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은 생활이 빈궁할 때에 생기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계속해서 흉년이 들었고 수령들 또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이런 반적(叛賊)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위에서도 매우 한심스럽게 여겼다. 이제 잡기 어려웠던 적을 포획하여 백성들이 베개를 높이고 편안히 잘 수 있게 되었으니, 매우 잘한 일이다. 도적을 잡은 전말에 대해서 자세히 계달하라.” 하니, 곽순수 등이 잇달아 도적을 잡게 된 정상을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해서(海西) 지방이 이 소적들로 인해 백성이 해를 입게 되어 장차 버린 땅이 될까 싶어 무척 가슴이 아팠다.” 하고, 이에 술을 내리고 각각 차등 있게 상을 하사하였다. --- pp.108-109「송월당유고 명종실록」중에서
책을 펼쳐 눈여겨보니 내외 먼 자손들까지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일가친척을 사랑하고 화목을 두텁게 하는 도의가 이 책으로 인해 일어나서 기필코 가문이 번성할 아름다움을 영원하게 기약할 수 있겠도다. 따라서 후손들도 이를 계승하여 연속적으로 성보를 완성하여 주기를 간곡히 바라는 바이다. --- p.157「밀양박씨만력경신보 서문」중에서
승정원일기의 기사 말미에 ‘출이상고판서박정현일기(出已上故判書朴鼎賢日記)’라고 기록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의곡공의 사사로운 개인(個人) 일기(日記)가 승정원일기의 초책본이 된 것이다. --- p.158「박정현일기」중에서
의곡(義谷) 박정현(朴鼎賢)은 1631년(인조 9 辛未/명 숭정 4) 70세가 되자 예규(例規)에 따라 형조판서(刑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돈령부(敦寧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역임하고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이 되어 조참(朝參)이나 상참(常?)에 늦지 않고 참석하여 기로소 구신(舊臣)들이 공의 건강함을 부러워하였다. 갑술년(1634)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고, 을해년(1635)에 임금이 문묘에 석채(釋菜)를 드릴 때 공이 종재로서 종일토록 입시하고도 아무 탈이 없었으나 이튿날 갑자기 풍담(風痰)에 걸렸다. --- p.300「의곡공의 기로소 입사」중에서
오직 영위는 밀성(密城)의 대가(大家)로, 대대로 드러나는 인물이 있었다. 순수하고 밝아 좋이 계승하니, 복과 경사 모두 모였다. 왕의 뜰에서 활동하기를 오십 년이 되어 갔다. 반열은 경월에 높았고, 영화는 기영에 올랐다. 태평시대 옛 모습에 예사롭지 않은 돌보심 만났다. 불행히도 질병에 걸리고, 연이어 피란을 하여야 했다. 하늘 남쪽에 떠돌다가 객사에서 운명하였다. 부고가 조정에 들리니, 내 가슴에 놀람을 더하였다.
--- p.305「박정현의 예장제문」중에서
“선대(先代)의 사고(私稿)는 잃어버린 것이 많고 남아 있는 것은 모두 훼상(毁傷)되었으니 불효막대(不孝莫大)하다. 죽음이 임박하여 죄스러움을 깨닫고 십여 년 병와(病臥)하면서 근근(僅僅)이 엎드려 몸소 수보(修補)하여 종순(宗淳)에게 서가(書架)에 모셔 두게 하였다. 제 자손은 비록 가까운 거리(距離)라도 가져가지 말고 잃어버릴 걱정을 막아라. 보고 싶은 이는 등초(騰草)하여 보게 하고 잃는 것을 굳게 방지(防止)하여야 할 것이다. 이 말을 준수(遵守)하지 않는 이는 결코 사람의 도리(道理)가 아니니 다시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책망하겠느냐. 신유년(辛酉年) 초가을에 종순(宗淳)에게 써서 부친다.” --- p.394「박상빈의 서찰」중에서
아! 대신의 진퇴에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다. 평시 무사한 때라도 가벼이 물러날 수 없는 것인데 근심스럽고 위급한 시기가 아니더냐. 경은 지금의 국사가 편안하다고 보느냐 위급하다고 보느냐. 하늘이 위에서 노하여 재이(災異)가 속출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원망하며 굶주린 죽음이 서로 바라보인다. 나 한 사람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의지하여 성공하려는 것은 오직 선대 조정의 한두 원로이다. 경은 훈구(勳舊)의 숙덕(宿德)이며 주춧돌 같은 존재로 구제할 책임과 경륜(經綸)의 임무가 모두 경에게 있다. --- p.413「대신을 돈유하는 글」중에서
우찬성 이귀(李貴)는 훈구(勳舊)의 중신(重臣)으로서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적이 침입하였다는 보고가 이르자마자 감히 맨 먼저 도망칠 궁리를 하여 좋은 계책을 저지하고 멋대로 막았습니다. 잔약하고 무능한 사람을 기복(起復)하기를 청하였고, 수원(水原)의 군병(軍兵)을 사적으로 비호하여 면전에서 비국의 재신(宰臣)을 욕보였으며, 합계(合啓)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도 태연하게 등대(登對)하였습니다. 염치(廉恥)를 잃은 것에 대해서는 깊이 나무랄 것도 없고 방자한 태도에 대해서는 낱낱이 거론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행조(行朝)를 수행하게 하여 그대로 비국의 반열에 둔다면, 앞으로 근심하고 걱정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필시 큰 계책을 재차 잘못되게 할 근심이 있으니, 찬출(竄黜)하도록 명 하소서. --- p.517「이귀를 찬출 하소서」중에서
계해년 반정(反正)의 초기에 먼저 등용됨을 입었고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구하여 해미(海美)현감에 제수되었다. 관리를 단속하고 백성에게 관대하여 온 군내가 편안하니 군민이 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 p.498「가장」중에서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빼어나고 영리하여 놀이하고 노는 것은 좋아하지 않고 오직 학업에 부지런하였다. 겨우 성동(成童, 십오세)이 되자 단중하고 간묵하여 행동이 규범이 있으니 모두들 큰 인물로 기대하였다. 임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니 명예가 더욱 드러나 사림(士林)이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때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모후(母后)를 폐하려고 하니 공이 태학의 재임(齋任)으로 태학생도들을 인솔하고 항거하는 소를 올려 참수하기를 청하니 사람마다 위험하게 여겼다. --- p.504「묘비명」중에서
박세웅(朴世雄: 1636∼1706)은 겨우 네 살[四歲] 때에 부친(父親: 諱承謙)을 잃고 모친(母親: 固城李氏)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할아버지 승지공(承旨公: 諱安悌)의 보살핌에 힘입어 성동(成童)이 되자 학문(學文)에 나아가 시서(詩書)를 통하고 애써 이끌지 않아도 문사(文詞)와 필법(筆法)의 규율(規律)을 이루었다. 십오 세(十五歲)에 한묵(翰墨) 사이에 나가 노는데 이미 장옥(場屋)에 이름이 알려졌다. 선대(先代)의 가업(家業)을 계승(繼承)하려는 뜻을 세우고 여러 정문(程文)을 공토(攻討)하며 병려체(騈儷體)에 더욱 힘을 썼다. --- p.529「의촌사고 해제」중에서
“선고(先考)의 사고(私稿)가 이 외에도 많은데 많이 잃어버려서 이제 남은 것은 이것뿐이다. 자손 등이 과장(科場)에 갈 때에는 반드시 등사하여 가져가고 본 책은 비록 가까운 곳이라도 절대 가져가서는 안 된다. 잃어버릴 염려가 있어서이다. 이렇게 당부하니 새겨들어라. 종순(宗淳)의 서가(書架)에 모셔두어라. 아동들이 낙점하고 더럽히거나 벌레나 쥐가 훼손할 수도 있으니 각별이 유념하여 준수하고 이 말을 저버리지 말라.” --- p.532「박상빈 종손자 종순에게 당부한 서찰」중에서
선생의 문하생으로 동문수학하였던 남간공(南磵公) 나해봉(羅海鳳)과 의촌공(義村公) 박안제(朴安悌)에 대한 이야기 도중에 송간(松磵) 나중기(羅重器)와 둔촌(遁村) 박세웅(朴世雄)은 말을 잊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한참 후에야 남간공은 나자진의 할아버지이고, 의촌공은 박사호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 pp.533-534「박세웅과 나중기의 세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