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껌 인생
컨텐츠팀 최지혜(sabeenut@yes24.com)
2010-06-02
돌아보면 늘 무거웠다. 한 순간도 가벼웠던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의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이 시들한 삶을 끌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누군가가 정말 좋았다거나 어떤 일이 정말 재미있었을 때에는 의미를 찾지 않았던 것 같다. 왜 좋은지, 왜 재미있는지 굳이 찾지 않아도 그는 그냥 좋았고, 그것은 그냥 재미있었기에. 갑자기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러니까, 나에게는 이상 신호에 다름 아닌 것이다. 퇴색된 감정을, 지겨워진 일상을 좋다, 아름답다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그럴듯한 의미 말이다.
인생이란 두꺼운 풍선껌을 씹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처음은 말랑하고 달콤하다. 하지만 꿈, 환상, 기대라는 단물이 다 빠져버린 후의 그것은 텁텁하기만 하다. 그래서 어른들의 삶은 결국, 단물 빠진 껌처럼 답답해진다. 뱉기도 씹기도 어정쩡한 그 느낌. 그 권태로운 텁텁함을 참아내는 일이 삶이 아닐까. 간간이 만들어내는 몇개의 풍선들은 순간이지만 권태로움을 잊게 한다. 어떨 땐 한 입에 쏙 들어갈만큼의 작은 풍선이, 또 어떨 땐 얼굴을 덮어버릴 만큼의 거대한 풍선이 만들어진다.
나에겐 여행이 그 풍선과 같다. 터질 것을 전제로 하고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여행은 늘 마지막을 전제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유한할 때, 그 모든 것은 엄청난 의미를 띄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 유한한 시간 속의 나는, 맹물같은 일상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여러 개의 의미를 발견한다. '의미 부여형 인간'은 허공에 떠도는 많고 많은 의미 속에서 행복해지기 쉽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참으로 좋아한다.
사람을 만나도, 책을 읽어도, 사진집을 넘겨봐도, 술을 마셔도,
영화를 봐도, 음악을 들어도, 빌딩을 올려다봐도, 이벤트에 가봐도,
억울할 정도로 세상은 '대단한 사람' '대단한 작품'으로 넘쳐난다.
'엄청난' 감동으로 마음이 떨릴 때
나는 98%의 감동을 느낀 후, 2%의 침을 뱉는다.
'나도 절대 질 수 없다.'
그 침 속에 내일의 내가 있다.
넘쳐나는 여행 에세이 속에서 이 책을 잡아 든 것은, 이 문장 때문이었다. 나와 비슷한 종류의 인간임을 그 순간 알아버렸다고 해야 하나. 모든 일에 씩씩대며 반응하고 넘치는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 그 욕심에 마저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어떻게 2년 동안이나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명문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해 중퇴하고, 아메리칸 바와 출판사를 직접 운영하다가 혼자서 일본열도를 떠돌며 콘서트를 열어 노래하던 그는 26세에 한 여자와 결혼해 2년간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다. 이 책은 아내와 함께 한 2년 동안의 여행 중에 끄적인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괴짜 시인이자 록 가수이며 사업가로 활동 중. 욕심쟁이 우후훗! 역시,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구나.
그는 가난한 나라의 넉넉한 미소를 가진 사람들을 보며,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마음 구석구석까지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그냥 바다가 좋아서, 좋아하는 바다가 오염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바다를 지키는 사람들의 단순하기 그지 없는 삶의 방식에서 그는 되려 완벽한 행복을 발견하기도 한다. 여행 중의 그는 담배를 피울 때도 한 개비씩 잎담배를 종이에 말아 꼭꼭 채워 넣고 톡톡 두드려 맛을 보고, 밥을 먹을 때도 한 끼씩 재료를 준비해 온갖 정성을 들여 천천히 만들어 먹는다. 어떤 일의 '프로세스'를 즐기며,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과 그 프로세스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는 '프로세스'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만으로도 삶은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말한다.
2년 동안의 여행이 끝나고, 그들은 현실로 돌아왔다. "여행 중에 매일 썼던 일기도 쓰지 않게 되었고, 항상 손에 들고 있던 메모장도 없다, 생활의 편안함과 어떤 안락함에 사로잡혀 살아있다는 긴장감이 없어져버린 느낌"이라고 그는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에서 자기의 길을 분명히 걸어가기 위해서는 '자기 삶을 위한 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흐르며 살아감을 느낄 수 있도록. 그가 말하는 의식적으로 만들어가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어쩌면 '의미 부여'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적이기 때문인지, 단순히 겁이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껌을 뱉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씹다보면 다시 단물이 나오지 않을까하는 터무니 없는 기대를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풍선을 만드는 일 뿐이다. 빠져버린 단물을 자각하는 순간만큼이나 풍선이 터지는 순간도 힘이 든다. 하지만 터지지 않는 풍선은 씹는 행위만큼이나 권태롭다. 계속되는 여행이 일상에 다름 아니듯.
풍선은 터지고, 다시 씹는다. 오래, 그리고 열심히 씹을 수록 풍선은 더 크고 단단해진다. '이왕 씹을 거 열심히 씹는 게 좋지 않겠어!' 왜 씹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어쩌면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좋다, 아름답다 의미 부여를 시작한다. '견고한 풍선껌의 비상'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씹고, 또 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