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성스러운 아버지의 세계에 생긴 최초의 균열이었고, 나의 어린 시절을 떠받치고 있던 기둥, 누구든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파괴해야 하는 그 기둥에 새겨진 최초의 칼자국이었다. 우리 내면의 본질적인 운명의 끈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경험들로 엮어진다. 마음에 생긴 이러한 생채기와 균열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아물며 잊히지만, 우리 마음속 가장 깊숙한 비밀의 공간에 그것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계속해서 피를 흘리는 것이다.
--- pp.23~24
지금 나는 예전의 낙원과 같은 나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러나 데미안은 절대로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고 어울리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유혹자이며, 두 번째 세계, 곧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악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 자신이 다시금 아벨이 된 지금, 아벨을 희생하여 카인을 찬미하고 싶지는 않았다.
--- p.46
오늘에 이르러서야 나는 깨달았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따르는 것만큼 피하고 싶은 힘든 일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 p.47
하느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고독에 빠뜨림으로써 그를 다시 자기 자신과 대면하도록 이끈다.
--- p.71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 p.83
인간의 과제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지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받아들여 의연하게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유보된 일, 도피의 시도, 대중의 이상 속으로의 퇴보, 적응,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공포였다.
--- p.115
"네, 그렇지만 당신은 당신의 꿈을 찾아야 해요. 그러면 길은 쉬워질 거예요. 그러나 영원히 계속되는 꿈은 없어요. 또 다른 꿈이 따라오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꿈도 붙잡아 두려고 해서는 안 돼요.”
--- p.127
전에는 왜 인간이 어떤 이상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가를 많이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이 이상을 위해서 죽을 수 있음을 보았다.
--- p.144
하지만 보라고, 어린 형제여. 인간은 나이를 먹어. 앳된 얼굴에도 수염이 자라고 주름이 지지. 네가 입은 바지는 닳아서 해지고,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넌 추해져서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 되는 거야. 젊음과 순진함 대신 굶주림만이 모든 걸 내다보게 하지. 그때가 되면 넌 힘들어지겠지.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도는 배워 둬야 해. 아니면 넌 머지않아서 똥 무더기에 누워 있게 되거나 개들이 너한테 대고 오줌을 갈길 거라고.
--- p.264
죽음과의 싸움은 모든 것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감정이었다. 자신이 작고 가련하며, 위협받는 존재임을 아는데도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동안 몸속에서 삶에 대한 끈기와 아름답고 무서운 힘을 느꼈던 것이다.
--- p.270
사랑과 쾌락은 그에게 삶을 참으로 따뜻하게 해주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것이었다. 그는 명예욕을 알지 못했으며, 그에게는 주교나 거지나 똑같은 인간이었다. 소득도 재산도 그를 붙들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그런 것을 경멸했다.
--- p.295
곧 예술은 아버지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의 결합, 정신과 피의 결합이었다. 예술은 가장 감정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가장 추상적인 것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또는 순수한 관념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피가 흐르는 육신 세계로 끝날 수도 있었다.
--- p.296
생명은 아름답다. 행복은 아름답지만 순간적이며, 청춘은 아름답지만 빠르게 시들어간다.
--- p.328
“꽤 요령 있게 말하는군. 자네는 이 세상이 죽음과 공포로 포위되어 있다고 보는 모양이로군. 그리고 거기서 도망치기 위해 쾌락 속에 뛰어든다는 이야기고. 하지만 쾌락은 오래 계속되지 못해. 그건 자네를 다시 황무지로 쫓아낼 뿐이야.”
--- p.380
"싯다르타, 당신은 꽤 영리해 보이는데 이것도 잘 알아 둬야 해요. 사랑이란 구걸할 수도 있고, 살 수도 있고, 선사받을 수도 있고, 또한 길에서 찾아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사랑은 결코 강제로 빼앗을 수는 없는 법이에요."
--- p.456
‘글 쓰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은 더욱 훌륭한 일이다. 지혜로운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참는 것은 더욱 훌륭한 일이다.’
--- p.463
예전에는 천만금을 한순간에 잃고서도 껄껄 웃어넘기던 그가 지금에 와서는 장사에 노랑이가 되고, 돈에 구두쇠가 되었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돈 꿈을 꾸었다. 그는 가끔 무서운 악몽에 소스라치며 깨어나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나이 들고 밉상스러운 자기 얼굴을 보곤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럴 때마다 그는 도망갈 구멍을 찾았다. 즉 새로운 행복을 구하여 주색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는 다시 돈을 벌려는 본능의 세계로 되돌아오곤 했다. 이 무의미한 순환 속에서 그는 지치고 늙고 병들어 갔다.
--- p.472
이제 싯다르타는 예전에 자기가 바라문으로서 또는 고행자로서 왜 부질없이 ‘나’와 싸웠는지 알게 되었다. 게다가 너무나 많은 지식, 신성한 시, 번거로운 제사의 규칙, 지나친 금욕, 지나친 고행, 노력 등등이 오히려 이 ‘나’를 정복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 p.484
“당신의 말은 아마 이런 뜻일 거요. 즉 강은 근원에서나, 강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늘 동시에 있으며, 강에는 현재만 있을 뿐 과거나 미래의 그림자가 없다. 이런 말이죠?"
--- p.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