪽은 53퍼센트가 늘어나는 선에서 그쳤다. 1993년에 미국 최고 경영 책임자는 공장 근로자의 (평균) 157배나 소득을 더 올렸다. 반면에 일본의 경우는 17배를 기록했다.
1961년부터 1996년에 이르는 기간을 전체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통계에 따르면 상류층은 갖가지 특권과 혜택을 누렸다. 군대에 징집될 가능성이 전보다 더 줄어들었으며-1962년부터 1972년에 전형적인 상류층 대상의 3개 대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3만 9,701명이었으나 베트남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장병은 전체 전사자 5만 8,000명 가운데 겨우 20명뿐이
었다-아이비리그의 입학 허가를 받거나 공직 사회에 진입할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한 예를 들자면 레이건의 재임 기간 동안에 임명된 연방 지방법원 판사 가운데 22.3퍼센트가 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순자산을 보유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 p.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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