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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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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8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24쪽 | 356g | 130*188*15mm
ISBN13 9791195570416
ISBN10 119557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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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오일구
세 권의 소설을 펴낸 저자는 새로운 장르의 소설을 위해 집필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6년여 만에 색채 미스터리 장르 소설 『색채처방소』를 펴낸 것을 시작으로 2014년 눈사람 소년의 모험을 그린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거래』, 2015년 권총을 의인화한 소설 『나는 권총이다』를 펴내고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에 출간하는 장편소설 『위로의 계절』은 평범한 남녀의 사랑을 그린 새드 소설로 우리 앞에 펼쳐진 애증 어린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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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푸른색 천지의 거리에 사랑하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의 향기, 그녀의 웃음, 그녀의 몸짓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내 영혼은 한껏 들뜨기 시작했다. 내 영혼도 그녀를 보았으니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 것이었다.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손을 맞잡는 순간 사랑에 빠진 영혼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내 몸 또한 그녀를 향해 달려갈 것 같았다. 나는 한껏 들떠 있는 영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를 향해 날아가는 내 영혼을 뒤로하고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녹음실로 내려갔다. ---「박정훈 1 」중에서

창문 안의 어둠 속으로 나를 미워하고 자신을 증오하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차라리 나를 증오하라고 애원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자신을 증오하는 고통도 나한테 떠넘기라고 구걸하는 내 속마음이 보였다.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음에도 사랑을 고백한 나를 경멸하는 내 자신이 보였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오늘의 첫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는 나를 그녀 곁으로 몰아갔다. 그녀는 내 자아와 영혼이 사랑한 마지막 여자였다. 내 자아와 영혼이라는 말, 내 육신에 존재하는 두 개의 본질을 거론해야 하는 이유는, 나는 그녀의 육체를 탐한 것도, 함께 있는 걸 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만드는 추억도, 키스도, 섹스도, 그 외에 인간 ― 내 자아와 영혼 ― 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상상하지 않았다. 단지 내 마음이 그녀를 향해 흐른 것뿐이다. 사랑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극적이지도 않다. 사랑은 일상의 한순간에 나도 모르게 싹튼다. 싹이 튼 뒤에는 몸부림치며 밀어내도, 원치 않아도, 철벽으로 울타리를 쳐도, 사랑의 떡잎은 쑥쑥 자라서 가지를 뻗고 씨방이 자라나 사랑의 열매가 터진다. 그다음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거대해지는 사랑의 숲에 파묻혀 고통에 시달리는 것뿐이다. 사랑은 그렇게 타인이 내 가슴으로 들어오는 순간 결정된다. 비리고 안타까운 사랑일지라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온다. ---「박정훈 1 」중에서

해안을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조수 웅덩이로 향했다. 숨이 막히게 더운 날도, 뇌우가 치는 새벽에도, 보슬비가 내리는 저녁에도, 하얀 눈이 쏟아지는 한겨울에도 나는 조수 웅덩이에서 살았다.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생명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물고기뿐만 아니라 문어, 거북, 새우, 말미잘, 성게, 게, 해초, 해조, 고둥, 소라도 있다. 썰물 때가 되면 조수 웅덩이에 있던 온갖 생명은 바다로 돌아가고, 밀물 때가 되면 낯선 생명들이 조수 웅덩이로 들어온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온 이름 모를 물고기, 거북, 문어에게 까마득한 거리에 있다는 바다 이야기를 들으며 미지의 세상을 여행했다. 보석이 깔린 초호, 작살을 쥐고 산호 사이의 물고기를 사냥하는 검은 인간, 바닷속에 있다는, 뜨거운 물방울을 내뿜는 굴뚝, 수백 척의 어선으로 뒤덮인 연둣빛의 해수면, 하늘로 이어지는 물길, 수중 동굴에서 자라는 보랏빛 나무, 섬보다 큰 물고기들의 여정에 동행하는 외로운 거북, 형형색색의 빛을 내뿜는 심해어의 낙원, 심해에 있는 성채, 인어의 동상, 가라앉은 범선 그리고 심해에 사는 사람들…… 신비한 이야기들…… 단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삶이지만 온갖 생명은 파도가 들어오고 나가는 그 좁은 조수 웅덩이에서 두려움 없이 둥지를 튼다. 파도가 곧 자신들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낼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좁지만 삶의 윤회와 자유가 존재하는 곳으로……. ---「김미영 1 」중에서


넝쿨장미에 휘감겨 있는 담장 너머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쓰레기차가 쓰레기를 수거하는 소리, 주택단지를 깨우는 소리, 매일 이 시간이면 들리는 소리, 나를 집 밖으로 몰아내는 소리, 출근시간을 알려주는 알람.
나는 상념을 접고 출근에 앞서 하루를 여는 의식이 되어버린, 실루엣으로 보이는 빌딩 중에서도 몹시도 반짝이는 단 하나의 불빛에 시선을 보낸다. 1년 365일, 새벽에 깨어나 창을 열면 항상 불이 켜져 있는 창문. 새벽에 뿌리박고 사는 별 같은 그 불빛은 도로 건너편 오피스텔 빌딩이 모여 있는 곳의 15층에 있다. 나는 그 불빛을 바라보며 이른 새벽을 밝힌 그 누군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그 불빛은 나를 애증 어린 삶으로 이끌어주는 등대이기에.
집을 나선 나는 어둠에 잠겨 있는 주택단지의 붉은 담장을 따라 걸어가며, 새벽이 사라지면 훤히 드러날, 곳곳에 널려 있는 자극들, 어떤 설명으로도 부족하고, 어떤 까닭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나와 공존하는 세상, 집 안에 숨어 있어도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곳, 나는 오늘도 그곳, 내 삶의 터전으로 향하며 오늘 하루도 내 밖에서 나를 자극하여 나를 집착으로 몰아가는 그 무엇이 나타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박정훈 2 」중에서


해가 지지 않아서 그런지 퇴근길인데도 외출하는 기분이 들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묘한 느낌의 계절, 밤이 되어도 밤이 찾아오지 않는 계절이 시작되었다.
7월로 접어들었다. 이글거리는 열기는 밤까지 이어졌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나는 소연이와 수다를 떨고, 회식에 참석하고, 문서를 작성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무단결근 이후 나는 더 당당해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씩씩하게 인사하고, 주어진 일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도 깜짝깜짝 놀랐다. 내 몸을 혹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열심히 살고 있다고 믿었다.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그런 일은 전에도 있었다. 집중력이 분산되고 기억력이 떨어지는 느낌도 받았지만 그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증세는 직장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더 무리하면 반드시 몸에 이상이 생긴다.
‘……탈이 난다고 해야 하나? 탈이 생기면 정말 큰일이다.’
7월이 끝나갈 무렵부터 뜻밖의 일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입사 이후 단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은 내가 서류를 분실한 것이다. 아니, 사라졌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박 부장에게 주의를 받은 후부터는 신경이 곤두섰다. ---「김미영 2 」중에서


퇴근 후에 침대에 걸터앉아 무단결근을 생각해보았다. 3일 동안 무단결근을 한 기억은 생생한데 왜 무단결근을 했는지, 그리고 무단결근을 한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예술의 전당에 갔었어. 갓머리를 닮은 웅장한 건물과 공연을 알리는 현수막도 본 것 같아…… 그래,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도 들었어. 그런데…… 내가 왜 회사에 안 가고 그곳에 간 걸까? 3일 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3일 동안 예술의 전당에 앉아 있었을 리가 없어!’
내 마음속의 심연에서 끼이익, 끼이익! 하며 허공에 매달린 무엇인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눈에 익은 하얀 타일과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공간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몸속에서 나타난 무엇인가가 소리와 기억을 이끌고 마음속의 심연으로 사라졌다. ---「김미영 2 」중에서


새벽이 준 오늘의 선물은 뒤엉킨 먹구름이 어둠을 휘감고 있는 풍광이었다. 숨이 막힐 듯한 새벽이다. 금세라도 폭풍우가 집어삼킨 그날의 새벽으로 변할 것 같은 새벽이다. 유령처럼 다가온 그날의 폭풍우는 바다의 모든 것을 믹서에 넣고 예리한 바람의 날로 갈아대듯이 조각내고 사라졌다. 어부의 삶, 어부의 결실, 작은 마을, 가옥, 해안, 숲, 모래언덕…… 그리고 여자아이. 그날 여자아이는 폭풍우의 중심에 갇혀 있었다.
폭풍우가 지나간 뒤에 조수 웅덩이에 있는 생명은 다 사라지고 뿌리가 뽑힌 해조 사이에 숨어 있는 아기 물고기들만이 지느러미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기 물고기들이 겪은 공포가, 여자아이가 겪은 공포가 내 심장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조수 웅덩이에도 새로운 생명이 가득할 거야. 아무리 거센 폭풍우가 쓸고 지나가도 생명은 다시 모여드니까.’
먹구름 사이로 새벽하늘의 푸른 민낯이 드러났다. 이내 모여든 먹구름이 다시 푸른 민낯을 가렸다. 착잡한 내 마음이 깨어났다.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김미영 3 」중에서


나는 바닥을 둘러보았지만 그가 말한 종잇조각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가 팔을 뻗어 카페 안쪽에 있는 빈자리를 가리켰다.
“손에 있는 것도 저한테 주시고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주시겠습니까?”
‘손……?’
그러고 보니 손 안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손을 펼치자 잘게 찢어진 종이 쪼가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주위에 흩어져 있는 종이 쪼가리들이 보이고, 내 머리 위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바닥으로 빛의 조각들이 쏟아져 내린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종잇조각을 뿌려대기라도 한 걸까?’
등골이 오싹했다.
‘아, 어떡해. 나 어떡해.’
환한 광채가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몸이 기울었다.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앞치마를 두른 사내의 모습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손님들의 모습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어깨가 바닥에 닿는 순간 사방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김미영이 다가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김미영 3 」중에서


교통약자석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도 종이를 찢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몸을 움츠리고 종이를 찢고 있는 그녀의 온몸이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흐느낌은 흡사 위로를 갈구하는 몸짓 같았는데, 그 처절한 갈망의 몸짓은 나를 전율케 했다. 그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음에도 위로를 간절히 바라는 자신의 영혼을 힘겹게 감내하고 있었다.
종이를 찢을 때 그녀의 흐느낌은 잦아들었지만 이내 다시 떨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보는 낯선 여자의 몸짓에 이끌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참담한 향기를 맡고 말았다.
그녀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열차가 막 압구정역을 출발할 때였다. 그녀는 열차 안을 넓게 둘러보고는 슬픈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종이를 찢고 열차 안을 둘러보며 또다시 슬픈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사이 그녀의 슬픈 눈은 행복한 눈빛으로, 그녀의 미소는 소리 없는 웃음으로 변해갔다. 다음 순간 그녀는 손에 쥐고 있는 종잇조각을 그녀의 머리 위로, 사방으로 뿌려대기 시작했다. 뒷골을 타고 내려온 찌릿한 전율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온몸에 실을 감은 채 웃고 있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박정훈 4 」중에서

‘……나를 위로해주세요, 나는 위로받고 싶어요.’
유리처럼 매끈한 해수면에서 일어난, 울컥거리는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밀려오기 시작했다. 위태로워 보였다. 곧 먹구름이 폭풍우로 변해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어서 도망가요, 폭풍우가 밀려오고 있어요!’
‘괜찮아요, 바다가 나를 보호해줄 거예요. 바다는 나를 사랑하니까…….’
‘폭풍우에 휘말리면 소용없어요!’
‘바다는 나를 사랑해요.’
‘아가씨!’
‘바다는 나를 사랑해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그녀의 눈꼬리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박정훈 4 」중에서


나는 그녀가 바위틈에 숨어서 폭풍우가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 나는 그 믿음으로 숨을 쉰다.
그러나 그런 가식적인 믿음으로 내 마음의 불안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급기야 내 불안은 폭풍우에 갈기갈기 찢긴 그녀의 육신이 해안가에 흩어져 있는 환영으로 화하고, 내 마음은 또다시 나를 비굴한 도피자로 몰아갔다. 내 목구멍은 뇌우에 노출된 갈대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미칠 것 같았다. 그녀를 찾아, 춤을 추자고 손을 내민 그녀의 손을 맞잡고 함께 춤추며 그녀의 영혼을 위로해야 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있는 폭풍우를 잠재워야 했다. 그것 말고는 딴 방법이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지하로 달려갔다. 나는 미친 듯이, 광기에 갇힌 사람처럼 열차를 오가며 그녀를 찾았다. 나는 교통약자석과 승객을 비집고 다니며 배추흰나비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고 내 육신도 그녀의 육신처럼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은 공포가 밀려들었다. 잊어야 했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 그녀의 눈동자를 지워야 했다. 그녀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었다. ---「박정훈 4 」중에서


3일 동안의 행적, 무단결근을 한 이유……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모든 건 의문투성이고 남는 것은 절망뿐이었다. 이런 삶을 원치는 않았지만, 이제 내 일상은 평범하지 않은 삶이 되어버렸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바다로 돌아갈까?’
바다가 보였다. 해안가에 서서 유리처럼 매끈한 밤바다의 물결을 따라 흐르는 별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아이도 보였다. 기억 속의 그날처럼 여자아이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파도가 쓸리는 소리, 자갈이 달그락거리며 구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밤바다를 아름답게 하는 소리, 생명의 소리, 자유를 부르는 소리, 여자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소리였다. 나를 기쁘게 하는 떨림이었다. 나는 그 소리가 너무 좋아서 밤이 내리면 맨발로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태양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뜨거운 모래에 앉아서 어둠 속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별을 헤아렸다. 어느 날엔가는 수평선으로 해가 솟아오를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바다, 내 마음의 안식처…….’
마침내 내 귓전에도 파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파도 소리가 아니었다. 열차에서 들은 소리였다.
‘미쳤나 봐!’ ---「김미영 4 」중에서


‘내가 이곳에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나는 망설였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내 삶을 정신과 의사 외에는 그 누구도 설명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의사가 물어보면?’
무단결근을 했는데 무단결근을 한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내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 내 휴지통에 종잇조각을 버린다고 해야 하나, 무단결근을 한 3일 동안의 행적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낯익은 하얀 타일과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공간이 떠오르면 누군가 기억을 차단하고 나선다고 해야 하나, 하루 종일 휴지통을 지키고 앉아 있었는데도 종잇조각이 나타난다고 해야 하나, 누군가 내 숄더백에 종잇조각을 넣는다고 해야 하나, 세상 사람이 나만 바라본다고 해야 하나, 나는 안 그런데 고개를 숙이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내가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 같다고, 그것 말고 또 있을까?
‘……있을 거야.’
하지만 그 많은 일을 다 기억한다면 머리가 터지겠지. 그래서 사라지는 거야. 저절로 사라지는 거야. 어쩌면 스스로 없애 버리는 건지도 몰라.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오묘한 거야.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잊어버리고, 착각하며 사는 거야.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사는 거야. ---「김미영 4 」중에서


내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꿈인가 싶었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꿈.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위로하는 그녀의 마음이 내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쪼그라들어 할딱이는 내 가슴은 사랑으로 부풀어 오르고 내 모든 상처와 슬픔과 집착은 한꺼번에 사라졌다. 나는 눈을 뜨고 그녀의 손을 맞잡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은행나무 밑에 서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 순간 내 손을 맞잡고 있는 그녀는 일순간에 열기가 되어 사라졌다. 나를 안아준 그녀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만든, 그녀의 형상을 한 나였다. 나는 처절한 슬픔에 잠긴 채 인도를 따라 걸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를 향한 내 집착의 골은 그녀의 형상을 한 또 하나의 나를 만들 만큼 깊어졌다. ---「박정훈 5 」중에서


휘황찬란한 도시의 야경이, 용암처럼 흐르는 자동차들의 풍경이 각막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로 보였다. 도심에서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는 젖어 있었다. 어디선가 커엉! 커엉! 하는, 거대한 물고기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암초의 냄새, 심해의 냄새도 날아왔다. 나는 눈물을 훔치고 소리를 쫓았다. 대기에서 나타난 거대한 물고기들이 정류장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등에 태우고 빌딩 사이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고 있었다.
내 시선은 물고기의 행렬을 쫓았다. 물고기의 넓은 등과 넓은 등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느러미와 꼬리는 햇살을 받아 매끈하게 빛나고 있었다. 행렬 뒤로 멀리 물빛이 반짝이는 바다가 보였다. 해수면을 뚫고 솟아오른 바위는 언제나처럼 돌올했다. 심술궂은 파도는 오늘도 활처럼 휜 해안선을 부드럽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곶은 유리 같은 해수면 아래에 잠기어 있었다. 해안가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이 나를 향해 몸을 흔들어댔다.
‘미영아, 우리도 친구들 곁으로 돌아가자. 그곳에서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춤추며 살자. 친구들이 우리의 관객이 되어줄 거야!’
내 마음속의 심연에 살고 있는 미영이가 나를 바다로 이끌었다.
‘그래, 처음부터 도시는 우리가 머물 곳이 아니었어. 그동안 너도 많이 힘들었지.’
어두운 대기에서 불어온 묵직하고 유연한 바람이 물결이 되어 나를 바닷속으로 이끌었다. 바닷속에는 해수면을 뚫고 내려온 햇살이 수면 아래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바닷속 한켠에, 울창한 해조의 숲에 펼쳐져 있는 나만의 아지트가 보였다. 외로움의 뿌리가 자란 곳, 고독을 잉태한 곳……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쌍쌍이 짝을 짓고 있는 온갖 생명들 사이로 여자아이가 보였다. 여자아이는 혼자였다. 나는 항상 혼자였다. ---「김미영 5 」중에서


내 그림자를 소멸하고 사라진 태양을 찾고 있는 지금의 내 일상은, 그녀가 내 그림자를 밟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내 삶은, 그녀를 향한 애증의 늪이다. 십여 년 전, 대책 없는 사랑에 빠져든 그 순간에도, 사랑의 열매가 터지고 집착의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사랑에 빠져 있다. 죽지 않을 만큼만 숨통을 열어놓는 사랑, 간절히 원하면 죽음조차도 잊게 하는 사랑. 사랑은 고통과 희망을 섞어 완전한 사랑을 행할 것 같은 오만을 마음에 심는다. 모든 것을 다 잊고 사랑을 향해 치닫게 한다. 인간의 심성에 판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사랑은 슬픔이라는 놈의 배만 불린다.
그러나 사랑은 내 삶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막아주는 보호막과 같아서 나를 절망과 격리하고 행복 속을 비행하게 하며 끝내는 오묘한 떨림으로 승화한다. 그 순간이 오면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 뒤에 펼쳐진 놀라운 세상 ― 도대체 어떤 쓸데없는 인간이 사랑의 광희를 겨우 사랑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던가 ― 을 만난다. 나는 매일 그녀와 함께 그런 세상, 사랑 뒤에 있는 세상을 여행한다. 전생, 현생, 내생을 윤회하는 그런 이별의 고통이 없는 완벽한 낙원을……. ---「박정훈 6 」중에서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할 말이 있는 듯이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열리지 않고, 새까만 눈동자 속에 있는 희망의 잔광이 깜박거리다 이윽고 꺼졌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의 심해로 이어진 끝없는 길을 따라 유영하는 한 마리의 인어를 보았다. 인어가 심해로 사라진 순간 그녀의 눈꺼풀이 카메라 셔터처럼 닫히며 그녀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차가운 타일 위로. ---「박정훈 6 」중에서

오피스텔을 나섰다. 골목은 온통 푸른빛에 잠겨 있었다. 내 마음도 날아갈 듯이 기쁘기에 상쾌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새벽에 출근할 직장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다. 직장을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랄까.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은 거저 얻은 게 아니다. 처절한 몸부림의 대가로 얻었다. 지금 몸담고 있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나는 125장의 이력서와 125장의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나는 자기소개서의 지면 위에 김미영의 숨기고 싶은 비밀을 모두 적어 125명의 인사 담당자에게 보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엄마의 기억과 아빠의 슬픈 눈동자, 냉소적인 할머니, 하나뿐인 남동생, 설명으로 풀어갈 수 없는, 심해에 사는 그 누군가를 향한 사랑, 바닷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 소중하고 귀한 내 흔적의 조각들은 자기소개서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타인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날아갔다. 내가 보낸 125명의 김미영은 아직도 고물상 구석에 처박혀 있는 컴퓨터의 하드에 갇혀 있거나, 제지회사의 야적장에서 재생용지로 다시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합격 소식을 기다리고 ― 정말 지루하고 허기지는 시간이었다 ― 면접을 보는 기적 같은 순간을 상상하는 동안 나는 모든 것에서 소외된 채 울리지 않는 스마트폰을 바라보아야 했다. 스스로의 위안이 희망이 되고, 죽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유혹하고 있을 때 스마트폰의 벨 소리가 나를 새벽으로 이끌었다.
출근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도시에도 바다가 있다는 걸 몰랐다. 바다를 품은 새벽이 있다는 걸 몰랐다. 여자아이로 살았던 시절 푸르스름한 빛에 잠긴 새벽 바다를 걷고, 부산과 부산 근교 그리고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새벽에 파묻혀 살았지만 바닷가에 살 때 나는 새벽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 아이였고,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새벽을 돌아볼 여유도 없는 급박한 삶을 살았다.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로 올라와서 힘겹게 직장을 구하고 안정을 찾고 나서야 나는 바다를 닮은 도시의 새벽에 마음을 빼앗겼다. 새벽은 내 마음의 바다다.
---「김미영 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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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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