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볼 때마다 산월은 서글픈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산월을 닮고도 닮지 않았다. 산월은 그녀의 흰 피부가 돋보이도록 화려한 비단옷을 지어 입히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어울리는 새뜻한 반지를 끼워주고, 안방의 시렁 위에 그녀가 좋아하는 군입질거리를 항시 마련해 두었다. 어린 그녀는 비단옷과 반지와 달콤한 과자를 무람없이 즐겼다. 누군가 자기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은 걸 보면 강샘을 부리기도 했다. 앙탈쟁이에 애교꾸러기인 그 계집애는 교방에 들어가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산월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학교에 넣어달라, 바느질을 배우기 싫다고 우겨대는 그녀는 산월이 모르는, 감히 기대하거나 예상치 못했던 존재였다. 그녀는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다르다는 것 자체가 불길했다.
---「어머니의 환영」 중에서
‘명예심’이라는 강박적인 감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진명학교에서 동무들의 시새움을 무릅쓰고 공부에 매달리는 동안 그녀는 점차 공부의 재미에 눈을 떴다. 배울수록 세상은 넓어지고 생각은 깊어졌다.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지식에 대한 목마름은 커졌다. 차라리 무지하고 무식한 채로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갈증을 멈추는 유일한 방도일 테다. 그러나 앎에 대한 갈증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지성과 이성의 힘으로 야만과 미신을 넘어서겠다는 근대인다운 포부의 발현이었다. 아이답지 않게 무수한 근심과 자잘한 감정에 시달렸던 그녀이지만 정신을 집중해 공부할 때만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토록 그녀를 괴롭히던 남들의 시선과 수군거림도 오롯이 책과 마주한 순간에만은 티끌처럼 하찮게 느껴졌다.
---「기도, 꿈, 탄식」 중에서
온 세상이 여학생의 ‘숨겨진 발자취’를 알게 된 마당에 리응준은 기정을 좋아한 적도 없고 결혼을 청한 일도 없다고 하였다. 외설스런 상상과 잔인한 소문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여학생은 자유연애를 하다가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자 사랑의 도피 행각을 했지만, 정작 가족들에게서 허락을 받자마자 연인에게 배반당했다. 은적, 그 발자취가 숨겨진 엿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사람들의 야릇하고 짓궂은 호기심이 집중되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여학생은 몸을 더럽히고, 버림받은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일뿐더러 어림짐작과 편견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버젓이 신문 기사가 되어 3회 연속 게재되었다. 누군가에겐 흥미로웠을 것이다. 누군가는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 흥미와 재미가 누군가를 영원한 고통의 굴길로 등 떠밀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거나 모르는 척 무시한 채.
---「은적(隱跡), 숨겨진 발자취」 중에서
‘조선 최초의 여성 작가’라는 이름보다, 명예와 환호보다 그녀를 문학으로 이끈 것은 따로 있었다. 위험과 논란 속에서도 그녀는 이야기하고 싶었다.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감정들과 머릿속에서 도깨비불처럼 떠다니는 생각들을 바깥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가슴이든 머리든 터져버릴 것 같았다. 고통, 슬픔, 복수심, 분노, 절망, 고뇌 그리고 외로움…….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환희, 열정, 그리움, 기다림, 희망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순정한 찬탄…….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았다.
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죽지 않기 위해 문학을 부둥켜잡았다. 미치지 않기 위해 창작에 몰두했다. 그중에서도 소설은 울부짖고 싶지만 눈물은 들키기 싫은 마음에 꼭 들어맞는 장르였다. 그녀는 소설의 주인공들 뒤에 숨어 자기를 감췄다.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했다. 소설로 하는 숨바꼭질은 박진감 넘치지만 안전했다. 원고지 칸칸이 자기를 채우며 그녀는 서서히 치유되었다.
---「의심의 소녀」 중에서
권주영은 ‘외부적 혁명가’다. 주영은 다른 나라 사람들, 일본인들에게 학대받고 원수를 갚기로 결심한다. 반면 김탄실은 ‘내부적 혁명가’다. 탄실은 이민족이 아닌 동족, 친일파들에게 학대받는다. 그녀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녀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이지만 탄실이라는 여성은 그 식민지 남성의 또다른 식민지였다. 그래서 그녀의 싸움은 바깥을 향할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칼을 꽂는 폭압에 맞서 내부의 적들과 쟁투해야 했다.
외톨이였기에, 아웃사이더였기에,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조선 문단의 호평과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등의 배후로서』의 결점과 한계를 명확히 파악했다. 그녀와 관련된 더러운 소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남자가 쓴 여자에 대한 소설이었다. 제국의 작가가 쓴 식민지의 이야기였다. 고양이가 쥐들의 미담을 말하고, 뱀이 개구리의 울음을 흉내 내는 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등 뒤로」 중에서
흥미와 재미가 누군가를 영원한 고통의 굴길로 등 떠밀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거나 모르는 척 무시한 채.
---「은적(隱迹), 숨겨진 발자취」 중에서
‘조선 최초의 여성 작가’라는 이름보다, 명예와 환호보다 그녀를 문학으로 이끈 것은 따로 있었다. 위험과 논란 속에서도 그녀는 이야기하고 싶었다.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감정들과 머릿속에서 도깨비불처럼 떠다니는 생각들을 바깥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가슴이든 머리든 터져버릴 것 같았다. 고통, 슬픔, 복수심, 분노, 절망, 고뇌 그리고 외로움…….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환희, 열정, 그리움, 기다림, 희망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순정한 찬탄…….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았다.
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죽지 않기 위해 문학을 부둥켜잡았다. 미치지 않기 위해 창작에 몰두했다. 그중에서도 소설은 울부짖고 싶지만 눈물은 들키기 싫은 마음에 꼭 들어맞는 장르였다. 그녀는 소설의 주인공들 뒤에 숨어 자기를 감췄다.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했다. 소설로 하는 숨바꼭질은 박진감 넘치지만 안전했다. 원고지 칸칸이 자기를 채우며 그녀는 서서히 치유되었다.
---「의심의 소녀」 중에서
권주영은 ‘외부적 혁명가’다. 주영은 다른 나라 사람들, 일본인들에게 학대받고 원수를 갚기로 결심한다. 반면 김탄실은 ‘내부적 혁명가’다. 탄실은 이민족이 아닌 동족, 친일파들에게 학대받는다. 그녀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녀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이지만 탄실이라는 여성은 그 식민지 남성의 또다른 식민지였다. 그래서 그녀의 싸움은 바깥을 향할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칼을 꽂는 폭압에 맞서 내부의 적들과 쟁투해야 했다.
외톨이였기에, 아웃사이더였기에,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조선 문단의 호평과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등의 배후로서』의 결점과 한계를 명확히 파악했다. 그녀와 관련된 더러운 소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남자가 쓴 여자에 대한 소설이었다. 제국의 작가가 쓴 식민지의 이야기였다. 고양이가 쥐들의 미담을 말하고, 뱀이 개구리의 울음을 흉내 내는 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등 뒤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