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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사실을 존중한다 (PD수첩비평)

정지민 | 시담 | 2009년 10월 0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4 리뷰 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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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10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350쪽 | 153*224*30mm
ISBN13 9788995852194
ISBN10 899585219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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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에 적합한 발언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작가가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내가 평소에 많은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기 위한 글을 쓸 자격이 있는 작가로 인정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것은 상당히 과분하고 부적절한 명칭이라는 의미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2008년의 PD수첩 광우병 왜곡보도 사건을 통해 내가 새로이 인식하게 된 다른 부류의 작가들을 생각하면 내게는 상당히 모욕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2008년 여름 이후로 나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종종 존칭 삼아 나를 그렇게 불러왔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PD수첩 사건에 있어 내가 한 역할에 대한 일종의 오해와도 얽혀 있다. 나는 제작진의 일원이 아니며, MBC의 직원도 아니다. 나는 2008년 4월 말, 번역 단계에서 상당부분의 미국 취재자료의 내용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감수 단계에서는 방송에 들어갈 미국 취재자료의 부분들은 어떤 것들인지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자막도, 해설도, 대강의 구성, 짜임새도 본 적이 없었다. 제작진도 인정하다시피 그 어떤 제작 회의 내용을 들은 일도 없고, 심지어 보조 작가를 제외하고는 얼굴조차 몰랐다. PD수첩 게시판에 항의 글을 처음 올렸던 2008년 6월 25일까지 나는 불가피한 사정들로 인해 4월 29일의 방송 내용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으며, 직접 완성된 방송을 본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인 6월 28일이었다.

내게 작가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은 나를 방송제작에 가담했던 사람, 즉 내부 고발자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내가 등장한 후 7월의 국회 청문회에 PD수첩 제작진을 증인으로 소환하고 나를 참고인으로 요청하기 위해 연락을 한 분들 역시 나를 작가라고 부르면서 제작 당시 어떤 회의가 있었고 무슨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어떻게 내용 왜곡을 하게 되었는지 그 분위기를 알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예의상 그런 것은 전혀 모른다는 답만 하고 넘어갔지만, 이 질문에 내심 섭섭했다. 내가 그런 것을 4월부터 보고 알고 있었다면 6월 말까지 잠잠히 있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로서는 꼭 확인해보고 싶은 부분이었겠지만, 내가 방송을 늦게 봤다는 사실은 이미 다 보도되어 있었다.

나를, 제작 과정에 깊이 개입했고 따라서 옆에서 의도적인 왜곡을 목격하고 가담도 했다가 뒤늦게 양심선언을 한 사람으로 보는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은 설사 내가 제작진의 의도에 대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6월의 내 “폭로"가 충분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내 기준으로는 그런 행동은 매우 수치스러운 것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방송번역은 내게 일종의 취미거리에 불과했고, 따라서 제작진을 고발하거나 공개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는데 있어 그 어떤 생계의 문제나 주변의 눈치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사태에 대해 알게 된 즉시 행동했으며, 만약에 실제와는 달리 내 생업이 걸린 문제였더라도 나는 PD수첩 방송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게 되는 즉시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했을 것이다.

나는 PD수첩의 내부 고발자가 아닌 피해자이다. 내가 제대로 감수까지 해준 번역 내용을 자막을 통해 변질시켰을 뿐 아니라, 번역한 내용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아예 무시하거나 왜곡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그 자체로 큰 피해라고 본다. 4월 29일 오전, 방송에 들어갈 미국 취재자료 부분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면서 번역이 제대로 되었는지 감수를 하는 작업이 끝난 후에 자리를 뜨면서, 나는 제작진이 취재자료의 내용을 최대한 정확하게 분석, 해석하고 적절한 자막과 해설을 곁들인 방송을 계획 했으리라 여겼다. 아니, 당시만 해도 그런 생각은 의식적으로 할 필요조차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6월 25일까지도 4월 말에 방영된 PD수첩의 광우병편이 해명을 요하는 논란거리가 되고 있었음을 알게 되기까지 나는 그 점에 대해 의문점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방송종사자들에 대해서는 평소에도 특별히 높은 평가를 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최소한 지키는 선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6월 25일 아침까지 그들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어떠한 이념적인, 또는 윤리적인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지적 양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당연한 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한 일이 악용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정신적 피해를 주었다. 애당초 제작진이 방송의 잘못을 변명하기 위해 번역을 잘못한 탓이라고 말한 것은 이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이다.

여기에 내가 책을 쓰는 첫 번째 이유가 있다. 작년의 사건에 대해 아직까지도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이다. 어떤 자료를 보고 파악하는 것에는 개개인마다 차이슴 있을 수 있지만, 허용이 가능한 오차의 범위가 존재한다. 나는 PD수첩 광우병 편의 제작진이 그것을 넘었?고 판단한다. 의식적으로 과장과 왜곡을 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의 이러한 주장은 크게 보아 세 단계를 통해 밝힐 수 있는 문제다. 오역된 자막이 정말 실수였는지, 취재내용에 포함된 사실들을 제대로 반영하고 왜곡하지 않았는지, 나아가 프로그램 전반에 걸친, 왜곡과 과장의 기획의도가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그것이다. 우선 오역자막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음은 번역과 감수를 담당한 내가 제작진이 자막내용을 오역으로 바꾸었다고 밝히고 제작진이 이를 부정하지 못하면서, 그리고 검찰수사를 통해 초벌번역문과 자막수정 시점이 공개되면서 이미 자명해진 사실이다. 두 번째로 취재내용의 반영여부는, 내가 전략적으로 내가 본 내용을 밝히고 주장의 논리성에서 그들을 압도한 끝에 그들의 해명내용이 성립하지 않게 되면서 드러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PD수첩 제작진에게 적극적으로 현실의 과장이나 왜곡을 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앞의 두 가지를 통해서 자명해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더욱 확실한 논증을 위해 제작진의 해명 내용과 행동을 모두 검토하는 것이 좋다. 행위자가 사후에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설명하고, 어떤 근거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지, 또 그 과정에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지 등의 문제는 원의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책의 본문에서 마지막 단계에 관한 논증에 집중하였고, 부록에는 스크립트를 곁들여 제작진이 어떠한 오역을 자의적으로 했으며, 사실관계를 어떠한 식으로 왜곡했고, 또 어떻게 자료내용의 반영에 있어 불가한 취사선택을 하였는지 낱낱이 기록하였다.

나는 앞으로 학계에 종사할 역사학도로서, 사실관계의 파악 및 재현, 그리고 허용 가능한 오차 범위에 대해 항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PD수첩의 방송이 학술논문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지 못했거나, 지나치게 가혹한 잣대를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PD수첩의 광우병편이 내가 주장해온 것처럼 심한 왜곡보도이며 의도가 없이는 불가능할 만큼의 양적, 질적 오류가 있었는지 독자마다 스스로 근거를 갖고 판단을 해보기 바란다. 이명박 정권이나 정책에 대한 자신의 평소 신념이나 가치관에 기초하지 말고,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이 굉장히 크며 그 타당한 근거들이 PD수첩에 의해 보도되었고, 한국으로 수입될 쇠고기는 내수용과 다르게 위험하다’는 식의 보도가 거짓인지 아닌지, 또 그 보도를 구성한 논리가 성립하는지 아닌지, 사실관계에 있어 갖는 설득력을 기준으로 평가를 했으면 한다. PD수첩 보도의 왜곡 여부는, PD수첩 제작진이 져야 할 법적 책임이나 정치적 이슈에 대한 개개인의 생각과는 별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잣대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정파와 색채를 떠나서 모든 언론매체에 적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물론 나는 더 이상 내 주장을 애써 입증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지 않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과 정황으로 미루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주장은 설득력을 가져왔고, 결과도 좋았다. 그것을 아는 이들과 모르는 이들이 있다뿐이지, 타당한 근거를 토대로 내 주장과 대립하는 반박은 현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사실관계에 대한 존중 이외의 다른 목적의식 때문에 내 주장들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이들을 굳이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직 모르지만 내용을 알게 되면 공감할 이들에게 알리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PD수첩의 왜곡보도와 제작진의 사후대처를 해부하는 것은 생각 외로 굉장히 재미있고, 특히 그들을 통해 본 인간군상은 정말 최고의 블랙코미디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작의도에 있어 PD수첩과 애당초 함께하지 않았던 나는 내가 보았던 취재자료 그리고 결과물인 방송을 통해 합리적인 유추에 근거하여 비판을 해왔다. 자료 전부를 본 것도 아니고 그렇게 주장한 적도 없다. 내가 아는 것과 또 그때그때 알아낼 수 있는 것에 의거하여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한적한 곳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달리는 자가용을 본 사람이 당시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근처 가게로 들어가서 현장으로부터 잠시 눈을 돌렸다고 하자. 그런데 가게에서 나와 보니까 사람이 죽어 있다. 비록 자가용이 그 사람을 치고 뺑소니 친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인 기억력과 행동력, 거기다가 현장 감식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근거를 차근차근 찾아서 자가용 주인을 고발할 것이다. 또 자가용 주인이 여러 방법을 동원해 그때그때 새로운 알리바이를 대거나 내 주장을 거짓이라 주장한다면 그것들을 모두 검증해보고 반대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여기에서 내가 사람이 죽어 있다고 표현한 것은 PD수첩이 야기한 어떤 사회적 파장을 떠?, 그 어떤 목적이나 결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사실관계의 왜곡 및 성립 불가능한 논리로 짜인 구성 그 자체이다. 더욱이 이 경우는 그 어떤 공익적인 목적도 결과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보지 못한 것까지 포함한 취재자료의 내용을 전부 확보한 검찰에서 그것을 근거로 PD수첩 방송이 의도적인 것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왜곡보도였다고 결론 내렸고, 이러한 결론이 작년부터의 내 주장과 일치한다는 점은 내 감식이 근거 있었음을 말해준다. 거기에서 무슨 정치적인 음모를 읽는 사람들은 차분히 자신들의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점검해보길 권한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2008년 6월 25일의 내 "폭로"와 꾸준한 주장을 용기라는 것과 결부시키는 이유는 소위 말하는 거대 방송 권력에 불리한 내용을 실명으로,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것 자체를 큰 행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도 나는 사실 아직까지 이해를 잘 못하는 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오도되고 있을 때, 근거를 들어가면서 밝히는 것은 상대가 누구든 상황이 어떻든 간에 당연히 자기 이름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다. 평소에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 행동에 전혀 놀라지 않는데, 그 이유는 내가 사실관계의 왜곡에 큰 반감을 갖고 있고, 자존심이 특히 강한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거창한 선의도 필요 없고, 인간으로서 갖는 기본적 자존심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아무리 개인차를 감안하더라도, 할 말을 하지 못한 것에 따르는 갑갑함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내 행동의 배경에 어떤 이득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런 부분에 있어 굉장히 둔감하여 내 행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한 일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나 자신 이외에 대체 어느 누구를 위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학업과 유학계획까지 지연시켜 가면서 시간을 쪼개어 많은 귀찮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냉정하고 개인주의적이며 남의 부탁이나 지시를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아마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면 아예 시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남들보다 특별히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며, 한국사회의 이슈에 대해 어떤 소명의식, 의분이 넘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여기에 내가 책을 쓰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이상에 근거하여 내 행동을 어떤 애국심에 의한 것, 또는 그 반대에 의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둘 다 사실과 거리가 멀다. 나는 근거 없는 비난도 싫지만, 미화되고 싶지도 않다. 내 기준에서는 애국자라는 것이 미화는 절대 아니지만, 그렇게 여겨주는 사람들은 그것을 일종의 칭찬으로 생각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미화된 초상화 속에는 내가 없다. 따라서 내 입장에서 글을 남기고 싶었다. 물론 나라고 해서 정치적 이념이 없겠냐마는 그것이 내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사실관계와 이념이 어긋날 경우가 생긴다면 전자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와 기본적 이념이 많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실관계를 존중하기를 기대한다.
--- 머리말 중에서 (1)
나는 아직 젊다. 그리고 곧 한국사회를 뒤로 하고 다른 곳에서 평생 학업의 길을 갈 사람이다. 그리고 내 미래에는 앞으로 언론에서 이슈화하지도 않을 것임은 물론이고 내 동료들 외에는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나 개인에게는 PD수첩 사건보다 훨씬 중요할,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아 PD수첩 사건은 한국 사회에 특별한 판례를 여럿 남기게 될 것이고, 한국의 언론사에 중대한 사건으로 계속 남을 것이며,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논란은 물론이고 윤리적, 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리라고 여겨진다. 또한 어떤 면에선 방송에 대한 신개념 게이트키핑 모델을 제시한 사건으로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책을 쓰기로 한 세 번째 동기는 역사학도로서 내가 모든 사건에 대해 자연히 갖는 관심의 연장선에서, 어떤 이유로든 이 사건에 흡사한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출간을 결심한 세 번째 이유이다.

내가 PD수첩 사건에 대해 기록을 직접 남길 생각을 한 것은 단순히 그것이 객관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일 내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었더라면, 설사 나보다 훨씬 많은 취재자료를 보았거나 심지어 제작진 중 한 명이었다손 치더라도, 사건은 매우 다르게 흘러갔을 확률이 높다. 만일 누군가가 앞에서 예시로 든 자가용의 뺑소니에 가담했거나 그 순간을 직접 목격했다면,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고발할 의지가 생겼다면, 이것저것 근거를 댈 것도 없이 내부고발자로서 제작회의에서 제작진이 했던 발언, 자막을 엉뚱한 표현으로 고친 시점과 경위 등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폭로만 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군가가 그 방송의 오점들에 대해 철저히 분석할 수 있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주지하다시피 내게는 단순폭로의 사치가 주어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방송의 여러 부분들에 대해 근거를 들어 비판해야 했다. 내가 번역을 했다는 사실은 발언권을 준 계기였을 뿐, 발언 그리고 나아가 논증의 능력을 자동적으로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 누군가가 나처럼 일부 취재자료만을 근거로 주장을 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면 아마 아예 나서지도 않았거나, 나섰더라도 같은 결과를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자 매체와는 달리, 방송의 잘못에 대해서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해명이 항상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방송이라는 결과물과 상대의 해명 내용을 조각조각 내어 분석해야만 하는데, 상당히 집요하고 까다로운 성격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상대의 말이 나의 말과 극단적으로 다른 경우, 심적인 부담은 가중된다. 아무리 내 말을 대변하는 언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용이 빈약하면 버림을 받게 됨은 물론이다. 처음 내가 등장했을 때, 광우병 전문가 또는 방송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나는 설득력 면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손쉽게 펼칠 수 있는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로 알려진 사람에 대한 편견이 처음에는 많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내가 번역만을 담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주장하는 내용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근거를 들어 반박하지도 못하는 이들로부터 최소한의 존중을 받지 못한 적도 많았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정치적 쟁점을 들어 PD수첩을 감싸는 사람들은 있어도, PD수첩의 내용 자체를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옹호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는 거시적인 정치적, 역학적 관점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근 두 달이나 늦게 방송을 보고 곧이어 의도적 왜곡을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내가 보고 기억한 사실들을 새로이 찾아낸 사실들과 특정한 방식으로 조합하고, 내 평소 지식과 익힌 방법론을 일부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가 등장한 뒤로 이어진 제작진의 변명에 대한 분석 및 대처를 그때마다 새로이 하고, 각 이슈에 대한 접근방식과 표현방식을 전략적으로 결정하고, 필요한 부분들은 합리적으로 유추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역시 전략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여 애초의 편견을 깨고 많은 사람들에게(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PD수첩 사건은 그 사회적 파장이나 정치적 상징성과는 별개로, 개인 정지민의 고유한 특질(단순한 특성characteristic보다는 특이성idiosyncrasy)을 어느 정도 감안하지 않고는 이해가 어려운 유형의 사건이다. 따라서 나는 한국의 언론사를 학술적으로 연구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나 역시 평소에 개인의 특질이 특별히 중요한 변수가 되는 사건들을 연구할 때마다 그 개인에 의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했던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이유는 조금 더 사적인 것이다. PD수첩 사건을 통해, 공인이 아닌 나의 입장에서는 평소에 감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언론, 법,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내가 개인적으로 몸담고 있지도 않은 방송이라는 분야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본질적으로 특이한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한국에서 보낸 지난 11년의 세월 동안 보고 느꼈던 여러 비합리적인 현상들의 정점이자 일종의 복합적인 데자뷰였다. 직접 보고 겪은 한국사회의 일부 측면들로 미루어 보면 PD수첩 사건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PD수첩 사건을 나의 한국사회 경험이라는 보다 폭넓은 맥락 속에서 묘사하고자 하였다.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한 사람의 시각으로 솔직하게, 많은 것들에 대해 느낀 대로 썼다. PD수첩 사건 같은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평가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보니 이 책에는 국가나 민족에 대한 소위 자긍심이 남다른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내가 있는 대로의 생각을 표현한 이유는 감정을 배제하고 쓴 소리를 최대한 생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많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공감하여 해결책을 강구하건, 또는 공감하지 않건, 앞으로의 행보는 한국사회를 짊어지고 갈 그들의 몫이다.

PD수첩 사건과 관련해서 할 일을 다 하고 떠날 수 있는 시점에서 나는 아마 총 12년의 한국생활을 뒤로 하게 될 것이다. 내게 있어 사건의 마무리는 곧 한국 생활의 마무리이며, 따라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출간이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공인이 되거나 내가 원하는 연구를 한국에서 할 의지가 없다. 전문 분야가 서양사와 서양철학을 아우르기 때문에 욕심이 많은 사람으로서는 이곳에 머무를 수도 없고, 머물러서도 안 된다. 따라서 나는 사심 없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용을 기술할 수 있었다. 아마 한국 학계의 여러 특성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이 책을 본다면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곳에서 자리를 잘 잡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많이 담았기 때문이다.

책 출간의 다섯 번째 이유는 두 가지 의미에서 매뉴얼을 남길 필요를 느껴서이다. 첫째로 PD수첩 방송에 문제가 있음은 인식하되, 이미 드러난 많은 사실들과 논리적 공격 포인트를 모르고 토론에 임하는 사람들을 위한 매뉴얼이다. PD수첩의 내용을 아직도 애써 옹호하는 사람들의 경우, 사건을 제대로 아는 입장에서는 애당초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 반박만을 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온라인상의 토론자들보다도 적은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공식석상에서 토론을 하다가, 전혀 인정해줄 필요가 없는 부분들을 인정해주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실상은 알면서도 즉흥적으로 제기된 포인트에 대해 순발력 있게 대처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다 복습이 부족해서이다. 이는 정말 갑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디 사건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지 말고 이 책의 여러 내용을 참고했으면 좋겠다. 둘째로는 (물론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거대 단체나 언론에 맞서야 하는 개인에게 이 책이 일종의 상황대처 매뉴얼로 기능을 하기를 바란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전략적으로 주장을 펼쳐 왔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장의 내용이지만, 언론사를 상대로 하는 경우 타이밍과 표현방법이 결정적으로 중요할 때가 많다. 상대 언론사 이외의 다른 언론사를 활용하여 주장을 펴야 할 경우 더더욱 그렇다. 고려할 변수들, 미리 가정해야 하는 상황도 굉장히 많다. 아마 비슷한 상황에 놓인 개인, 물론 사실관계에 있어 우세한 입장인 개인이라면 내 글에서 약간이나마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담기 위해 노력한 것들과 별개로, 즉 책 저술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 책이 하나의 완성품으로서 가질 수 있는 여러 부차적 기능과 효과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쉽게 말해 일반적인 처세술에 대한 것이다. PD수첩 사건은 내가 상당히 거뜬하게, 큰 어려움이나 고민 없이 평소 다양한 상황과 관계에 대한 나의 대처방식을 본능적으로 활용한 사건이다. 이 책의 행간에는 단체와 대립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개인뿐 아니라 보다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 자신의 뜻을 강하게 관철시키되 필요한 상대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 사람이 참고할 만한 정보가 있을 것이다. 내게 최고로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방법, 상대에게 이끌려 다니지 않고 적정거리를 유지하는 방법, 어차피 적대관계가 되는 것이 불가피한 상대라면 효과적으로 공격하고 대신에 보다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 등이 있다. 이는 내가 책을 통해 특별히 전달하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나라는 개인의 특성들 때문에 자연스레 생기는 부차적 기능일 것이다.

책의 제목에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기둥을 뜻하는 주(柱)가 있는데 이는 T.E.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에서 얻은 모티브이다. 그의 실제 업적에 대한 복잡한 논란을 떠나, 그 저서에 기술된 대로의 사건은 앞서 언급한 개인의 특질이 사건 전개에 있어 주요변수로 작용하는 대표적인 경우이며, 그러한 점에서는 PD수첩 사건과 비슷하다. 반면 PD수첩 사건은 로렌스가 연루되었던 사건보다 사실관계 확인이 훨씬 쉽다. 따라서 만일 내가 한 일에 대한 평가가 로렌스의 업적에 대한 현세의 평가만큼이나 극단적으로 갈리게 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실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의견차에 기인할 것이다. 쉽게 확인이 가능한 사실들을, 이념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무시하는 경우는 항상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글 뜻을 풀 주(註)의 의미가 있는데, 근대 서구사회에서 종종 해설서(commentary)의 개념으로 출간을 하던 것에 착안했다. 그러한 저서들은 주로 특정 주제에 집중하지만, 동시에 연관된 많은 주제들에 대한 폭넓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저자의 특성을 살린 사족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 내 전문과 관련된 서적 이외의 것을 내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글을 쓰고 싶었고, 그것은 보고서나 일지가 아닌 해설서이다. 마지막으로 주의 세 번째 의미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가리키는 주(主)인데, 사건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임의로 잡은 일곱 가지 주제들 즉 각 장의 제목을 형용한다. 이 일곱 가지는 내가 매사에 자기점검을 할 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책 제목을 고안하면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주라는 음은 상기한 세 가지 의미 이외에도 내가 의도한 여러 가지를 굉장히 적합한 방식으로 표현해준다. 그러나 최소한 이 세 가지 의미를 동시에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지금까지 명시적으로 거론한 다섯 가지의 출간 동기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내가 굳이 말로 풀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의도를 대강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소 친구들과 대화하거나 개인 홈페이지에 글을 쓰던 스타일과 어감을 살려서 이 책을 기술했다. 이는 내가 그만큼 편안하게 저술했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내가 평소 한 자리에서 많은 화제들을 하나의 주제 하에 연속적으로 아우르는 대화를 선호하고, 그것을 책을 통해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관통하는 줄거리 자체는 PD수첩 사건의 전개를 따랐지만, 각 장의 주제에 관련된 내용들을 자유롭게 연결시켜서 썼다. 또한 어떤 주제를 논하든 인문학도로서 취하는 각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가끔 이론을 사용하고 싶은 충동에도 빠졌지만, 전문용어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최대한 피했다.
--- 머리말 중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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