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Left’와 ‘우파Right’라는 어휘는 프랑스혁명이라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환경에서 생겨났다. 프랑스 제헌의회가 1789-91년에 국왕에게 남겨진 권한과 국왕의 거부권 문제를 놓고 분열되었을 때, 급진파는 의장 자리에서 볼 때 의회 왼쪽에 자리잡아 오른쪽에 자리잡은 보수파와 마주보았다. 이런 자리 배치가 뚜렷해지면서 ‘왼쪽’, 즉 ‘좌파’는 국왕 거부권 폐지, 단원제 입법부, 임명이 아닌 선출에 의한 사법부 구성, 권력분립 및 강력한 행정부가 아닌 입법부의 우위, 그리고 ―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 1인 1표의 민주적 참정권 등을 채택하는 강력한 민주주의적 입장과 동일시되었다. 자코뱅 독재가 급진화의 절정에 달한 1793-94년에 직업적인 상비군에 대립되는 민병대, 교권 반대, 누진세 등을 비롯한 추가적인 항목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민주적 제안들이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살아남아 19세기 정치적 풍경의 대부분을 지배한 것처럼, ‘좌파’와 ‘우파’라는 용어도 유럽의 일반적인 어법으로 자리잡았다---P.51
이러한 진전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비판을 시작한 1850년대의 압도적인 고립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광경이었다. 1848-50년의 3년 동안 음모와 바리케이드, 격렬한 언론활동과 끊임없는 혁명적 흥분의 시기를 보낸 뒤, 마르크스는 전혀 혁명적이지 않은 런던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채 망명과 패배의 실망감에 사로잡히고 가난과 질병과 가족의 죽음이라는 곤경에 시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주로 망명자들의 방랑과 공상을 통해 유럽 전반의 혁명이라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있던 마르크스는 이제 책더미에 정력을 쏟아부었고, 대영박물관에서 고된 연구와 저술에 집중하면서 혁명이라는 ‘늙은 두더지’가 아직도 확실히 ‘땅을 파헤치고’ 있는 역사의 지하 작용을 굳게 믿었다. 당시는 민중정치가 다시 뚜렷하게 움직이기 시작하기 10년 전이었다. 1860년대에 이르러서야 1849년 이후 반동의 굳건한 안정성이 느슨해지게 된다---P.77-78
마르크스는 블랑키주의자들과의 경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었다. 1848년 이전에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에서 블랑키주의가 주된 혁명 전통이었다. 파리코뮌 전까지만 해도 바리케이드, 민중봉기, 규율 잡힌 음모 지도부, 영웅적 희생, 독재의 필요성 등에 관한 블랑키주의의 이미지가 여전히 혁명의 상像을 규정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0년대에 음모 정치를 거부했고, 1848년에는 전위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반대를 확인했다. 그 대신 두 사람은 공개적인 선동과 내부 조직 모두에서 최대한 광범위한 대중민주주의를 역설했다. 자본주의가 전개되면서 다수로 부상할 진보의 작인으로서의 노동계급이라는 사상과 연결된 이러한 생각은 혁명의 상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부터 혁명은 독단적인 음모에 의해 꾸며지는 임의적인 봉기가 아니라, 착취적인 자본주의 세력의 협소한 진영을 몰아내기 위해 사회주의 정당을 통해 혁명의 잠재력을 공개적이고 민주적으로 조직하는, 사회의 절대 다수인 한 계급의 권력 장악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관점의 승리는 완벽한 것이었다---P.88-89
1860년대는 좌파에게 핵심적인 분수령이었다. 예전의 전통들은 빛을 잃었고, 한편으로 무정부주의 같은 다른 전통들은 국제운동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그러면서 의회 영역에 초점을 맞추는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동자 정당이라는 새로운 이상이 등장했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입헌주의는 여러 노동운동에 처음으로 지방적인 차원을 넘어선 합법적 선동을 허용한 1867-71년의 극적인 자유화로부터 비롯되었다. 소속 지부의 많지 않은 회원을 훨씬 넘어서 영향력을 발휘한 제1 인터내셔널 역시 사회주의적 입헌주의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사회주의적 입헌주의의 관점은 이 시기에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고참 조언자로서 영속적인 역할을 맡았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점이기도 했다---P.127
1차대전 이후 민주주의가 다시 확대되자 가장 성공한 사회주의 정당들은 이러한 좀더 배타적인 계급정치의 전통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호소를 확장했다. 이 정당들은 자기 사회의 좀더 광범위한 진보 블록을 대변하기 시작하면서 일반 노동자 대중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집단들의 희망도 사로잡았고 1914년 이전 시기에 우세했던 노동계급성working-classness의 다소 배타적인 정의를 넓혀놓았다. 이러한 확장은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주의 정당들에서, 그리고 영국 노동당이 선거에서 이룩한 성과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붉은 빈’ 장악 등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앞서 제2 인터내셔널의 당들이 1900년대 초에 더 큰 인기를 누렸을 때에도 이 당들은 여전히 주로 사회의 특정한 부문을 대변했다. 이 당들은 조직화되고 체통 있는 남성 노동계급의 정당이었다. 1914년에 이르기까지 이 당들은 여전히 유럽 각국의 정치체제 내에서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여지고 통치질서에서 배제되었으며, 정치적 고립을 박차고 나올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당들이 도전적으로 끌어안은 것은 바로 이러한 고립이었다---P.166-167
‘여성문제’에 관한 사회주의의 우유부단함은 민주주의 자체의 중심적인 쟁점인 참정권과 관련하여 최악의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계급 남성들이 투표권을 갖고 있는 곳에서 사회주의 정당들은 여성의 투표권을 우선순위에 놓는 데 실패했다. 남성 참정권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는 곳에서는 여성의 참정권을 미래의 목표로 미뤄두었다. 1900년에 이르러 선거정치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주의자들은 노르와 겐트의 강력한 여성노동운동을 무시했다. 투표권이 없는 여성 노동자들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강력한 곳에서는 ‘부르주아적인’ 여성권 캠페인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복잡한 계산이 작용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반反페미니즘이 그 자체로 남성 참정권을 쉽게 달성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참정권론자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계급적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만의 편파적인 전략을 갖고서 현실주의적인 목표로서 남성이 향유하는 재산 제한조항을 둔 선거권을 요구했다. 대중적인 사회주의 정당들이 민주주의의 논의를 독점한 곳에서는 ‘여권론자womens-rightser’들과의 간극이 확대되었고 ‘페미니즘’은 중간계급의 이기적인 요구로 낙인찍혔다. 노동운동의 남성주의적인 문화와 가족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감안하면, 사회주의 정당에서 민주적인 페미니즘이 자리할 공간은 협소했다---P.204
결국 볼셰비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러시아의 구체적인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후진성뿐만 아니라 조숙성도 포용한 점, 농민을 옹호한 점, 소비에트가 제도의 중심이 된 점, 다른 좌파 정당들과 행동으로 구별된 점, 유럽의 전반적인 상황을 세계적으로 분석하면서 서구에서 동조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을 확신한 점 등. 레닌과 트로츠키의 남다른 개성 같은 다른 요인들 역시 중요했다. 그러나 민중의 급진주의가 고조되고 사회의 양극화가 격화되는 상황에서 볼셰비키를 권력의 자리로 이끈 요인은 무엇보다도 거침없는 행동주의와 놀랍도록 명쾌한 관점의 결합이었다---P.288
비록 여성들이 전례 없는 자율성을 얻긴 했지만, 이러한 조치는 남성에 대한 의존상태라는 자격을 세심하게 구축해놓았다. 여성들에 대한 직접적인 수당 지급은 의심할 여지없이 전시 여성들의 독립성을 강화했다. 어느 영국인 부인의 말을 빌리자면, “1주일에 1파운드씩 받는데다가 남편이 멀리 떨어져 있다니 너무 좋아서 진짜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여성과 어린이의 부양은 엄밀하게 보자면 여전히 남성의 책임이었고, 단지 국가가 이를 일시적으로 대리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시민권의 모델은 ‘모성’을 ‘병역’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보완물로 만들었다---P.363
혁명의 파괴성은, 비록 그 적들에게는 ‘폭도’의 분별 없는 폭력을 의미할 뿐이었으나, 신선한 사고를 위한 상상력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1차대전으로 인해 부르주아문명이 난국에 처한 상황에서 이 문명에 대한 아방가르드 예술의 공격에 담긴 상징적 급진주의가 좌파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문화의 의제를 형성했다. 1918년에 이르러 이탈리아 미래파가 파시즘 속으로 흩어져버린 반면, 마야콥스키Vladimir Vladimirovich Mayakovsky 같은 러시아의 미래파는 러시아혁명이 만들어낸 기회를 민첩하게 포착했다. 마야콥스키는 “거리가 우리의 붓이요,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다”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혁명국가를 지키는 일에 신명나게 몸을 던졌다---P.383
문화적인 측면에서 사회주의를 예시한 사회주의 전략의 사례 중 가장 강력했던 두 가지를 검토해봄으로써 몇 가지 해답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겠다. 첫 번째로 ‘붉은 빈’은 전간기 유럽에서 지방자치 사회주의를 보여준 가장 인상적인 사례였다. ‘붉은 빈’의 중심적인 성과는 대규모 주거단지에 6만 4,000세대의 아파트를 건설해, 노동자 임금의 5퍼센트 정도의 임대료로 도시 주민의 7분의 1에게 주택을 공급한 공공주택 정책이었다. 사치세luxury tax를 통해 재원을 조달한 이 공공주택은 직접적인 재분배 전략이었다. 게다가 이 정책의 규모와 성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주민이 100만 명 이상인 도시를 통치한” 첫 번째 사회주의 정당이었고, “‘붉은 빈’은 대도시의 하부구조 전체를 개혁하는 사회주의의 장기 전략의 첫 번째 실제 사례였다.” (400
유럽의 평화가 주로 해외의 식민주의적 폭력에 의해 깨졌던 1871-1914년과 대조적으로, 1918-39년은 혁명과 반혁명의 투쟁, 내전, 전례 없는 경제불황, 새롭게 나타난 사회 양극화의 시기였다. 국가테러와 격렬한 국제적 긴장은 2차대전과 여러 민족의 대량학살에서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한 가지 엄청난 사실이 두드러진다. 1917-21년이 범유럽 차원의 여러 민족의 봉기, 즉 고전적인 19세기 모델에 입각한 바리케이드 혁명의 연쇄반응의 마지막 시기였고, 옛 체제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 뒤에도 개별적인 반란이 일어나기는 했다 ― 1936년에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수립된 인민전선, 2차대전 중에 발칸에서 벌어진 레지스탕스 투쟁, 1956년의 헝가리봉기, 1968년 파리 5월사태, 1974년의 포르투갈혁명, 1989년의 동유럽혁명 등등. 그러나 대중이 움직이고 있다는 도취감, 이전의 견고한 구조들이 갑자기 흔들리고 역사가 전환될 수 있다는 도취감은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1917년의 느낌, 죄르지 루카치가 ‘혁명의 현실성actuality of the revolution’이라 이름 붙인 느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P.435
외국의 공산주의자들도 이런 만행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독일인, 헝가리인, 유고슬라비아인 등을 필두로 하여 대부분의 망명자 집단이 희생양이 되었고, 스페인내전 참전군인이나 코민테른 관리 등과 같이 국제적인 연계가 있는 이들도 표적이 되었다. 톨리아티와 디미트로프만이 자기 동지들을 어느 정도 보호해줄 수 있었다. 폴란드 공산당은 지도부와 망명 투사들이 살해당한 뒤 공식적으로 해산되는 야만적인 대접을 받았다. 이런 잔학행위는 소련 공산당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아마도 최악의 잔학행위는 학살은 끝났지만 구금자 수는 여전히 늘어나고 있던 때 일어난 일일 것이다. 나치-소비에트 조약에 따라 1940년 2월에 500명쯤의 독일 망명자들(대부분 공산당원이었다)이 국경까지 인도되어 나치에게 넘겨졌고, 나치는 이 사람들을 포로수용소로 이송했다---P.514-515
붉은 군대의 승리가 야기한 정치적 심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지만, 공산주의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레지스탕스에 기인한 것이었다. 나치 지배의 야만성은 공산주의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엄격한 규율과 이례적으로 강한 헌신성을 요구했다. 그 결과 나타난 정치문화는 또한 매우 애국적이었다. 레지스탕스는 좌파와 국민의 독특한 동일시를 낳았다. 계급이 대중투쟁과 융합되면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고립을 깨고 폭넓은 연합을 이루었고 때로는 전국민의 지도부를 자임하기도 했다. 파시즘이 서구문화의 가장 인간주의적인 업적을 위협하기 시작할 때인 1930년대의 인민전선 캠페인을 출발점으로 지식인들을 획득한 것이 무척 중요했다. ‘문명이냐 야만이냐’라는 언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동원할 수 있었던 좌파의 능력 역시 당시의 조건에 꼭 맞아떨어졌다---P.529-530
1945-46년에 유럽의 급속한 개방에 직면한 미국의 정책은 개혁을 밀어붙이기보다는 오히려 제동을 걸었다. 사실 마셜원조는 전후의 새로운 패턴을 확립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서 냉전의 막을 열기 위해 반공주의와 직접적으로 결합했고 그 결과 자신의 개혁주의적 소망을 부정했다. 반공주의는 유럽 사회의 가장 반동적인 부문과 제휴하도록 고무하면서 개혁주의 실험의 여지를 사실상 완전히 없애버렸다. 예를 들어 그리스에서는 온건한 사회민주주의라는 대안조차도 즉시 난도질을 당했다. 내전이 끝난 뒤 그리스 농민과 노동자들은 우익의 야만적인 탄압뿐만 아니라 빈곤을 영속화하는 경제정책의 대가까지도 감내해야 했다. 서구의 원조는 반공주의의 반동적인 효과와 유착하여 그리스 사회에 장기적인 종속의 틀을 강요했다. 이 나라에서 미국의 정책은 반공주의를 우선과제로 내세우면서 마셜원조에서 공언된 개혁주의 의제를 완전히 침식했다---P.552-553
1월 2일, 쿠바의 카리스마적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1968년을 전년 10월에 볼리비아에서 살해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를 기념하는 ‘영웅적 게릴라의 해Year of the Heroic Guerilla’로 선포했다. 뒤이어 아바나Havana에서는 남북 아메리카와 유럽의 지식인 400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제 문화대회가 열려 쿠바혁명에 대한 국제적인 열광을 집중시켰다. 한편 동아시아는 중국의 문화혁명(1965-69년), 엔터프라이즈호USS Enterprise 입항에 항의하는 일본의 학생소요, 북한의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USS Pueblo 나포사건 등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1월 30일,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즉 이른바 베트콩Vietcong이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들에 대해 설공세Tet Offensive를 벌여 미국의 베트남정책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미국과 남베트남 군대가 후에Hue를 수복할 무렵에는 이들의 위신이 산산조각난 상태였다---P.618
이것이 구좌파의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1968년 5월은 새로운 무언가를 위한 공간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전투적 행동의 반권위주의가 주된 추진력으로서 점점 커지는 드골주의 정치문화의 균열을 폭발시켰다. 이것 ― 콩방디와 ‘3월 22일 운동’의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 ― 은 좌파의 두 번째 정치였다. 오데옹극장과 민중작업실, 연좌농성과 시위의 집단적 문화, 무정부주의적 벽보신문, 끝없는 토론, 물자 공급과 배포의 실제적인 임무, 사적 공간의 집단화 등에서 이런 정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정치는 총회와 행동위원회 속에 존재했다. 이 정치는 보통사람들의 행동과 힘이 나타날 수 있는 장소였다. 자기실현을 향한 끓어 넘치는 욕망이 터져나왔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파업은 하나의 불꽃 같았고, 낭테르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던 모든 것이었다. 엿 먹어라, 위계제, 권위, 차갑고 이성적인 엘리트주의 논리로 무장한 이 사회! 엿 먹어라, 꼭대기에 앉아 있는 쩨쩨한 사장과 관료들! 엿 먹어라, 자기가 만들어낸 비참, 가난, 불평등, 불의를 애써 못 본 체하는 꿈쩍도 하지 않는 이 사회!” (635-636
1968년이 남긴 다른 두 가지 유산은 좌파의 미래에 대해 훨씬 더 중요했다. 하나는 의회 외부 정치의 부활이다 ― 직접행동, 공동체 조직화, 참여의 이상, 소규모 비관료적 형태들, 풀뿌리에 대한 강조, 일상생활과 정치의 일치. 다른 하나는 1970년대 동안 가장 창조적인 의회 외부 저항이었던 페미니즘과 새로운 여성운동의 부상이다---P.661
스탈린주의는 좌파에게 철저한 재앙이었다. 1920년대 후반 이후 공산주의 정당들의 경직성의 일반적인 명칭이었던 스탈린주의는 이 당들의 신뢰성을 크게 손상시켰다. 비밀주의, 조작, 무자비함, 다른 곳의 명령 수용 ― 공산당에 대한 이런 고발이 모든 유형의 좌파에게 일반화되었다. 모든 좌파가 한덩어리로 취급되었고, ‘내부의 적’, 모스크바의 끄나풀, ‘침대 밑의 빨갱이’ 등으로 영원한 혐의자 딱지가 붙었다. 이와 같은 반공산주의 유언비어는 ‘당 노선’에 대한 ‘강철 같은’ 규율을 찬미했던 스탈린주의 정치문화로부터 신빙성을 이끌어냈다. 스탈린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1948-53년에 공산당은 반대자들에게 무시무시한 논쟁을 퍼붓는 한편 민주주의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자기 당내의 관행은 감추었다. 1940년대 중반을 출발점으로 하여 서구 공산당들이 민주주의의 유산을 되찾으면서 냉전이라는 이런 어두운 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장기적이고도 지난한 투쟁이 필요했고, 유로코뮤니즘은 이런 투쟁을 위한 결정적인 추진력이 되었다---P.775
당과 사회의 진보적 블록으로서 폭넓은 개혁연합을 유지하기에는 이제 너무 늦어버렸다. 프라하의 봄이 이런 희망을 고취시켰던 1968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에는 스탈린주의 이후의 진보가 결실을 맺고 있었고, 장기 호황이 세계적인 정점에 달했으며, 혼합경제라는 사회민주주의의 이상이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에서 충분히 광범위한 세력을 이끌지 못했다. 새롭게 자유를 얻은 공공영역에서 폭넓은 연합을 형성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잇속만 챙기면서 인기를 노리는 옐친의 파괴적인 민주주의 옹호에 자극을 받아 급진파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1970년대의 수세와 국제적 약세를 딛고 활기를 되찾아 공세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대안으로 제기했고, 서구의 지지를 얻으려면 사실 그 대안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개혁과정의 내깃돈은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되었다. 독일민주공화국 국민들에 대한 콜의 통일 제안이든, 동유럽에서 새로 선출된 정부들에 제시된 ‘충격요법’이든, 1990-91년 소련에서 두 극단으로 나뉜 대안이든 간에 탈공산주의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 거래가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P.823-824
동성애의 정치학은 일터와 노동조합, 노동계급의 구체적인 삶에 깊이 휘말려드는 한편 계급을 중심으로 한 구좌파의 경제의 정치학과는 구별되는 ‘정체성’운동을 형성했다. 1968년은 이 운동에 지워지지 않는 징표를 남겼다. 국제주의가 하나의 요소로서 미국과 영국의 동성애자해방전선에서부터 서유럽에 이르기까지 퍼져나갔고, 1979년에 벨기에에 본부를 둔 국제동성애자협회International Lesbian and Gay Association를 통해 제도화되었다. 1995년에 이르러 국제동성애자협회는 50개 국가의 300개 회원조직을 포괄하게 되었다. 동성애자해방전선의 활동방식 역시 1968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 소규모, 참여 중심, 직접행동, 정당보다는 운동에 기초한 방식 등등. 연극적이고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개인과 일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적 스타일도 마찬가지였다. 동성애자해방전선은 가족과 성차별주의 비판, 육체의 정치학, 성애의 정치화 등을 통해 정치적인 것의 범주 자체를 재정의했다. ‘여성해방’과 마찬가지로 이 운동 역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접합하면서 성애를 발설할 수 없는 이면이 아닌 급진주의의 언어로 만들었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았다. 베테랑 무정부사회주의자이자 성철학자인 다니엘 게랭Daniel Guerin은 1968년 5월사태의 도가니를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치학과 동성애를 결합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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