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날이 갈수록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이런 연유로 광무 원년 초대 황제인 짐, 고종은 그대를 유럽으로 보내 일본 정부의 지나친 권력 행사를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하노라…….”
제대로 들은 것인가?
떠난다니? 내가? 유럽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하여 세상의 끝, 프랑스라는 계몽국가,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의 나라로 간다니.
“경은 가능한 한 빨리 채비를 갖추어 대한제국을 떠나도록 하시오.”
현기증. 울컥 가슴이 터질 듯 치밀러 오르는 오열 같은 그 무엇.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조부의 친구인 에티엔느 마르텔, 그 덕에 언제나 자유를 옹호해 왔던 나라의 언어를 배웠다. 마침내 그곳에서는 대한제국 국민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리라는 것을 그는 전혀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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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말수가 줄어버린 노 외교관은 일환의 시선을 피하는 듯했다. 콩브(1902-1905 사이 프랑스의 총리) 행정부는 불행히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것은 몇 주 후면 장관들이 다 바뀌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우리 정부에서 자네 말에 귀를 기울일지 의심스럽네. 더구나 영국 신사 양반들과 다시 사이좋게 지내자는 ‘영불 협상(1904년주)’을 맺은 이후로, 안타깝게도 영국인들은 혹시 러시아가 승리해 만주를 계속 점령하게 된다면 중국에서 그들의 이권이 위협받을까봐 일본과 활발히 접촉하며 간계를 꾸미고 있거든.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이후, 비록 황제의 명을 받아 파견되었다 해도 자넨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이야! 그래, 내 말을 믿게. 자네는 분명 지금 식민지 정책에 대해 심히 반발하는 몇몇 불평분자들에게서 신뢰를 얻을 거야. 그 수많은 친구들 중에 나도 해당이 되지만. 동시에 자네는 기자들을 만나고, 계속 돌아다녀야 할 걸세. 그래, 언론이라는 영향력 있는 그 조그만 세계가 중시하는 모든 걸 만나야 하고, 우리의 여론을 구체화시키는 일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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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선은 그랑 팔레의 둥근 지붕 너머 아득한 곳을 향하다 모래를 실은 바지선들과 잔잔한 흐름을 타고 센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은 보트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거기 빠져버리고 싶은 욕망. 석양빛에, 방울져 흐르는 바로크풍의 그 엷은 보랏빛에, 자신의 무능함과 절망만을 도드라지게 하는 비극적 오페라에.
자신이 맡은 임무의 공식적 목표가 거의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면, 빨리 파리 체류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 아닌가? 그런데 무척이나 당혹스럽게도 그 순간 그런 생각은 그토록 걱정하던 실패보다도 더욱 더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 p.201
“나는 내 나라 생각을 해요.”
잠시 후 그가 툭 말을 던졌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일단 고국에 돌아가면 그곳에서 엘레나를 생각하며 겪게 될 향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상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가 상상하는 엘레나는 에트르타의 해변에도 부산의 뒷골목에도 있었다. 그녀가 그의 곁에 있고 자신이 꼭 쥔 엘레나의 손을 느낀 순간부터. 쉽게 전염이 되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덧창 그림자를 간질이는 순간부터.
--- p.208
그녀는 봉투에게 누렇게 바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는 남녀 한 쌍의 사진이었다. 우아하게 서양식 복장을 한 남자에게서는 여전히 일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쪽 다리를 이상하게 다른 다리 위에 걸친 그 자세는 오히려 경직되어 보였고,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을 때부터 남편 곁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금발의 여자는 점점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거기서는 사진에 나타날 정도로 자유스러운 여자들을 그렇게 부른다던데, 이 여자도 화류계의 여자일까? 아무튼 자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 곁에 앉을 정도로 대담하다고들 하던데……. 어쨌건?스스로 인정해야만 할까??그 여자의 솔직함과 쾌활함이 순희의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사진을 뒤집었다. 오른쪽 아래에 1905년 6월 12일이라는 날짜가 나왔다. 그 아래에는 서명도 없이 거의 지워지다시피 ‘내겐 단 하나의 정원이 있을 뿐’이라는 글이 적혀 있지만 일환의 글씨체라고 알아볼 수는 없었다.
--- p.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