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고양이가 온다
1.
신발이 어지럽게 놓인 현관을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내가 일을 하러 나간 동안 고양이는 그렇게 혼자 남았다. 내가 문을 잠그고 나간 뒤 오히려 제 세상인 듯 활개를 칠지도 모를 일이지만, 혹시나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을까 싶어 염려를 하기도 했다. 솔직히 회사 따위는 가지 않고 고양이처럼 늘어진 채 침대 위에 드러눕고 싶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아침이면 잠이 덜 깬 채 몸을 뒤척이며 뻗은 손에 고양이가 닿기도 했다. 손 뻗는 곳 혹은 발 닿는 곳에 누워 잠들어 있는 고양이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자그마했다. 그러면 곧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이 몰려왔다. 마치 오래된 그림책에서 보았던 것 같은 장면-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소녀의 발밑에 잠든 고양이-에서 연상되는 그런 평화로움. 고양이가 내 곁에 누워 있다는 것만 느껴도 기분이 편안해지면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곤 했다. 그럼 잠결에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정말 다행이다!’
고양이는 마치 연인처럼, 가족처럼 내 곁에 있었다. 물론 강아지처럼 훈련시킬 수는 없었다. 제멋대로이고, 변덕이 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말을 못 알아듣거나, 내 기분을 모른 척 하는 법은 없었다. 다만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때로는 사람 같았다. 철저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되 함께 지내는 사람의 감정도 헤아릴 줄 아는 친구. 고양이는 역시 고양이였다.
2.
집 안에서 사는 고양이들은 집 밖에 사는 고양이들과 다르다. 그들이 가진 본능적인 야생성은 어쩔 수 없지만 어둡고 좁은 골목을 헤매지 않고 정해진 공간 안에 정착했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집 안에 사는 강아지들과도 다르다. 집 안으로 들어왔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동거자로서의 행동 양식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집 안의 고양이에게 충성을 바치는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양이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이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래서일까?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조금은 독특한 취향을 가졌거나, 유별난 성향을 가진 것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고양이를 집 안으로 들여놓는 것이 쥐를 잡으려는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고양이와 함께 산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거나 최신 유행이거나 둘 중 하나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우리 문화에서 고양이는 사람을 배신하는 요물이며, 공포의 대상으로 치부되는 존재이다 보니 그 이해를 구하기가 더 어렵다. 최근 들어 그러한 편견은 많이 줄어들었다지만 사람들에게 고양이는 여전히 조금은 불편한 동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은 사실 ‘무지’에서 시작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어쩌면 고양이를 이해한다는 건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전혀 다른 방식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가진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어렵고, 오히려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3.
우노 초이UNO CHOI의 고양이들은 침대나 카펫 그리고 창틀 위에서 무심한 듯 편안하게 그곳에 있다. 때로는 높은 옷장이나 빨랫감이 쌓인 세탁기 위에 태연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우노 초이의 카메라는 고양이들을 거스르는 법 없이 함께 그곳에 머무른다. ‘찰칵’ 소리는 어디로 가 버렸을까? 왠지 셔터 누르는 소리도 안 들렸을 것만 같은 고요함 속에 숨 쉬듯 흘러간 일상의 조각들이 자연스레 펼쳐진다. 비스듬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반짝이고, 빛과 그림자가 빚어내는 다양한 도형 사이로 우노 초이의 고양이가 뒹군다. 폭신폭신한 발을 살포시 내려놓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빛. 한낮의 빛 아래서는 가느다랗게 변하고, 그늘 아래서는 어둠을 빨아들여 동그랗게 변하는 고양이들의 그 눈빛! 무방비 상태의 고양이들, 그래서 어떤 연출도 없이 그저 자연스레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고양이들.
거의 15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한 그들이다. 사진에는 오로지 고양이들만이 있을 뿐이지만 그 너머에 싱글거리며 아이처럼 카메라를 들고 있을 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믿어. 나는 너를 믿어. 가르릉그릉그릉.”
고양이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우노 초이는 몇 번씩 열아홉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열아홉 살에 발을 디딘 미국 땅에서 모델로 성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린 그. 그리고 지금은 주얼리 아티스트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 하지만 사진 속 고양이들이 전해 주는 우노 초이의 모습은 성공한 모델도, 유명한 주얼리 아티스트도 아니다. 일상을 공유했고 믿음과 사랑을 주었던 ‘고양이 엄마’ 혹은 ‘고양이 반려’로서 애정과 행복이 충만했던 우노 초이의 모습이다. 고양이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 행복으로 촉촉하게 젖을 수 있었던 시간”이라며 서슴없이 말하는 그이다.
단 한 번이라도 고양이와 함께 살아 본 적이 있다면 그저 고양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행복의 기운이 퍼진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어슬렁어슬렁 거실을 걸어 다니다가 가만히 다가와 살짝 기대듯 스쳐 지나가던 유연한 몸, 창밖의 정원에 꽃이 피고 새가 울면 창틀 위에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보던 뒷모습, 땅을 밟지 않아 부드럽고 폭신하며 연한 분홍색이던 발바닥, 기분이 좋을 때면 눈을 살짝 감고 연신 내뱉던 ‘가르릉’ 소리….
고양이들은 언제 어디에서건 기쁨으로 살아나는 선물 같은 아이들이다. 금세 ‘야옹’ 소리를 내며 톡 튀어나와 고개를 들이미는, 그래서 지금 바로 이곳에 항상 함께 있는 그 고양이들…! 그래. 저기, 고양이가 온다. 우노 초이와 우노 초이의 고양이들. 이미 오래 전에 서로를 닮아 버린 그들의 캣워크CATWALK는 이렇게 계속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