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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을 추억하다

최치원을 추억하다

: 고현내 사람들과 최치원 영정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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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8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98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91156053521
ISBN10 115605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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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손상국
연세대를 졸업하고, 교육방송과 JTV에서 PD로 일했다. 전라북도의 역사문화를 다룬 ‘전북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을 수년 간 연출했다. 2014년에는 독회를 만들어, 최남선이 1925년 호남 일대를 여행하면서 시대일보에 연재 했던 우리 국토에 대한 예찬의 글『심춘순례』를 쉽게 풀어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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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이 포근하게 감싸 안고, 맑은 강물은 사시사철 흐른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멀찌감치 휘돌아 그 사이에 좁지 않은 들판을 앉혀 놓았다. 동진강 상류에 위치한 아름다운 농촌마을 칠보. 일곱 가지 보물이란 이름만큼 살기 좋은 곳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태산군이었다. 고려 때에도 태산현 또는 태산군으로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이름은 태인현이다. 1409년(태종 9)에 행정구역을 다시 짜면서 태산현 바로 옆에 있는 인의현과 통합해, 두 현의 앞 글자를 한 자씩 따서 태인현이라 했다. 행정 치소 또한 두 현의 중간 지역에 새로 설치했다.
현의 치소가 태인으로 옮겨가자 태산현은 폐현이 되었다. 그러자 이곳을 부르는 명칭이 바뀌었다. 태산이란 이름 대신 고현내 혹은 고현동이라 했다. 옛 현이 있던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으로 칠보면이 되었다. 칠보라는 이름은 이 마을 남쪽에 솟아 있는 칠보산에서 따왔다.
이 마을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관청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별 특이한 점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사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조선시대 최초로 향약을 만들어 시행했다. 1475년(성종 6)의 일이다. 이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중국의 여씨향약을 본받아 만든 향약보다 80여 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향약은 선을 장려하고 악을 물리치며, 이웃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서로 돕는 것을 목표로 하는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이다.
이곳은 가사문학이 처음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불우헌 정극인이 조선 성종 때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을 노래한 최초의 가사작품 〈상춘곡〉을 여기에서 지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의 선비들이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을 지켜냈다. 손홍록과 안의라는 선비는 가솔 30여 명을 이끌고 가서, 전주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의 태조어진을 내장산 깊은 산속 용굴암으로 옮겨 안전하게 보관했다. 왜군들이 북진하면서 실록이 보관되어 있던 4대사고 중 서울의 춘추관과 충주사고, 성주사고를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태조로부터 명종에 이르기까지 175년간의 조선왕조실록은 만나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출판의 역사에서도 이곳의 역할은 중요했다. 판매용 도서인 방각본을 본격적으로 간행하기 시작한 곳이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책은 서울과 전주에서 먼저 나왔지만, 18세기 중반 이곳에서 판매용 책을 펴내면서 우리나라 출판문화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구한말 의병사에서도 이곳을 빼놓을 수 없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지역의 유생들과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병오년에 의병했다 하여 병오창의라 부르는 이 운동은 규모가 8백 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다. 병오창의가 도화선이 되어 의병투쟁은 전국으로 번졌고, 특히 호남지방에서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의병투쟁이 격화되자 일본군은 1909년 9월부터 2개월에 걸쳐 보병 2천 명과 함정 4척, 헌병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야 했다.
---「고현내」중에서

이렇게 대단한 일들이 칠보면 중에서도 무성리와 시산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곳은 칠보면사무소와 접해 있는 곳이다. 면 소재지를 지나 칠보천을 건너면 바로 무성리이다.
무성리에 접어들면 오른쪽으로 야트막한 야산이 하나 보인다. 칠보산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해발 백여 미터에 불과한 작은 산이다. 이 산을 이곳 주민들은 성황산이라고 부른다. 성황산은 성황신의 신당이 있는 산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기에 아직까지 전국에는 성황산으로 부르는 산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성황신은 산천을 수호하는 신으로 이 신앙은 본래 중국의 민속신앙이었다. 성황신앙이 언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도처에서 성황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세력이 커진 지방의 호족들은 자기 가문의 유력한 인물을 내세워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으로 받들기 시작했고,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매년 성황제를 성대하게 치렀다.
그러다가 성황제가 관에서 지내는 제사로 정착되기에 이르는데, 이는 지방 장악력이 약했던 고려 조정이 호족들을 포용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성황신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은 군현의 치소가 있는 진산에 성황사를 건립하고,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제도화했다.
성황신을 모시는 이러한 관습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이곳 태산현은 조선시대에 폐현이 되었기 때문에 성황사도 새로운 관청이 들어선 태인으로 옮겨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황산이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이곳이 고려시대 현의 치소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옛날 여기에 모셨던 성황신은 누구였을까.
고려시대 이곳에서 성황신으로 모신 인물이 누구였는지 전해 오는 이야기나 이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통일신라 말기 태산군 태수로 왔던 최치원이 선정을 베풀다가 다른 곳으로 이임하게 되자, 그를 못 잊은 주민들이 성황산 중턱에 생사당을 지어 그를 추모해 왔다고 전해온다.
생사당이라는 말은 오늘날 몹시 생소하게 들린다. 돌아가신 분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는 것이 사당인데, 생사당이라면 살아생전에 사당을 지었다는 뜻일까.
이 고장에서 생사당을 세워준 이가 한 사람 더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시서화 삼절로 불렸던 신잠이다.
신잠은 1543년(중종 38)에 태인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현감으로 있으면서 동서남북에 4개의 학당을 세워, 이 고장에 유학을 널리 보급했다. 뿐만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데 온갖 정성을 다해 모든 백성이 그를 믿고 따랐다. 신잠이 태인현을 다스린 지 6년 만에 임기가 차서 간성군수로 떠나게 되었을 때, 이 고을 백성들은 그를 위해 선정비를 세우고, 태인의 성황산에 생사당을 지었다.
사당 안에는 왕과 왕비 · 세자의 전패와 더불어 신잠과 신잠 부인 · 시동 · 시녀 · 호랑이의 상을 봉안했다. 이 고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태평을 빌었다. 특히 이방이 나라의 세금을 서울로 운반할 때에는 반드시 이곳 생사당에서 바다의 풍랑이나 육지의 도적과 같은 불상사가 없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이 향사가 계속 이어지며 신잠은 태인을 수호하는 성황신이 되었다. 그를 모신 생사당의 명칭도 성황사로 바뀌었다.
신잠의 사례에서 보듯 우리 조상들은 선정을 베풀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목민관이 있을 경우 선정비를 세우고, 생사당을 지어 그 사람을 기렸다. 생사당은 요즘으로 치면 그 사람의 기념관이다. 생사당이 그 사람 사후에도 향사를 계속하는 사당으로 남거나, 신잠의 경우처럼 성황사에 모셔지기도 했다.
그럼 최치원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그를 위해 세워준 생사당은 그의 사후 어떻게 되었을까.
최치원의 생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월연대는 성황산 중턱에 있다. 그의 생사당이 성황산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은 이 사당이 성황사였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처음에는 생사당으로 건립되었지만 성황신을 모시는 제도가 생기면서 성황사로 전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잠의 생사당이 태인의 성황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최치원의 전례가 있었기에 이를 따랐을 것이다.
이처럼 생사당을 지어 추모해오다 성황신으로 모셔졌으리라 추정되는 최치원. 그는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성황산」중에서

최치원은 신라의 대문장가이자 학자로 자를 고운또는 해운이라 했다.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이 857년(헌안왕 1)에 경주에서 출생했다고 적혀 있다. 그의 가문은 진골 바로 아래 신분인 육두품이었다.
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신라사회에서 관리로 출세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이국 땅 멀리 떠나는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최치원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했다.
“앞으로 10년 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써라.”
아버지의 훈계를 가슴 깊이 새긴 최치원은 남이 백을 할 때 자신은 천을 하는 노력 끝에 당나라에 온 지 6년 만에 진사시험에 합격한다.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당나라의 진사시는 3년에 한 번 치르는 식년시가 원칙으로 선발 인원은 30명에 불과했다.
당시 당나라는 대외적으로 개방정책을 펴서 신라와 발해를 비롯해 멀리 사라센제국과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인재들을 받아들였다. 외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당나라의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에 입학해 공부했다. 여기에서 일정 기간 수업을 받으면 중국인과 동등하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이러한 자격을 획득한 외국 유학생을 일러 빈공이라 했다.
최치원은 바로 이 빈공 자격으로 진사시에 응시해 단번에 합격하게 된다.
당나라의 과거에 합격하면 외국인이라도 당의 관리로 임용될 수 있었다. 최치원은 20세에 남경 근처에 있는 율수현위로 임명되어 당나라의 관리생활을 시작했다. 관리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글도 짓고, 이 고장의 명사들과 교류했다.
1년간 말단 관리로 근무한 최치원은 관직을 사임하고 대과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장안 근처의 종남산에 들어갔다. 그런데 당나라 전역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대과가 그만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그는 양주에 있는 회남절도사 고변의 막부에서 다시 관리생활을 해야 했다.
당나라 정국은 날이 갈수록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대규모 농민군을 결집한 반란군 지도자 황소는 황제를 자칭하며 장안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당나라 황제 희종은 서촉 지역으로 피난을 떠났고, 회남절도사 고변을 병마도통에 임명했다. 병마도통은 병권을 손에 쥐고, 반란군을 진압하는 총사령관이다. 이렇게 막강한 자리에 오른 고변은 조정에 표문을 올리고, 자신을 대신해 백성들을 안심시키면서 적의 사기를 꺾는 글을 작성하는 문사가 필요했다.
그 적임자로 최치원이 선택되었다. 최치원은 문장력으로 이미 문인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높은 신망을 받고 있었다. 고변은 최치원을 도통순관에 임명했다. 도통순관은 도통을 보좌하는 최측근으로 종6품에 해당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881년 7월, 최치원은 후세에 길이 남을 명문장을 작성했다. 그 글은 황소의 투항을 권유하는 격문 〈격황소서〉이다.
황소가 이 글을 읽다가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질만큼 〈격황소서〉는 당시 파란을 일으켰다. 이 글로 인해 최치원의 명성은 당나라 전역에 울려 퍼졌다.
최치원은 고변 막부에 있으면서 자신이 썼던 만여 편의 글 중에서 정화만을 골라 《계원필경집》을 엮었다. 전쟁터의 막사에 거주하며 문장가들이 모인 계원에서 글 쓰는 일로 먹고 살았다고 하여 책의 이름을 《계원필경집》이라 했다.
한편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의 귀국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최치원의 귀국을 종용하기 위해 신라에서 사신이 왔다. 사촌 동생 최서원도 함께 와서 집안 소식을 전했다. 최치원은 그 동안 잊고 지냈던 고향의 부모님 생각에 신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지만 신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고심을 거듭한 최치원은 결국 신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도교에 빠진 고변이 병마도통에서 해임되어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당나라 황제에게 사직원을 올렸다. 당나라 희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고, 황제의 사신자격으로 신라에 귀국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885년 3월, 최치원은 드디어 신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29세 때로 신라를 떠난 지 16년 만이었다.
최치원이 귀국하자 헌강왕은 그에게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 직을 제수했다. 외교문서와 왕의 조서를 작성하고, 왕명을 받아 글을 짓는 일과 군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공부하며 배운 지식과 관리생활을 하며 겪은 견문을 바탕으로 신라에서 자신의 포부를 펴고자 했다. 헌강왕은 이런 그를 높이 평가하여 중용했지만 그가 귀국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헌강왕이 세상을 떠나자 최치원이 하고자 하는 일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번번이 좌절되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왕명을 받아 글을 짓는 일이 전부였다.
중앙에서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없다고 생각한 최치원은 외직을 자청했다. 조정에서는 사사건건 귀족들이 반대해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지만, 지방관으로 나가면 자신의 뜻대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첫 외직으로 서울인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태산에까지 오게 되었다.
---「고운 최치원」중에서

옥구에는 최치원을 배향한 서원과 사당이 유난히 많다. 이는 최치원이 이곳 출생이라는 이 지역 사람들의 믿음과 관련이 깊다.
특이한 것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되었던 삼현사를 1900년에 단을 쌓고 위패를 봉안했다는 점이다. 이때는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지만 엄연히 고종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훼철된 사당의 복설은 생각하기 힘든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는 염의서원을 다시 세웠고, 1929년에 옥구향교 바로 옆에 옥산원을 창건했다.
세 곳 모두 최치원을 주벽으로 향사하는 곳이다. 이처럼 국난의 시대에 최치원의 사당을 세운 것은 옥구에서 최치원은 이곳 사람들의 힘을 한 곳으로 모으는 옥구의 영원한 레전드이자 꿈과 희망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1969년에는 문창서원을 건립했다. 이 서원은 옥구에서 출생한 최치원의 단독 사당이 없는 것을 수치로 여긴 이 고장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창건했다. 서원 안에는 최치원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서원 앞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쓴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런데 옥구사람들은 왜 최치원이 이곳 출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믿음의 중심에 이곳에 전해 오는 최치원의 탄생설화와 최치원이 어릴 때 책을 읽던 유적 자천대가 있다.
최치원의 탄생설화는 옥구 앞바다에 있는 선유도와 내초도에 전해온다.
이러한 설화가 내려오는 내초도에는 최치원이 태어났다는 금돈시굴이 있었다. 금돈시굴은 금돼지가 시작된 굴이라는 뜻이다.
설화는 신이한 이야기를 빌어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금돼지로 비유된 최치원의 어머니는 아마도 이 지역 옥구 출신의 여성이 아닌가싶다. 그것도 그냥 돼지가 아니라 금돼지이기에 호족의 딸일 가능성이 크다.
자천대에 얽힌 이야기도 금돈시굴의 설화와 일맥상통한다.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성종 12)에 관에서 편찬한 지리지이다. 여기에 자천대에 서려있는 최치원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고장에 전해 내려오는 최치원 설화는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천대는 풍광이 수려하기도 했지만 예로부터 최치원을 그리워하는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들이 왔을 때 쉴 수 있는 그늘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자천대 바위 위에 정자를 건립했다. 그리고 이 정자의 이름을 바위의 이름과 같이 자천대라 했다.
이 정자는 현재 옥구향교 안에 있다. 자천대에 군사비행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중국 본토 공격을 위한 전초기지로 자천대가 있는 선연리 일대 바닷가를 군사기지로 강제 수용해 일본 육군의 전투기비행장을 건설했다. 아름다운 자천대 바위는 깨어져 비행기 활주로가 되었다. 그 옆에 서 있던 정자는 어쩔 수 없이 옥구향교 안으로 이전했고, 지금까지 자천대란 현판을 쓸쓸히 달고 서 있다.
---「유별난 최치원 사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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