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는 외톨이답게
코끼리와 기린, 고슴도치 등등은 외톨이다.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게다가 이름까지 ‘조냐’다. 소냐도 아니고 조냐라니, 부모님은 어떻게 딸내미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나는 열네 살이며, 호기심이 아주 많다. 학교 도서관이나 위키피디아와 아주 친하다. 반 친구들은 나를 미치광이 취급한다. 방학이면 할 일이 없어서 괴롭다. 그래서 야외 수영장에 가서 사람들을 관찰한다. 어느 날, 귀와 머리카락이 바짝 선 데다 비쩍 말라서 자작나무, 아니면 외계인처럼 생긴 남자아이를 보게 되는데……. 그 아이는 자신을 ‘쥐죽’이라고 소개한다.
수영장 가장자리에 사람이 한 명 더 서 있었다. 무덤가에 방금 심은 자작나무처럼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데다, 새하얗기까지 한 남자아이였다. 초록색 수영복을 입었는데, 붉은색이 도는 금발이 사방으로 비죽비죽 뻗쳐 있었다.
머리에서 툭 불거져 나온 게 머리카락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바짝 서 있는 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햇빛이 그 아이의 귀를 주홍색으로 물들이는 바람에, 낙하하는 두 개의 작은 태양이 머리 양쪽에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반짝이는 귀와 기이한 몸매 덕분에 그 아이는 우주선을 타고 지금 막 수영장에 도착한 외계인 같았다. 또 한 가지, 왼쪽 견갑골 근처에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내 또래인 것 같긴 한데,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건이 터졌다. 어디선가 작은 사향쥐 두 마리가 불쑥 나타나 물가를 뱅뱅 돌며 추격전을 벌이다가, 그중 한 마리가 젖은 바닥에서 미끄러지며 자작나무의 발뒤꿈치에 부딪히고는 다시 도망쳤다. 깜짝 놀란 자작나무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그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 pp.19~20
나만 못하는 것
나는 쥐죽과 함께 수영장에서 날마다 낱말 게임을 한다. 어느 날 쥐죽을 집으로 초대하는데, 아빠가 팬케이크를 굽는 걸 몹시 신기하게 여긴다. 쥐죽은 그동안 베를린에서 지냈으며, 엄마가 아버지랑 헤어지는 바람에 이곳으로 오게 됐다고 말한다. 지금은 ‘새장’에서 산다나? 말투로 보아, 쥐죽은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식사 후에 쥐죽과 나는 정원에 누워 별자리를 관찰한다. 뭐가 제일 무섭냐는 내 질문에 쥐죽은 대뜸 ‘아버지’라고 대답한다.
나는 쥐죽이 다른 또래 아이들처럼 부모님을 ‘엄마’나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왠지 우연히 같은 집에 살게 된 이방인을 지칭할 때 쓰는 말처럼 들렸다. 쥐죽의 목소리에 아버지가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에 대한 분노가 스며 있었다. 아니, 어쩌면 슬픔인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저녁마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문을 읽으며 와인을 드셨지. 그러다 내가 거실로 들어가면 늘 ‘난 지금 집중해야 하니까, 쥐 죽은 듯이 있어!’라고 말씀하시곤 했어.”
그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쥐죽’은 ‘쥐 죽은 듯 조용히 하다’에서 따온 말이었다! 그러니까 쥐죽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별명을 붙인 것이다. --- pp.43~44
뜻밖의 반격
어느 날, 엄마가 뜬금없이 미로 공원으로 소풍을 가자고 한다. 쥐죽도 데려가고 싶어서 전화를 걸지만 아무도 받지 않는다. 나는 미로공원에서 점심을 먹으며 엄마에게 쥐죽의 몸에 있는 멍에 대해 이야기한다. 엄마는 깜짝 놀라 쥐죽의 집으로 달려간다. 엄마 뒤를 쫓아 겨우겨우 그 집에 도착했을 때, 발코니 유리창은 깨져서 산산조각이 나 있는 데다, 쥐죽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쥐죽 앞에 서 있다. 유리 조각을 손에 들고 있는 쥐죽의 얼굴에는 실망과 공포, 분노, 그리고 사랑 비슷한 것도 어려 있다. 얼마 뒤, 쥐죽은 유리 조각으로 아버지의 어깨를 찌른다.
쥐죽네 집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불이 꺼져 있어서 집 안은 어두침침했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쥐죽을 발견한 순간, 툭 하고 심장이 잠시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쥐죽은 거실의 왼쪽 구석, 예전에는 발코니 문이었지만 지금은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이 그득한 곳에 서 있었다. 부서진 얼음 같은 유리 조각이 쥐죽의 주변에 흩어져 반짝거렸다.
그 뒤쪽 벽에 쥐죽의 어머니가 딱 붙어 있었다. 지난번처럼 목욕 가운을 입은 쥐죽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왼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마치 형편없는 연기를 펼치고 있는 호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쥐죽 앞에는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뒷모습만으로도 단박에 압도당할 것만 같았다. 키가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구였다. ‘저 사람이 바로 쥐죽의 아버지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 아저씨가 쥐죽에게 손을 뻗었다.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누군가 영화를 잠시 멈춘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꼼짝도 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쥐죽을 재빨리 바라보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눈이 엄청나게 커 보이고, 입술은 방금 수확한 체리처럼 검붉었다. 머리카락은 정전기를 품은 듯 삐죽삐죽 서 있었다. 얼굴도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실망과 공포, 특히 분노로. 하지만 이런 감정과는 맞지 않는 무언가도 언뜻 보였다. 사랑 비슷한 거?
그때 쥐죽이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투명한 물건이 쥐죽의 손에서 번쩍였다. 나는 모든 게 왜 잠깐 정지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발을 들여놓은 상황은 폭풍 직전의 적막이었던 것이다!
--- pp.10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