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을 통해 옷의 관점에서 삶의 다양한 면모를 설명하고 싶었다. 즉, 한 벌의 옷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은 디테일이 그림 전체의 의미를 설명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촘촘하게 접힌 주름의 형태, 시접 처리, 소매의 형상, 단추의 소재, 비딱하게 쓴 모자의 각도, 직물 프린팅에는 모두 사람의 기억이 담겨 있다. 옷의 주름은 우리가 관절을 움직이며 지속적으로 생을 유지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기호다 _「책을 내며」에서(p.7)
모이니한이 그린 대처 수상의 초상화에서는 그녀의 명성과 인품, 무엇보다도 깐깐한 영국 여인의 개성과 풍모가 묻어난다. 1980년대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번영이라는 두 개의 코드로 움직인 시대였다. 사람들은 유럽 왕족 및 귀족들의 패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대처는 다이애너 황태자비와 더불어 1980년대의 대표적 패션 아이콘이었다. 1980년대는 자신의 지위와 권력, 전문성을 옷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는 파워 드레싱의 시대였다. 이런 가운데 대처의 의상은 여성미를 놓치지 않는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풍성한 소매의 회색빛 블라우스, 하이 네크라인, 우아하게 처리된 리본 장식과 프릴 칼라, 곱게 빗어 올린 금발머리 그리고 최고의 코디를 이루는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 이러한 여성적인 면모를 통해 그녀는 영국 정치의 심장부인 다우닝 가 10번지 직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연출했다. _「알파걸을 위한 패션」에서(pp.26~27)
퐁파두르 부인이 입고 있는 실크 드레스의 패턴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후 중국풍 패션이 인기를 끌면서 유럽에서 자체 생산하게 된다. 무늬가 새겨진 실크는 중국풍 디자인을 서구에 소개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고급 리넨에 수놓은 용과 개, 사자, 불사조 문양들은 중국풍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동양풍 텍스타일은 세기를 더해가면서 더욱 심미적 경향을 띠게 된다. 나아가 서양 복식이 동양풍 패턴과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서양 전통 패션에 중국풍이 자연스레 녹아들어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사실상 로코코 시대의 섬세하고 환상적인 여성미의 바탕에는 ‘동양’이라는 타자에 반응하는 서양의 방식이 숨어 있다. _「태평양을 건너간 중국의 매력」에서(p.58)
18세기 초 폼페이 발굴은 서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폼페이의 회화, 조각, 공예품이 당시 미술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고, 의상, 가구, 공예, 실내디자인, 심지어 여인의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프랑스혁명과 폼페이 발굴은 서로 맞물리며 혁명 세력을 위한 복식을 낳는다. 바로 엠파이어 스타일(empire style)이라 불리는 모슬린 드레스다. 이 옷은 살이 다 비치는 소재로 만들어졌고, 여성의 몸 선을 자유롭게 드러내며 행동의 편의성까지 제공했다. 이것은 순수하고 명쾌한 혁명정신을 표상하는 일종의 기호로서 등장했다. 당시 여성들은 ‘누가 가장 최소한으로 입을 수 있는가’를 두고 경쟁까지 벌였다고 한다. 잘 차려입는 것보다 ‘잘 벗은 것’이 미덕이 되어버린 셈이다. 사교모임에서는 여자들의 옷 무게를 재는 게임도 생겨났다. _「영원한 순수」에서(p.78)
빅토리아 시대의 상복은 여성과 남성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여성이 검은색 상복을 입지 않으면 망자에 대한 애정의 결여로 해석되었고,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격리 및 추방을 당했다. 이와 달리 남성이 상복을 착용하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검은색 비즈니스 슈트를 입었기 때문에 모자에 위드(weed)라는 상장(喪章)을 두르는 것으로 상복의 예절을 지켰다. 물론 그들에게도 검은색 슈트와 스카프, 장갑과 상장 착용은 의무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대는 남성들의 의무에 대해서는 조금 더 관대하여 여성에 대한 엄격한 제약과는 다른 이중 태도를 보여준다. _「살아남은 자를 위한 도덕」에서(pp.116~17)
17~18세기에는 부채를 통해 밀담을 나눌 수 있도록 암호화된 ‘부채 언어’가 생겨나고 이것을 배우기 위한 특별 학교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 여인들이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이 부채 언어는 스페인을 시작으로 유럽 귀족과 상류사회를 강타한다. 아바니코(abanico)라 불리는 스페인풍의 부채는 여인들의 열정과 숨겨진 욕망을 표현하는 매체가 된다. 부채를 통해 형성된 일종의 하위문화인 셈인데, 이런 문화를 여인들은 규방에서 어머니나 친구를 통해 반드시 익혀야 했다. 여인들에게 교태부리기는 일종의 미덕이고 기술이었다. 부채는 어떻게 보면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가 풀어야 하는 암호처럼, 여인의 은밀한 작업을 더욱 매력 있게 빛냈다. _「교태의 언어로 말하세요」에서(p.134)
존 헤더링턴이라는 잡화상 주인이 디자인한 톱 해트는 처음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사람들은 이 톱 해트를 보고 거의 패닉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길거리를 지나던 여인들은 기절을 하고 아이들은 고함을 지르고…… 결국 헤더링턴은 법정에 끌려가 ‘소심한 사람들을 겁주기 위한 큰 구조물’을 썼다는 이유로 벌금을 물어야 했다. 지금으로 치면 헛소동에 불과하지만, 그만큼 당시 톱 해트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귀족과 상류층의 이미지를 담보하는 아이템으로 발전했다. 남자들은 하루에도 두 번씩 혹은 그 이상 톱 해트를 갈아 썼는데, 진주 빛 나는 회색 톱 해트는 주간용, 검은색은 야간용으로 그 격식을 갖추어야 했다. _「모자가 사람을 만든다」에서(p.218)
옷이란 인간을 상수로 하는 사물이다.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생을 응시하고, 삶이란 무대 위에서 자신을 연출할지를 고민하며 옷을 입을 때 ‘패션’이 태어난다. 그림 속 여인들이 동일한 패션 아이템과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어도, 저마다 미세한 차이가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초상화 속 여인들의 몸은 다양하다. 얼굴형이 둥글거나 긴, 어깨가 넓거나 좁은, 목선과 손가락이 길고 짧은 여자들. 그들은 결코 하나로 수렴할 수 없는 다양한 몸을 가지고 있다. 옷을 통해 ‘장점’을 드러내고 ‘결점’은 은밀하게 감추며 다양한 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그림 속 여인들이 나는 고마웠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