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되풀이해봤자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았다. 사람과 사람 간의 모든 관계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하고 모모는 의구심을 갖는다.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사바사키라면 그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 p.68
1년여 전, 그야말로 맨몸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무렵, 이 집의 분위기 - 카즈에 자신과도 비슷해서 꾸밈없고 소통이 잘되는 분위기 - 에 야마구치는 살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에 이런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니, 라는 신선한 놀라움. 이곳이 나의 마지막 정착지다, 라는 감상을 야마구치는 즐겨 입 밖에 냈고(그 말을 듣는 것이 카즈에도 기쁜 눈치였다), 거기에는 약간 자학적인 기분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 가와사키 집에 비하면 이 오래된 집은 많이 보잘것없었기에 -, 그래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고, 후련하면서도 일종의 밝고 평온한 기분에서 비롯된 말이기도 했다. ‘내 인생에 이런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니’라는 신선한 놀라움은 ‘이런 여자가 기다리고 있어주었다니’라는 신선한 기쁨과 동의어이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 p.127
조금 전 - 이란, 저녁 식사 때 - 히비키는 미쿠에게 심하게 화를 냈다(맏딸인 미쿠는 요즘 들어 부쩍 다루기가 어렵다). 음식을 전부 남겼기에 깨끗이 다 먹으라고 채근하자 미쿠는 살쪄서 싫다고 대답했다. 살찌면 좋지 않니? 히비키의 그 말에 미쿠는 연극조로 한숨을 쉬고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더니, 우리 집 음식은 너무 기름지고 엄마는 요새 이중 턱이 됐다고 했다. 그때는 하야토가 미쿠를 나무라며 엄마에게 사과하라고 엄하게 지시해서 미쿠도 마지못해 따랐다. 하야토가 말한 ‘별것도 아닌 일’은 바로 그 일을 가리키는 거였다. 요컨대 그 후에 히비키가 한 말은 - 아빠를 타 넘으면 안 된다는 말도, 제대로 일어나 앉아서 TV를 봐달라는 말도 -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히비키는 창문을 열고 밤공기와 비 냄새를 들이마신다. 혼자가 되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화가 가라앉은 건 아니지만 화를 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우리 집 음식이 기름지다고? 훌륭하지 않니? 육체 노동자인 남편이 있고, 야만스러운 아이가 넷이나 되면 튀긴 음식만 오르는 날도 그야 있겠지. 이중 턱? 정말 고맙구나. 네 아빠는 부드러워서 안는 느낌이 좋은 여자를 좋아하거든? 남자는 대개가 그래.
--- p.132~133
“좀 전의 그 옥수수, 어떻게 요리해줄지 기대돼.” 모모와 사바사키는 히로오의 이탈리아 식당에 와 있다. 메뉴판이 없어서 가격은 알 길이 없지만 확실히 저렴해 보이진 않는다. 자신보다 아홉 살 아래인 데다 월급도 많을 것 같진 않은 사바사키가 왜 이런 가게를 많이 알고 있는지, 모모는 의문이었다. “나는.” 병에 파란 라벨이 달린 이탈리아 맥주를 맛있게 한 모금 마시고, 사바사키가 말한다. “나는 그 옥수수를 먹었을 때의 모모 짱 얼굴을 보는 게 기대돼.” 넉살도 좋지, 라고 생각하려던 모모는 낯간지러움에 그만 웃고 만다. “그럼, 무표정하게 먹을게.” 그렇게 말했지만 어차피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었다. 사바사키 앞에서 모모가 감정을 숨길 수 있었던 예는 없다. 저도 모르게 방어막이 허물어지고 만다. 성가신 건 그게 기쁘고 쾌적하다는 사실이었다. 모모는 이제까지 남자 앞에선 늘 어딘지 모르게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었다. 허물없어 보인다거나 가벼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호감 가는 상대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보니 그 긴장감을 연애의 묘미라 여기던 시기도 있었다.
--- p.137~138
사바사키는 히비키를 떠올리고 있었다. (……) 모모에게 들었던 사전 정보로는 좀 더 살림때가 묻은 여성이겠거니 싶었다. 남의 평판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시끄럽고 독선적인 여성을. 하지만 실제로 본 히비키는 완전히 달랐다. 사춘기 아이처럼 어설프고, 사춘기 이전의 아이처럼 겁이 많아 보였다. 모모 짱도 겁이 많지만 그 이상이다. 모모의 두 다리 사이에서 사바사키는 생각한다. 히비키를 생각하고 있지만, 몸은 자연스레 모모와의 행위에 몰두할 수 있었다. 호흡이 맞는 것이다. 모모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세운다. 목소리를 내진 않지만, 몸을 젖히는 방식이나 손의 힘 - 모모는 가끔 침대를 두드린다. 사바사키에게 매달릴 때도 있고 두 팔을 위로 올려 헤드보드를 움켜잡으려 들 때도 있다 - 으로 사바사키를 몰아붙인다. 모모의 팔다리는 매끄럽고 피부는 거리의 비 냄새 비슷한 냄새가 난다. 발톱은 늘 연한 두 가지 색상으로 나눠 칠해져 있다. 직업상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를 수 없다며 본인은 아쉬운 듯 말하지만 사바사키는 모모의 손이 좋다.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은 손톱도. 히비키는 작은 손을 지니고 있었다. 마디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화과자 같은 손이었다. 절정으로 치달은 후, 사바사키의 가슴에 맨 먼저 퍼진 것은 팔랑팔랑 부지런히 움직이는 히비키의 그 작은 손이었다.
--- p.168~169
“헤어져버리면 되잖아.” 남편이 나갔을 때 딸 미토코는 그렇게 말했다. “최악이야, 이런 거”라고 불쾌한 듯이. 미사코는 자신이 비난받는 기분이었다. 애인을 만든 것도 집을 나간 것도 미사코는 아닌데. 분명 사이좋은 부부라고는 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거의 결혼 직후부터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싸울 기력조차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아온 세월이 없어지는 건 아닐 터. 체념과 습관과 타협의 산물이었다 해도 켜켜이 쌓여온 이 세월이. “아르고, 이리 와.” 미사코는 개를 부르고 현미차를 마저 마신다. 차는 둥글둥글한 맛이 났다. 둥글둥글한, 어릴 적부터 잘 아는 맛이. 미사코는 여름에도 따뜻한 음료가 좋다. 남편은 차가운 보리차나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싶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요 몇 년, 그런 것들을 만들지 않았다는 생각을 멍하니 떠올렸다.
--- p.182~183
“스캐너를 사서 데이터로 만들어버리는 건?” 사바사키가 말한다. “시디로 구워버리면 자리 차지하지 않고도 보존해둘 수 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응? 다시 한 번 말해봐.” 돌아보는데 다시 끌어안기고, 이번엔 입술도 포개지고 말았다. 사바사키가 같이 가줘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 히비키는 나중에 모모에게 그렇게 보고할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이제 보고할 수 없게 돼버렸다고, 머리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 p.317~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