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소득공제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세트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세트

[ 전2권 ]
별규 | 청어람 | 2017년 02월 03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1 리뷰 16건 | 판매지수 48
정가
27,000
판매가
25,650 (5% 할인)
배송안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11(여의도동, 일신빌딩)
지역변경
  • 배송비 : 무료 ?
신상품이 출시되면 알려드립니다. 시리즈 알림신청
eBook이 출간되면 알려드립니다. eBook 출간 알림 신청
  •  국내배송만 가능
  •  최저가 보상
  •  문화비소득공제 신청가능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2월 03일
쪽수, 무게, 크기 1024쪽 | 145*200*80mm
ISBN13 9791104910982
ISBN10 110491098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오빠. 우리 사귀자.”
밑도 끝도 없는 하윤의 말에 젓가락을 들고 있던 신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지금 두 사람은 식사 중이었다. 계란말이를 집어 들며 할 말도, 고등어 살을 바르며 들을 말도 아니었다.
“뭘 하자고?”
신휘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귀자고.”
신휘의 생각을 눈치챈 하윤이 정확하고 다부진 어조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얼른 포기하라는 진지한 표정도 잊지 않았다.
“못 알아들었어? 다시 말해줘?”
신휘의 시선이 하윤의 얼굴을 지나 아래로 향했다. 단정하게 여며져 있는 하얗고 빳빳한 목깃과 자주색 넥타이 그리고 밤색 재킷……. 그랬다. 하윤은 지금 교복 차림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사 직전이라면서 교복도 안 갈아입고 밥을 차리더니,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가당찮은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주제에 여섯 살이나 많은 자신을 농락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신휘에게 고등학생은 여자도 뭣도 아닌 그냥 아이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하윤은 태어나면서부터 보아온 사이가 아니던가. 십팔 년 전 하윤이 태어났던 산부인과 앞에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도 앨범 어딘가에 꽂혀 있을 터, 그 불타는 고구마 같던 신생아가 지금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여 대고 있었다.
“좋다는 뜻이야?”
누가 봐도 그는 어이없어 하고 있었지만, 하윤의 해석은 남달랐다.
말을 섞으면 왠지 말려들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신휘는 입을 꾹 다문 채 하윤을 응시했다. 갈색의 긴 생머리, 동그랗고 선한 눈, 부드럽게 떨어지는 콧날, 복숭앗빛 입술까지, 하윤은 사랑스러움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폭탄 제조가 특기요, 폭탄 투척이 취미인 녀석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생각지도 못한 슈퍼 헤비급이었다.
“사람이 제안을 했으면 답을 해야지.”
하윤이 대답을 재촉했다.
“하…….”
신휘의 입에서 대답 대신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윤은 수줍어하는 기색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고백을 했으면 어떤 대답이 나올지 초조해할 법도 하건만, 일말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 꿍꿍이가 뭐지……?’
오히려 고백을 받은 신휘가 하윤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원래부터 엉뚱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기질이 다분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난데없이 사귀자고 하는 속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읽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진심인지 농담인지조차도 파악되지 않았다. 하윤은 포커페이스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 맹랑한 머리통 속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결국, 신휘가 내린 결론은 이것뿐이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하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싫어? 싫음 말고.”
이건 또 뭐지? 사귀자는 말만큼이나 당혹스러웠다.
“오빠가 싫다면 나 좋다는 정우 오빠랑 사귀지, 뭐.”
“손정우?”
신휘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렁였다. 미간이 좁아졌고 콧등에 주름이 생겨났다. ‘정우 오빠랑 사귀지, 뭐.’ 그 짧은 문장 안에 언짢은 단어가 세 개나 들어가 있었다. ‘정우’라는 이름과 ‘오빠’라는 호칭의 조합도 거슬리는 마당에, ‘사귄다’라는 단어가 추가되니 완벽한 분노 삼합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하윤은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절하게 확인 사살까지 해주었다.
“정우 오빠가 사귀재. 오빠한테 까이면 정우 오빠나 만나보려고.”
“그동안 손정우랑 연락하고 지냈어?”
“응.”
하윤이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휘는 식탁 위에 양팔을 올리고 관자놀이를 천천히 문질렀다.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오빠 화낸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으흐흐! 고지가 코앞이야!’
하윤은 신휘 자신도 모르는 그의 습관을 잘 알고 있었다. 신휘는 심기가 불편할 때 관자놀이를 문지르곤 했다. 하물며 양쪽을 다 문지르고 있다는 건 심기가 극도로 불편하다는 의미였다. 다른 남자와 사귀겠다는 말이 저 정도로 거슬린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아주 긍정적인 신호임이 분명했다.
“왜 이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린데? 정우 오빠 정도면 나한테 과분하지.”
자, 이제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놔!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에 하윤의 광대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너한테 과분한 건 맞는데, 아무튼 안 돼.”
신휘는 재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아무튼’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막무가내인지 알면서도 다른 적당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한동네에서, 그것도 바로 옆집에서 수년을 보아온 결과 손정우 정도면 남자로서 꽤 쓸 만한 놈이었다. 외모, 공부, 성격까지 어디 한 구석 나무랄 데 없는 엄친아의 표본이었다. 나무랄 데가 있다면 감히 하윤에게 수작을 건다는 것 정도가 다였다.
‘어디 열여덟 살밖에 안 먹은 고등학생한테 찝쩍거려, 찝쩍거리길!’
신휘는 그 열여덟 살밖에 안 먹은 고등학생이 지금 자신에게 사귀자며 들이대고 있다는 생각은 저 멀리 제쳐 두고 속으로 정우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과분하다는 말은 겸손 코스프레일 뿐이었건만, 하윤은 바로 수긍하는 신휘를 보며 욱하고 올라오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숨을 골라야만 했다.
“정우 오빠만 아니면 돼? 그럼 며칠 전에 고백해 온 우리 학교 선배나 만나볼…….”
“안 돼.”
신휘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왜 안 되는데?”
“어디서 콩알만 한 게 남자를 사귀겠대?”
“요샌 초딩들도 남친이 있다는데 이 미모에, 이 몸매에, 이 성격…….”
양심적으로 성격은 빼기로 했다.
“아무튼…… 이 미모에, 이 몸매를 가진 내가 지금까지 남자 한 번 안 사귀어본 게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나도 여자 안 사귀어봤어. 됐지?”
신휘가 하윤의 말을 단호하게 받아쳤다.
“되긴 뭐가 돼? 나는 이상한 거고, 오빠는 진짜, 정말, 완전 이상한 거야.”
누가 들으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화를 낼 만한 일이었다. 천하의 문신휘가 모태솔로라니. 어떻게 이토록 완벽한 남자가 여자를 사귀어본 적이 없을 수가 있는지, 그야말로 불가사의라고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더 갖고 싶다, 문신휘! 하다 하다 여자 문제까지 완벽하다니! 문신휘의 여자, 내가 되어주겠어!’
하윤은 속으로 결의를 다지면서도 겉으로는 다시 포커페이스를 장착했다.
“그럼 오빠랑 사귀는 걸로 알아들으면 되나?”
신휘는 하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성하윤. 너 아직 미성년자야.”
“그 말은 미성년자만 아니면 된다는 뜻이야?”
하윤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꽤나 논리적이었다. 신휘가 한 마디를 하면 하윤은 두 마디를 했고, 하윤이 한 마디를 하면 신휘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에게는 말발로 그녀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신휘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분명 선택지는 두 개를 받았는데 둘 다 난감 그 자체였다. 자신과 하윤이 사귄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고, 하윤이 정우와 사귄다는 건 생각해 볼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가 혼란에 빠진 사이, 하윤의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오케이. 그럼 이 년만 기다려. 그때 사귀자.”
하윤은 흡사 은혜를 베풀어준다는 듯 도도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함과 자신감을 잃지 말라고 주입시킨 신휘의 첫째 형, 창휘의 교육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함을 넘어선, 뻔뻔함으로 중무장된 멘탈의 소유자였다.
“대신.”
신휘는 하윤의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숨 쉬는 것도 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에게 당황을 넘어 경악과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정조를 지켜줬으면 좋겠어.”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앉아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신휘는 하윤의 말을 되뇌었다.
“……정 ……조?”
지금 이 상황에서 조선 시대 왕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았을 테니,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의미가 분명했다. 아무리 다른 의미로 끼워 맞춰보려 해도 하윤이 말한 의미는 명확했다.
“아! 물론 정조를 지키라는 의미에는 다른 여자랑 사귀면 안 된다는 것까지 포함이야. 오빠가 나 스무 살 될 때까지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면 어떡해? 나도 약속은 받아놔야지.”
신휘는 수많은 여자로부터 사귀자, 좋아한다, 사랑한다 등등의 모든 고백을 다 받아보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정조를 지키라는 말은 난생처음이었다.
“나 결벽증 있는 거 알지? 여기저기 몸 함부로 굴리고 다니면 가만 안 둬. 지금까지 지켰던 것처럼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얌전하게 지키고 있어.”
네가 대체 언제부터 결벽증이 있었냐……. 하윤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제정신이 돌아온 신휘가 반격을 시도했다.
“야, 인마. 지금 네가 나한테 사귀자고 하는 거야. 내가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그리고 내가 정…… 그거 지금까지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 네가 어떻게 아는데?”
신휘는 차마 입에 올리기도 민망하다는 듯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며 돌려 말했다.
“은휘 오빠가 그러던데? 오빠 숫총각이라고. 아, 아닌가? 동정남이라고 했던가?”
하윤은 굳이 중요하지도 않은 단어에 집착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신이 아득해진 신휘가 둘째 형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으, 은휘 형…….”
취한 은휘를 살살 꼬드겨 확인받은 건 맞지만, 하윤도 확신하는 바였다. 신휘는 초·중·고등학교 내내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몰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고, 사귀지도 않으면서 육체적 관계를 가질 만큼 가벼운 남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하윤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신휘는 그녀의 말간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하윤의 시선을 옭아매었다. 뻔뻔스러우리만치 당당하던 하윤이 그의 깊고 강렬한 눈빛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까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신휘의 입이 열렸다.
“좋아. 받아들인다.”
하윤이 열여덟 살이던 해, 어느 날의 일이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미풍이 코끝을 간질이고, 눈부신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 내리는 오후. 하윤은 점심을 먹자마자 태훈과 지혜를 끌고 운동장으로 나와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희들이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해주마.”
오수를 즐기다 말고 하윤의 손에 끌려 나온 지혜는 내내 뚱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그제야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깜짝 놀랄 만한 얘기가 아니면 깜짝 놀랄 만큼 욕해도 되지?”
“난 그냥 지금 욕하면 안 되냐?”
축구를 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려 성이 난 태훈이 깐족거리며 말을 받았다.
세 사람은 중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삼 년 내내 같은 반이었고, 같은 고등학교까지 오게 되었다. 중학교 삼 년 동안 우연인지 인연인지 모를 그것의 기운을 탈탈 털어 사용해 버린 탓인지, 고등학교에 와서는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지만, 여전히 등하교 시간과 점심시간 등을 이용해 어울려 다니곤 했다.
“둘 다 좀 닥쳐 줬으면 한다만?”
하윤은 위협적으로 눈을 부라린 다음, 두 입이 모두 닫힌 것을 확인한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윤이 어제 일을 영웅담처럼 이야기하는 동안, 태훈과 지혜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떡 벌린 채로 멍하게 앉아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지혜였다.
“그래서 사귀기로 했다고?”
“여태 뭐 들었냐? 정확히 말하면 이 년 후부터라고. 근데 뭐, 가계약은 해놓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사귄다고 해도 무방하지.”
하윤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하늘로 향했다. 광대는 이미 발사 직전까지 치솟아 오른 상태였다.
“가계약? 너 어디 땅 사냐? 집 사?”
“문신휘 사려고.”
하윤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신휘 형이 네가 사귀자니까 순순히 그러재?”
“별말 없이 덥석 오케이를 한 거야?”
태훈과 지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질문을 던졌다.
“훗! 나 성하윤이야!”
하윤의 얼굴에 도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신휘가 예전부터 꽤나 신경 썼던 정우를 팔아 원하는 대답을 얻어냈다는 건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정우와는 일 년에 한두 번 안부 연락이 오면 형식적으로 답을 해주는 정도일 뿐, 특별히 연락하고 지낸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사이였다. 당연히 사귀자는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하윤은 손정우 카드를 꺼내들 생각을 한 제 순발력에 감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성하윤인 건 우리도 잘 아는 사실이고. 그래서 뭐?”
이 쓸데없이 깐깐한 년 좀 보게? 하윤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쌍욕을 잘 밀어 넣고 여유로운 척 싱긋 웃었다.
“당연히 한 방에 콜이지. 오빠가 날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
어깨를 어찌나 과하게 으쓱거렸는지 어깨가 귀에 가서 붙기 일보 직전이었다.
“신휘 오빠가 널 거부할 이유, 내가 이 자리에서 거뜬하게 백 개쯤은 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지혜는 한마디도 그냥 넘어가 주는 법이 없었다. 아담한 체구에 동글동글 귀여운 외모였지만, 실상은 전혀 귀엽지 않은 독설가였다.
‘망할 허지혜야. 열 개쯤은 나도 읊을 수 있다만 백 개는 너무하는 거 아니니?’
하윤의 그렁그렁한 눈에 마음이 약해진 지혜가 화제를 돌려주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뜬금포를 날렸냐? 원래 계획은 졸업식 날이었잖아. 너 고백할 말도 준비해 뒀던 걸로 기억하는데, 뭐였더라……? 오빠, 난 이제 더 이상 학생이 아니야…… 였나?”
해서는 안 될 말을 입에 올렸다는 듯, 지혜의 표정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닥쳐. 그 말 유치해서 버린 지 오래됐어. 참신한 걸로 준비해 둔 게 있지.”
“뭘로?”
“궁금해?”
“어디 씨불여 보든가.”
하윤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혜를 힘껏 째려봐 주고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큼!”
열과 성을 다해 목소리를 가다듬다가 급기야 코를 먹은 하윤은 머쓱한 표정으로 얼른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몽롱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으며 읊조렸다.
“오빠, 나를 가져…….”
“우웩, 토 나와! 나를 가지래. 소름!”
지혜가 양팔을 미친 듯이 쓰다듬으며 꽥 소리를 질렀다. 태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두 사람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하윤이 인형처럼 길고 짙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물었다.
“후져?”
“후진 정도가 아니라 네 주둥이를 꿰매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지혜의 독설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윤은 혹시나 편을 들어줄까 싶어 태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생각은 어때? 남자가 들으면 막 가지고 싶고, 막 가져야 할 것 같고…… 그렇지 않아?”
태훈이 평소와 사뭇 다른 그윽한 어조로 하윤을 불렀다.
“하윤아…….”
“응.”
태훈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하윤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막 때리고 싶고, 막 때려야 할 것 같고…… 내 느낌은 그렇다.”
“큰일 날 뻔했군.”
하윤이 발끈하기는커녕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태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 그 신속한 수긍은?”
“사실 어제 그 멘트, 써먹어볼까 하다가 너무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것 같아서 참았거든. 너희들 반응이 일치하는 걸 보니 안 써먹길 잘했다 싶구나.”
지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더 이상 일방적일 수 없을 정도로 들이대 놓고 뭔 소리냐.”
“내, 내가 뭘…….”
하윤의 말간 눈동자가 미친년을 보는 듯한 지혜와 태훈의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결국, 그녀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둘의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오케이. 인정.”
능청스럽게 씩 웃는 하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태훈이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고백한 거냐는 게 질문 아니었냐? 우리 또 딴 데로 샜다.”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던 세 사람은 다시 원래 주제로 방향을 틀었다.
“같이 밥을 먹다가 고개를 딱 들었는데…… 이건 뭐, 사람이 아니라 조각이 앉아 있는 거야.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있어야지.”
“얘 지금 뭐라는 거냐?”
“저 슈퍼 울트라 콩깍지는 언제쯤 벗겨지려나. 저 정도면 병 아니냐, 병?”
지혜와 태훈이 뭐라고 하든 말든, 하윤은 꿈꾸는 듯 몽롱한 눈으로 입을 놀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순간 불쑥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졸업하려면 이 년이나 남았는데 그동안 오빠가 딴 여자 만나면 난 뭐가 되는 거지?”
“새 되는 거지.”
이럴 때만 마음이 잘 맞는 지혜가 말을 받았다.
“그거지! 지금까지 안 만났다고 앞으로도 안 만난다는 법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 거지!”
하윤이 유레카를 외칠 기세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내가 오빠를 남자로서 좋아한다, 오빠 생각은 어떠냐. 이렇게 말을 해야지 했는데 막상 내 입에서는 우리 사귀자가 튀어 나가고 있더라고.”
지혜가 배시시 웃는 하윤을 보며 혀를 찼다.
“생각이란 걸 하면 뭐하냐? 주둥이가 먼저 움직이는 걸.”
“뭐면 어때. 사귀기로 했으면 된 거지.”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뭔데? 미성년자 딱지 떼면 오빠랑 사귀는 거? 근데 고백하고 이 년 후부터 사귀는 것도 웃기는 거 아니냐?”
“오빠의 도덕관념으로 미루어볼 때 미성년자랑 사귈 리가 없단 말이야.”
하윤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신휘 오빠 은근히 보수적이더라? 생긴 거랑 다르게 생각은 아주 영감이셔.”
“사실 예상 못 했던 것도 아니야. 고집이 있어서 한 번 아니라고 하면 절대 마음 안 바꿔. 우선 약속은 받아놨으니까 스무 살 될 때까지 조신하게 기다리다가 성인 되자마자 바로 자빠뜨리겠어.”
하윤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근데 네가 자빠뜨리면 형이 자빠지긴 하냐? 형이 널 여자로 봐야 말이지. 이 년 후라고 별다를 게 있겠나 싶다, 나는.”
허를 찌르는 공격에 움찔한 하윤은 늘 어리바리하다가 한 번씩 냉철한 평가를 내리는 태훈을 못마땅하게 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가식적인 미소를 매달고 허세를 떨었다.
“다시 말해줘? 나 성하윤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여자로 보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지.”
“아, 그럼 지금까지는 마음을 안 먹었었구나.”
태훈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지혜가 빈정거리며 끼어들었다.
“마음 좀 빨리 먹지 그랬냐. 네가 들이대지 않고 오빠 입에서 먼저 사귀자는 말이 나왔으면 깔끔했을걸. 가계약 따위 필요도 없고.”
“그래서 이제 먹을 거라고…….”
“근데 신휘 형을 어떻게 믿어?”
찬물을 끼얹는 태훈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하윤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어서 지혜가 합세했다.
“변태 말에 동의.”
지혜는 태훈이라는 이름을 두고 변태훈에서 굳이 앞 두 글자만 따서 변태라고 불렀다. 물론 그건 하윤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하도 사람을 달달 볶으니까 그러겠다고 해놓고 뒤로 딴 여자 만날 수도 있잖아. 아니면 이 말 같지도 않은 약속 때려치우자고 하든가.”
‘말 같지도 않은’이라는 대목에서 하윤은 욱하고 분노가 용솟음쳤다. 하지만 지혜는 멈추지 않았다.
“오빠가 여태까지 여자친구가 없었던 건 말하는 나도 믿어지지가 않지만, 너처럼 들이대는 여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넘쳐 나지 않냐?”
‘너처럼 들이대는’이라는 대목에서는 하마터면 지혜를 한 대 칠 뻔했다.
“여자 연예인들만 해도 신휘 오빠 이상형으로 엄청 꼽던데? 그중에 오빠 이상형 하나 없겠어? 지금까지는 다행히 없었다고 해도 관심 가는 여자 생기면 너랑 한 약속 지키자고 설마 안 만나겠냐?”
하윤은 폭발 직전이었던 사람이 맞나 싶게 태연한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딴 믿음도 없이 저질렀겠냐? 오빠가 헛소리는 가끔 해도 거짓말은 안 해.”

“오빠, 나 살 좀 찐 것 같지?”
“좀이 아니라 많이 쪘는데?”

“나 머리 잘랐는데 어때?”
“사내놈 같다.”

“내가 만든 건데 먹어봐.”
“이건 혹시…… 개밥이냐?”

굳이 정직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조차 칼같이 정직한 반응을 보이며 뒷목 잡게 만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하윤은 뻣뻣해진 목덜미를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오빠는 자기 입으로 한 약속은 지켜. 안 지킬 생각이거나, 못 지킬 것 같았으면 목에 칼이 들어왔어도 절대 대답 안 했을 거야.”
하윤과 오 년째 삼총사로 지내온 두 사람도 신휘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우리 문씨 삼 형제 DNA가 어디 가겠냐?”
문씨 삼 형제라 함은 하윤과 함께 살고 있는 창휘, 은휘, 신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세 사람을 떠올린 하윤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날 밤, 하윤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면서 세 사람을 거실로 불러 모아놓고 그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하윤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신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학교에서 벌어질 수 있을 만한 사건 사고들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왕따?’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은 하윤이 왕따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렇다면 학교 폭력?’
하윤은 때리면 때렸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만큼 연약하지 않았다.
‘그럼 성적 비관?’
비관할 성적도 아니었지만, 꼴등을 한들 비관할 성격도 아니었다.
신휘가 감을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하윤이 입을 열었다.
“우리 사귀기로 한 거 공식화하려고.”
신휘가 뜨악한 표정으로 하윤을 바라보았다. 딴소리하지 못하게 안전장치까지 마련해 놓으려는 하윤의 철두철미함에 그는 혀를 내둘렀다.
“우리 사귀기로 한 거? 우리?”
창휘가 ‘우리’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물었다.
“응, 신휘 오빠랑 나랑 사귀기로 했어.”
하윤의 재기 발랄한 대답에 창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문.?신.?휘.”
신휘는 창휘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신휘도 꽤나 보수적인 편이었지만, 창휘에게는 댈 게 아니었다. 미성년자인 것도 모자라 딸처럼 생각하는 하윤과 사귀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형이 자신을 살려둘 것 같지 않았다.
“아, 형…… 그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신휘 대신 하윤이 끼어들었다.
“지금 말고 이 년 후에 사귀기로 했으니까 신휘 오빠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병 주고 약 주고, 뺨 때리고 어르고, 혼자 다 하는 멀티 플레이어였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창휘 앞에서도 하윤은 거침이 없었다.
“이 년 후?”
“나 성인 되면.”
그제야 창휘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 순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세 사람의 모습을 관망하듯 지켜보고 있던 은휘가 끼어들었다.
“근데 사귀기로 한 건 맞는 거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신휘 표정은 너랑 사뭇 다른데? 뭔가 강요와 강압에 의한…….”
하윤이 은휘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아니야. 신휘 오빠가 표현이 서툴러서 그래.”
그녀는 미친 연기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신휘를 욕보이고 있었다.
‘그래. 난 이미 만신창이야. 네 맘대로 해…….’
신휘는 모든 걸 내려놓은 상태였다.
“누가 먼저 사귀자고 한 건데?”
은휘의 질문이 이어졌다.
“……나.”
하윤이 소심하게 대답하자, 은휘는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그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요와 강압에 의한 게 맞군.’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회원리뷰 (5건) 회원리뷰 이동

한줄평 (11건) 한줄평 이동

총 평점 9.1점 9.1 / 10.0

상품정보안내

세트도서는 개별서지정보를 모두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각 권의 상세페이지도 참고해 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무료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1   25,65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