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부터 힘겹게 진행된 대한민국 건국 및 국가건설의 세계사적인 키워드는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 즉 반공 투쟁의 살아 있는 역사다.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중국과 몽골, 인도차이나 반도를 휩쓸며 질풍노도처럼 밀려오는 공산주의의 거센 공격을 이승만은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여 온몸으로 막아냈다. 대한민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붉게 물들인 공산주의의 기세등등한 진격을 휴전선에서 막아냄으로써 세계사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통렬한 승리를 기록한 경이와 기적의 존재가 됐다.
오늘날 좌파들과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반공’이란 말만 나오면 집단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는 이유를 냉정하게 분석하면 해방 후부터 건국 초기의 혼란기에 한반도 전체를 손쉽게 공산화할 수 있었는데, 고집쟁이 영감(이승만)의 강력한 반공주의 때문에 실패했다는 자책감, 자괴감의 발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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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와의 싸움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의 이론적 기반과 승리의 비법을 보유한 이승만이기에 반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경찰과 군인, 관료들까지 총동원하고, 유엔을 움직이고, 적당히 휴전으로 미봉하고 떠나려는 미국의 뒷다리를 붙잡고 늘어져 공산군의 남침을 원천 봉쇄하는 한미동맹의 원대한 포석을 놓는 데 성공한다. 그 대가로 이승만이 미국에 제공한 것은 “우리는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종이 한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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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이론의 대가인 로버트 달을 비롯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1인당 국민소득 4,000~7,000달러 정도의 물적 기반, 잘 교육된 탄탄한 중산층, 그리고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민주시민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대한민국이 1인당 국민소득 4,000~7,000달러에 이른 시기는 전두환 정권 말기에서 노태우 정부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이 나라가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한 것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그전까지, 특히 건국 초기는 공산세력과 국가의 존망을 놓고 생존을 건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극한의 시기였다. 아직 국가로서의 기초가 취약한 최악의 혼란기에 국가 전복을 획책하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위해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 와중에, 즉 신생 국가가 망하든 말든 일제 출신 군인과 경찰관을 당연히 척결했어야 마땅하다는 좌파들의 철부지 주장은 치안과 안보를 총체적으로 취약하게 만듦으로써 남한이 공산화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소지가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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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공내전은 미군과 소련군의 대리전쟁 양상으로 전개됐다. 1946년 5월 팔로군이 장제스 군대에게 참패한 것은 미국의 지원 때문이라고 판단한 스탈린은 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박헌영에게 남한의 미군정을 상대로 난폭한 폭력 활동을 전개하도록 「신전술」 지령을 내린 것이다. 박헌영이 「신전술에 대한 지시서」를 발표하자 조선공산당은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행동지침을 내렸다.
“주로 우익 정당에게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우던 것을 미국으로 그 초점을 바꾸어 미군정을 ‘조선인민을 노예화하기 위해 미국이 설치한 기관’으로 공격해야 한다. 그리하여 장래에 미소공위 지연의 책임을 단지 우익 인물들뿐 아니라 미국 대표 측의 국제적 반동 전략 역시 나눠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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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은 1947년경부터 박헌영 이하 대부분의 수뇌급 간부들이 월북했는데, 그중 극소수의 인원이 평양 정권에 참여했을 뿐 대다수는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당의 중추부가 북으로 이동하여 북로당에 합류된 상태였다. 그들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식객 취급을 받아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해주에 집결하여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남로당이 북한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남한 내에서 ‘주목할 만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김점곤은 남로당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전쟁을 결심하도록 하기 위해 이에 호응할 수 있는 자신들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이 남한에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북로당 권력층에게 보여주기 위해 남한에서 무력투쟁을 벌이라고 지시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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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 지도부가 월북하면서 자신들의 지지기반이었던 남한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지도부를 상실한 남로당은 소멸 시기가 언제냐의 문제만 남은 상황이었다. 남로당은 조직 재건을 위해, 그리고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빨치산 투쟁 역량을 축적하기 위해 평양 근처의 강동정치학원에서 빨치산 간부를 양성하여 군사적 대결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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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사건 여파로 숙군작업이 계속되어 1949년 7월에 일단 종료되었는데, 이 시기까지 총 4,749명의 장교와 하사관, 사병들이 사형·유기징역·불명예제대 등의 처벌을 받았다. 또 숙군 조사 과정에서 체포 위험이 닥치자 군 내부의 남로당원 및 좌익 적색분자 5,568명이 탈영했다. 군 총병력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1만 317명이 좌익 공산세력이거나 그와 관련이 있는 세력이었다는 뜻이다.
좌익 공산세력을 솎아낸 자리는 훈련된 우익 청년들과 월남한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원들이 입대하여 메웠다. 1948년 12월 20일 서북청년회 위원 200명이 대전 제2여단에 입대했고, 대동청년단원 4,000명이 경찰에 들어갔다. 국군은 청년단들로부터 병사들을 충원 받아 1949년 3월 현재 6만 9,000명으로 증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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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반공국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반공을 위한 강력한 의지는 1948년 12월 1일, 법률 제10호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12월 20일 공포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국가보안법은 반란의 단계에 이르지 않더라도 반란을 꾀하는 단체의 구성이나 이적 행위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14연대 반란사건으로 공산 반군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뜨겁게 체험한 이승만 정부가 비상시에 위험을 사전 제거하기 위한 예방적 조치가 가능하도록 한 특별형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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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연대 반란사건 참여자들은 대한민국의 국민 되기를 거부하고 조선인민공화국에 충성하며, 무상몰수·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대한민국 법령을 인정하지 않고, 정권을 부정했으며, 공산주의를 해야 한다고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었으니 이승만 정부에겐 ‘내부의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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