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모에는 가즈히토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가족을 만들고 싶어서 동거가 아닌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 도모에는 아이를 낳는다면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또 낳은 후에 잘만 하면 일도 가정도 자기 방식대로 잘 지켜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지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도모에의 절실함에 가즈히토는 전혀 공감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아기를 낳지 못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도 문제였다.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모든 일은 그렇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도모에는 계획을 좋아했다. --- p.52~53쪽
후지시로가 범인일 리 없잖아. 계속 나랑 같이 있었는데. 사토루는 연거푸 눈을 굴리며 침을 꿀꺽 삼켰지만, 할아버지 히다 류타로로부터 한 대를 뛰어넘어 유전된 무사 안일주의적인 성격이 중학교 2학년인 사토루의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얕은 지혜로 만든 ‘공립 중학교 서바이벌 매뉴얼’의 여섯 번째 조항이 사토루의 머릿속에서 내내 맴돌고 있었다. 여섯, 따돌림에 가담하지 않되 왕따와도 거리를 둘 것. 이건 가담한 걸까. 가담하고 만 것일까. 아니면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일까. 가담, 가담, 가담, 가담, 거리, 거리, 거리, 거리. 인수분해는 곧잘 푸는 야나이 사토루가 이렇게 간단한 도식은 풀어내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보다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사토루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p.80쪽
“이 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는구나.” 잠시 뜸을 들이던 다케는 다소 무거운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왜 그래, 할머니,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지금부터 하는 말은 하루코에게 비밀로 하거라. 그 아이에게는 절대로 알리면 안 돼.” “알았어. 엄마한테 비밀로 할게.” 이쓰코가 도모에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손을 잡고 걷다가 하루코가 내 손을 놓치고 말았어. 그래도 금방 고사리 같은 손이 내 손을 다시 잡기에 뒤돌아봤더랬지. 그랬는데, 거기에, 하루코가 없더구나.” 두 손녀딸은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다들 걷고 있었어. 일본으로 돌아올 때 말이다. 나는 하루코의 손을 잡고 하루코보다 앞서 걷고 있었는데 도중에 손을 놓치고 만 거야. 그래도 금방 고사리 같은 손이 내 손을 다시 잡았어. 그래서 뒤를 돌아봤더랬지. 그랬는데, 하루코가 아니더구나.”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이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이후, 하루코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정적이 식탁을 지배했다. 나의 하루코?. --- p.131~132쪽
가쓰로는 방을 나와 창고 문을 두드렸다. 안 된다, 안 돼. 사토루, 너는 이쪽으로 오면 안 돼. 이쪽으로 한번 오면 저쪽으로 다시 가기가 어려워져. 그러면 나처럼 계속 이쪽에서 살 수밖에 없게 돼. 너는 그렇게 될 인물이 아니야. 나처럼 살 인물이 아니란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거기서 나가야 해. 나는 너의 네거티브 인디케이터야. (…) 앞으로 살면서 고민할 일이 생기면 나의 반대로만 행동하면 돼, 사토루. 그러면 너는 제대로인 어른이 될 수 있어. 그런데 제대로 된 어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가쓰로는 근본적인 의문에 사로잡혔다. 몇 제곱미터 넓이의 행동반경을 갖고, 몇 명의 지인이 있고, 돈을 얼마쯤 갖고 있으면 그걸 ‘제대로’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 p.160~161쪽
한번은 이쓰코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보니 된장국에도, 중국식 채소볶음에도 표고버섯이 들어 있었다. 하루코는 속이 상했다. 집을 나간 지 십 년이 지나면 아빠가 싫어하는 음식조차 잊고 마는 걸까? “아이고, 내가 정말 못 산다. 이쓰코, 아빠는 표고버섯을 못 드시잖니. 이럴 때가 아니지, 아빠가 드실 식사만 내가 다시 만들어야겠다.” 하루코가 이렇게 말하자 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끔은 좀 먹으면 어때. 먹을 거지, 아빠?”라고 대꾸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류타로가 아무 불평 없이 표고버섯을 먹는 게 아닌가. 그 일만 떠올리면 하루코는 가슴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사십 년 동안이나 내가 좋아하는 표고버섯도 참아가면서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만 만들어왔는데. 표고버섯 요리는 남편이 집에 없을 때만 만들어 먹었는데. 남편이 먹을 수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 사십 년 동안 나는 속고 살았던 거야!’
--- p.223~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