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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과 젊은 그들

: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 개정판 ]
리뷰 총점9.4 리뷰 27건 | 판매지수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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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개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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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09년 12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60쪽 | 620g | 153*224*30mm
ISBN13 9788993119121
ISBN10 899311912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조국의 독립과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동지들, 그 100년의 기억.


『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조선 최고 명문가 출신이나, 기득권을 유지하기보다는 조국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을 택했던 우당 이회영과 그 동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책에서는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치밀한 추적과 객관적 자료들을 통해 평생 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활동을 통해 당시 독립운동의 모습을 살필 수 있게 한다.

이회영은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전념한다. 책에서는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과 망명 후 그의 활동,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한 모습, 어떻게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 등의 내용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또, 저자는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참고 견뎌내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생하게 전하며, 이를 통해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족한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의 글

1. 왕조의 마지막 두 풍경
이완용의 밀사 이인직/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으나/떠나는 사람들 /횡도촌, 망명자들의 촌락

2. 일가 망명
망국을 막기 위해/헤이그 밀사사건/북풍 부는 만주로

3. 독립군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모든 것을 버리고 만주로 떠나다/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작위와 은사금에 환호하는 집권 노론/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4. 고종이 망명한다면
밀입국을 단행하다/고종 망명이 갖는 폭발성

5.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임시정부를 둘러싼 파문/독립운동가들의 단골 거처/임시정부도 사회주의도 버리고

6. 아나키즘의 깃발
양명학과 아나키즘/아나키즘으로

7. 의열단과 다물단
의열단의 직접행동과 유자명/조선총독부 폭파와 다나카 대장 암살사건/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다물단의 밀정암살이 준 충격

8. 극도의 곤경 속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발족하다/극심한 자금난/일제의 체포를 피해 수만 리를 걷다

9. 만주운동의 새바람
김좌진과 연합하다/일본 조계지의 은행을 털다/자유연합적 지방자치에 대한 반발

10. 1930년대, 상해의 풍경
일제를 공포에 빠뜨린 아나키즘 조직들/백정기와 윤봉길의 엇갈린 운명

11. 무장투쟁의 길과 순국
무장투쟁의 길로/운명의 만주행/밀고자들

12. 망명자들의 최후
만주로 간 선비들/신채호의 순국

13. 남은 동지들
죽기 위해 제비를 뽑는 사람들/공포의 서간단/재일 거류민단장 사살사건/일제가 점령한 상해에서/무장투쟁으로 최후의 승리를/미완의 과업/되살아나는 역사

이회영 가계도
이회영 연보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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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의 생애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의 실천이라는 말로는 그 의미를 전달하기가 부족하다. 이회영의 만주행은 국망 직후 집단 망명한 것과 같은 또 다른 승부수였다. 22년 전(1910년) 온몸을 던져 일제와 대결했던 것처럼 다시 일제와 대결하겠다는 신념의 표출이었다. 온몸을 던지지 않고서 어찌 일제를 구축驅逐하고 인간해방과 광복을 실현하겠느냐는 신념의 실천이었다. 만 65세 노인이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상해 황포강 부두에서 영국 선적의 남창호南昌號 제일 밑바닥 4등 선실에 자리를 잡는 광경에 어찌 비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비장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뛰어넘는 진정한 인간의 길인 것이다. --- p.8, 「저자의 글」 중에서

한일합병 조약체결 소식을 듣고 매천 황현이 고향 구례에서 목숨을 끊던 1910년 8월 하순, 이회영은 북쪽으로 향했다. 이동녕과 장유순 그리고 이관직李觀稙(1882~1972년)이 함께 하고 있었다. 종이장수 차림인 이들은 다락령(659미터)을 통해 강남산맥을 넘어 초산진에 다다랐고, 초산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이제 남은 길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뿐이었다. 나라를 되찾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군사를 길러 일본군을 내쫓는 길과 교육으로 후세를 길러 독립하는 길이었다. 양자택일의 방법이 아니라 양자결합의 길을 택해야 했다. 군사를 기르는 것은 지금의 급선무이고 교육은 미래를 위한 준비였다. 무장투쟁과 교육사업은 우당 이회영이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실천한 이념이 되었다. --- p.54, 「2. 일가 망명」 중에서

이회영은 북경의 자금성 북쪽 후고루원後鼓樓園의 한 가옥을 빌려 살았는데, 이곳은 곧 수많은 독립운동가들로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되었다. 북경에 온 독립운동가들은 일단 이회영의 거처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북경에서 이회영과 함께 지낸 아들 이규창은 “그 당시 국내에서 맘을 품은 인물, 즉 청년들은 중국 북경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뵙게 되고 대체로 우리 집에 거주하게 된다”고 회상했다. 북경의 이회영 거처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한번씩은 거쳐 가는 필수 코스였던 것이다. --- p.115, 「5.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중에서

“나는 자유연합이 독립운동의 견지에서 가장 적절한 이론이라고 본다. 사실 모든 운동가들의 사상이 무엇이든 간에 실제로는 무정부주의의의 자유연합 이론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거다. 3·1운동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숱한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 모든 단체와 조직은 단원 자신들의 자유의사에 의해 결성된 것이지 강제적 명령에 맹종하여 결성된 것이 아니다. 강철의 조직이라고 부르는 공산당도 적색赤色 러시아처럼 정권을 잡은 후에 강제와 복종의 규율이 생긴 것이지 그들 역시 그 전에는 운동가들의 자유합의에 의해서 행동했던 것이다.” --- p.143, 「6. 아나키즘의 깃발」 중에서

상해에서 발행되던『한민韓民』1936년 5월 25일자는「서간도 초기 이주와 신흥학교 시대 회상기」라는 글을 게재했는데, 이회영 일가가 안동현을 거쳐 삼원보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는 과정에 대해 서술했다. 이 글의 ‘이석영의 공功’이란 소항목에서는 이석영이 수많은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모두 쏟아 붓고도 “나중에는 지극히 곤란한 생활을 하면서도 일호의 원성이나 후회의 개식이 없고 태연하여 장자長者의 풍이 있었다”고 전했다. 또한 이석영이 2년 전(1934년) 상해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면서 그의 부인도 1936년 5월 11일 상해의 조카 집에서 유명을 달리했다고 전한다. 그뿐만 아니라 셋째 이철영은 1925년에 이미 사망했으며, 여섯째 이호영은 1933년에, 첫째 이건영도 194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섯째 이시영을 제외한 다섯 형제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 p.281, 「12. 망명자들의 최후」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조국의 독립과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동지들, 그 100년의 기억!
1910년 8월 22일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한 일제는 그해 10월 7일 대한제국이 망하는 데 큰 공을 세운 76명의 조선인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려주었다. 일본 귀족과 유사한 공·후·백·자·남의 작위를 수여해 귀족으로 임명하고 은사금도 주어 작위에 걸맞은 경제생활을 하도록 보장한 것이다. 비록 군사력으로 영토를 점령했다고 해도 이들 매국 사대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제가 그리 순조롭게 대한제국을 병탄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이른바「한일병합조약문韓日倂合條約文」제5조에는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勳功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恩級을 부여한다”고 명기해놓기도 했다. 수작자授爵者들 대부분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국망國亡의 위기를 맞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는커녕 오히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데 적극 협력했던 것이다. 이렇게 매국 수작자들이 일제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지 두 달 후,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을 무릅쓰고 만주로 떠나는 40여 명의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우당 이회영과 그 형제 일가였다.

최근 역사의아침에서 펴낸『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펼치며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민족해방을 위해 바친 이회영과 여러 동지들에 관한 글이다. 이 책에서는 세칭 삼한갑족三韓甲族(예로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불린 명문대가 출신인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과 망명 후 그의 활동은 물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한 모습, 어떻게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참고 견뎌내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뿐만 아니라 엄형순,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백정기, 김대락, 오면직, 김종진, 유림 등의 아나키스트들에게 사상적 구심점이 되어주고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모습과 당시 중국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재조명했다. 조국의 독립과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몸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동지들의 일생은 현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우당 이회영.『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개정판 출간!
한일합병 조약체결 소식을 듣고 매천 황현이 고향 구례에서 목숨을 끊던 1910년 8월 하순, 이회영은 이동녕과 장유순 그리고 이관직과 함께 북쪽으로 향했다.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 설립의 적지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한 달 남짓 남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귀국했다.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전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자고 하며 “이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형님들과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고 설득했다. 여섯 형제는 모두 가산을 정리했는데, 급하게 팔다 보니 제값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회영 형제 일가가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약 40만 원의 거금이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 정도였는데, 이를 2000년대 쌀값으로 단순 계산하더라도 약 600억 원이나 된다. 이회영은 여섯 형제 중 넷째인데, 위로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이시영과 이호영이 있었다. 가문 배경으로 보면 그 누구보다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을 것 같으나 이회영을 비롯한 형제들은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평생 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회영을 재조명한『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2001년 웅진닷컴에서 펴낸『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개정한 것이다. 전작에서는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아나키즘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기술한 반면, 개정증보판『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는 이회영의 아나키스트적 색채보다는 그가 아나키즘을 사상적 바탕으로 어떻게 독립운동을 위한 기초를 다졌으며, 여러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는지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당시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생생한 컬러사진 50여 컷을 새로 넣었으며, 최근 발표된 자료를 근거로 이회영이 대련 수상경찰서 유치장이 아닌 여순감옥에서 고문사당했다는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헤이그 밀사파견을 주도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른바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온 1905년. 이회영의 집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활약하는 이동녕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의논 끝에 조약 체결을 막기 위한 여러 방책을 세웠으나 일제의 방해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조병세와 민영환이 자결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이상설도 자결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상설과 이회영은 새로운 운동방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상설은 만주 용정촌으로 망명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서전서숙을 열었다. 1907년 4월 3일 이상설은 이동녕, 정순만과 함께 용정촌을 떠났다. 혼춘에 학교를 하나 더 세우겠다는 것이 명목이었다. 그러나 이상설의 목적지는 혼춘이 아니었다. 그가 가려는 곳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였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은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헤이그로 향했는데, 이 헤이그 밀사사건의 배경에도 이회영이 있었다. 당시 일제는 궁내 곳곳에 일본의 간자를 심어두고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나 이회영은 대신 조정구와 내관 안호형을 통해 고종에게 밀사파견을 주청했다. 고종은 헐버트에게 신임장을 전달했고, 이회영은 헐버트에게 신임장을 받아 비밀연락망을 통해 간도에 있는 이상설에게 전했던 것이다. 헤이그 밀사사건은 알려진 대로 구체적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고,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고종의 국외 망명을 추진하다!
국내에 남아 독립운동을 벌이던 이회영은 1910년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집단 망명했는데, 1913년경 그곳을 떠나야 했다. 일제가 이회영을 비롯해 이시영, 이동녕, 장유순, 금형선 등을 체포 또는 암살하기 위해 형사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이회영은 일제의 허를 찌르기 위해 국내로 밀입국을 단행했고, 고종을 국외로 망명시키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방안을 찾아냈다. 아들 이규학의 신부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규학은 1917년 어머니 이은숙과 함께 국내로 왔다. 이회영이 5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자 이회영을 찾아 귀국했던 것이다. 신부례 상대인 조계진은 조대비의 친족이자 고종의 조카딸이었다. 이미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1918년 11월에 신부례를 올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고종의 망명계획에는 이회영·이시영 형제와 이득년, 홍증식, 민영달, 조완구 등이 가담했다. 이회영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을 통해 의사를 타진하자 고종은 선뜻 국외 망명계획을 승낙했다. 고종이 국외 망명을 결심하던 1918년 말, 10년에 가까운 일본의 무단통치는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고종이 개전조칙을 내리면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전 민족적 결전의 날이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자금이 마련되고 행궁까지 준비되어 구체화되어 가던 고종의 망명계획은 의외의 사태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당사자인 고종이 예기치 못하게 급서한 것이다. 이회영은 고종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조국을 떠났다. 두 번째 망명이었다.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 교육기관을 설치하다!
이회영이 중국으로 망명한 목적은 항일무장투쟁과 교육입국을 위한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으로 나라를 되찾고, 되찾은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한 교육이 이회영이 평생에 걸쳐 실천한 삶이었다. 1911년 이회영과 이동녕, 이상룡 등 집단 망명가들은 대고산 아래에 이주 동포들의 안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자치기관으로 경학사를 조직했고, 서둘러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들이 고구려의 옛 고토를 찾은 이유는 광복군을 양성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이회영과 이동녕 등은 현지 중국인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강습소 개교식을 강행했으나 현지 중국인들의 비협조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 이름을 강습소라 한 이유도 중국인들의 의혹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런데 이회영은 당시 누가 보더라도 무모한 일이었지만 중국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나 담판을 짓고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12년 6월 합니하에 새로운 교사를 완성하고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열었다. 정신적으로는 국사관으로 무장하고, 육체적으로는 군사훈련으로 무장한 독립전사를 배출하는 곳이 신흥무관학교였다. 이철영, 이동녕, 이상룡, 여준, 이광 등이 교장을 역임한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12월 김연, 변영태, 이규봉, 성주식 등 40여 명의 청년들을 특기생으로 배출한 것을 비롯해 1919년 11월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중국은 물론 국내에서 벌어진 수많은 항일무장투쟁의 현장에서 주축으로 활약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벗이 되어 사상적 기틀을 제공하다!
우리나라에서 아나키즘은 독립운동의 한 형태로 수용되었다. 귀족 출신의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개인적 성향 외에도 아나키즘이 독립운동 이론으로나 해방 후의 정부 수립 이론으로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회영의 아나키즘 이론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리를 실천해나가면서도 공산주의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빠지지 않고 개인과 사회의 자유를 확장할 수 있는 현실적 방책이었다.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확정지은 때는 1923년 9월로, 이회영은 이미 57세로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회영은 여러 청년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즘이란 사상이 자신의 평소 지론과 맞다고 생각을 굳힌 뒤 아나키스트를 자처한 것이다. 이회영은 천진에서 살던 1927년 김종진이 방문하자 토론 끝에 그를 아나키스트로 전향시킬 정도로 단단한 이론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젊은 아나키스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회영과 북경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조직적 운동을 전개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1924년 4월 말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무련)을 조직했다. 그들은「정의공보」를 발행해 자신들의 운동노선을 천명했는데, 이회영이 극도의 궁핍 속에서도 그 발행자금을 부담했다. 후일 이회영과 젊은 아나키스트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남화연맹)이라는 아나키즘 조직을 건설해 상해의 일인들과 친일 주구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만주사변 발발과 때를 맞추어 결성된 남화연맹은 무련의 산하 기관으로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정화암, 이강훈, 엄순봉, 오면직, 김동우, 김광주, 나월환, 이용준, 박기성, 원심창, 김광주, 이규창 등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는 이회영을 의장에 추대했으나 이회영은 한사코 거절했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다!
중국으로 망명한 뒤 이회영은 상해와 천진을 오가며 의열단, 다물단, 흑색공포단, 남화한인청년연맹 등을 조직하고 일제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기관을 공격하는 등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던 중 1932년 윤봉길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최고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해 여러 명을 암살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한인들의 항일의지를 세계에 과시한 쾌거였다. 그렇지만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은 물러가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공간은 더 좁아졌다. 이회영은 여러 동지들과 중국의 아나키스트들과 상의한 후 상해를 떠나 만주를 새로운 운동무대로 삼으려 했다. 만주로 가서 중국 당취오 부대와 연계해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천황 등을 제거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해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1932년 11월 초, 이회영은 상해의 황포강 부두에서 영국 선적인 남창호에 올랐다. 허름한 중국옷을 입은 이회영이 자리 잡은 곳은 제일 밑바닥인 4등 선실이었다. 이회영은 흔들리는 남창호 밑바닥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1910년 망명한 때로부터 만 22년의 장구한 세월을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살아온 이회영은 그간 숱한 고초를 겪었지만 이제 새로운 투쟁의 역사가 열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회영은 일제 밀정의 밀고로 대련 부두에서 체포되어 여순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여순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이회영은 마침내 1932년 11월 17일 고문사하고 말았다. 일제는 고문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회영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하고 이회영의 딸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이회영은 고문받는 동안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항거였고, 젊은 동지들을 지키기 위한 칠순 노인의 외로운 투쟁이었다. 이렇듯 이회영은 여순감옥에서 인간해방, 민족해방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바쳤다. 삼한갑족의 후예로 태어나 전 재산과 생애, 목숨까지 인간해방, 민족해방에 바친 것이다.

이회영에 대한 동료들의 회고!
“우당 형제들은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여섯 형제의 절의는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독립운동가)

“우당 집에서 밥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 금산錦山 유석현劉錫鉉(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은 1931년 해마다 여러 차례 동북의 화인, 신빈, 통화, 해룡, 유하 등 한국인이 많은 곳에 오셔서 독립운동을 지도하셨다. 신분은 점쟁이, 상인으로 가장해 다녔고, 학교를 세우고 자금을 지원하셨다.” - 김소묵金小?(동북의용군 대원)

“집 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놓기도 했고, 남의 집 종들에게는 터무니없게도 경어를 썼다. 당시의 양반들이나 판서의 집안으로서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당치 않은 짓’이었다.” - 권오돈權五惇(다물단 단원)

“쌀이 없어 종일 밥을 못 짓고 밤이 다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 아버님께서 시장하실 텐데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셨는지 처량하게 퉁소를 부셨다. 하도 처량하여 눈물이 저절로 난다며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밥을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이런 처참한 광경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이규창(이회영의 아들)

“민족주의 태내胎內에서의 무정부주의의 성장, 그 사상적 성숙, ? 투쟁단계 그리고 전시戰時의 전투체제로 전환 등의 과정을 우리는 우당이란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읽어낼 수 있다. 우당의 최후는 이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장렬한 산화였다.” - 하기락(아나키즘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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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이회영과 젊은 그들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YES마니아 : 플래티넘 스타블로거 : 골드스타 | 2022.08.14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 글은 이런 집단 기획 망명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인 우당 이회영과 여러 동지들에 관한 내용이다. 이 책을 쓴 필자는 이회영의 신분과 망명 후 그의 사상적 궤적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회영은 세칭 삼한갑족으로 불린 명문대가 출신이다. 그러나 국망의 위기가 닥치자 집단 망명을 결심하고 일가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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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 글은 이런 집단 기획 망명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인

우당 이회영과 여러 동지들에 관한 내용이다.

이 책을 쓴 필자는 이회영의 신분과 망명 후

그의 사상적 궤적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회영은 세칭 삼한갑족으로 불린 명문대가 출신이다.

그러나 국망의 위기가 닥치자 집단 망명을 결심하고

일가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아나키즘(자유연합주의)를 받아들이고

이러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투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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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2019.06.15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노블레스 오블리주   - 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역사의 아침, 2009      이회영이 전 재산을 팔아가면서 만주로 망명을 떠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님께서 서평 쓰기 추천 도서 목록을 나누어 주셨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 왔던 책이 바로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었다. 평소에 설민석 선생님의 역사 강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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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

 

- 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역사의 아침, 2009

 

 

 

이회영이 전 재산을 팔아가면서 만주로 망명을 떠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님께서 서평 쓰기 추천 도서 목록을 나누어 주셨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 왔던 책이 바로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었다. 평소에 설민석 선생님의 역사 강의를 즐겨 들었던 지라 이회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갔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는 표지에 신문의 형식으로 그 당시의 독립 운동가들의 사진과 글이 실려 있어서 너무 근엄하고 함부로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오히려 그래서 나의 흥미를 더 자극했던 것 같다. 독립 운동가들의 비장한 표정 때문에. 제목을 보았을 때는 왜 젊은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지 의문이었다. 그 당시 이회영은 환갑을 넘긴 노인이었고, 그럼 주변에는 나이가 다 비슷한 사람들일 텐데 왜 그렇게 표현 했는지 궁금해서 빨리 책을 읽어보고 싶은 지경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역사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 시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 시대 때 나라를 빼앗긴 국민들을 대신하여 앞장서서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 까지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의 이야기를 잊고 싶지 않아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이회영이라는 독립운동가도 자연스레 알 게 되었다. 이회영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여럿 있는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앞장서신 분이니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표지와 간단한 줄거리는 나에게 책을 읽게 해줄 동기를 부여해주는데 충분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이회영에 대해 어떤 점을 더 알 게 되고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써 보려고 한다.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되는 비극

 

“2천만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입니까? 6천만 일본인과 함께 나아갈 것입니까 

p.24

이 말은 친일파인 이인직이 이완용에게 조선을 넘기기 전 물어본 말이다. 솔직히 처음에 이 문장을 읽고 나서 일본인이 말한 줄 알고 다시 읽어 보았더니 같은 조선인이 한 말이어서 너무 충격적이었다. 조선이 일본에게 넘어 가는 과정에서 많은 친일파 세력이 일본을 도왔다. 그 중에서도 이인직과 이완용 등 을사오적 등이 주요 인물이다. 이인직의 이러한 물음에 이완용은“5적 또는 7족이라고 불릴 정도인 현 내각이 와해된다면 현 내각 이상의 친일파 내각이 새로 구성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통심할 일이라며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친일 경쟁자 송병준이 성가셨던 총리대신 이완용의 고민은 두 가지 뿐 이였다. 망국 이후 고종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와 자신들에 대한 처우는 어떨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비뚤어져 있으면 역사관도 비뚤어지기 마련이다. 이인직은 민족 내부의 왕조 교체를 이민족의 침략과 같은 선상에 놓고 합리화한 것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라까지 팔아먹어야 했을까. 팔아먹고 나서 죄책감을 느끼기는 했을까. 과연 그는 진정한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이 맞을까. 이인직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너무 부끄럽고 같은 국민으로써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나라를 팔아먹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아무리 자기의 이익이 중요하더라도 나라를 팔아먹으면서까지 일본의 앞잡이가 되는 일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인직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는 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 화가 났다. 누구나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나라를 팔아먹지는 않는다.

 

 

목숨 걸고 지킨 것

 

 

극형 이상의 형벌이라도 사양하지 않는다.”

p.167

 

이 책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인 김익상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김익상은 폭탄 두 개를 가슴에 품은 채 북경을 떠나 만주로 향한다. 의열단원들은 떠나는 그를 위해 송별시를 읊어주었지만 그는 일주일이면 돌아올 것이다며 단원들을 안심시키며 길을 떠난다. 폭탄 한 개는 사타구니에 차고, 다른 한 개는 가방 밑바닥에 감춘 채 봉천에서 기차에 올랐다. 국경 근처에 가까워지자 검문이 심해졌지만,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어린아이를 데리고 여행 중인 일본 여인 옆으로 자리를 옮긴 후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자연스레 말을 건다. 이로 인해 경찰들과 밀정들이 이들을 일본인 부부로 여겼기 때문에 무사히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태원에 사는 동생 김준상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일찍 전기회사 공원으로 가장하고 조선 총독부를 찾아 간다. 김익상은 2층에 총독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2층으로 올라갔지만 2층에는 총독실이란 문패가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회계과의 문을 열어 폭탄을 하나 던지고, 그 옆인 비서과에도 하나 던졌다. 첫 번째 것은 불발이었으나 두 번째 것이 커대한 폭음과 함께 터지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그는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위험하다, 위험해! 올라가면 안 된다!”라고 소리치며 조선총독부를 빠져나온다. 그러곤 지금의 을지로인 황금정에서 들고 있던 공구를 모두 버리고 일본인 가게에서 일본 목수들이 입는 옷을 한 벌 사서 전차를 탄다. 일제 경찰은 삼엄한 경비와 수색작전을 펼쳤으나 결국 그를 찾지 못한다. 김익상은 평양에서 신의주로, 신의주에서 안동과 봉천을 거쳐 북경에 무사히 도착한다. 그가 말한 대로 딱 일주일 만에 돌아왔던 셈이다. 당연히 죽었으리 라고만 생각했던 그가 돌아오자 의열단원들도 모두 깜짝 놀라고 만다. 그 반면, 일제는 경악한다. 자칫하여 무력투쟁의 물꼬가 터지면 이상주의적인 한국의 민족성 탓에 너도나도 폭탄을 들고 덤빌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의열단의 도전에 겁을 먹은 일제는 폭탄테러에는 인명 살상 여부를 따지지 않고 사형으로 대응한다.“극형 이상의 형벌이라도 사양하지 않는다.”사형이 구형되자 김익상이 한 말이다. 116일 사형을 선고받은 김익상은 상고 기간인 9일 오후 8시까지 상고하지 않았다. 굳이 일본 법정에 동정을 구해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운이 좋게도 은사라는 것이 있어 1942년 만기 출소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하루는 일본 형사가 잠시 가자며 그를 데려갔으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폭탄을 던지며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에 맞서는 모습을 보며 과연 내가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도 그처럼 자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에 맞설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 희생과 노력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목숨을 바쳐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실제로 그 상황이 닥쳐오면 내 목숨을 바치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난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난 뒤로부터 항상 일제 강점기 같은 시기가 다시 오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에 대하여 많이 생각을 해보았다. 이 책을 읽기 전엔 생각이 좀처럼 확고해지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도 내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독립 운동에 대해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친구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며칠 전까진 그랬으니깐. 국민이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노력을 할까? 아무도 노력하지 않는다면 평생 그 나라의 식민지로 살아야하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평화주의자란

 

목적이 수단과 방법을 규정짓는 것이지 수단과 방법이 목적을 규정할 수 없다는 확고한 견지에서 볼 때 한 민족의 독립운동이란 그 민족의 해방과 자유의 탈환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확고한 자각과 목적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 하는 독립운동은 운동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운동가들의 자유합의가 있을 뿐이니 이것은 이론으로도 당연한 것이다.”

p.144

 

이회영은 천진에 살던 때에 김종진이 방문하자 토론 끝에 그를 아니키스트로 전향시킬 정도로 단단한 이론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 말은 극도의 빈곤 속에서도 좌절하기는커녕 확신에 가득 차 있었던 이회영이 김종진에게 한 말 중 하나이다. 이 말을 들은 김종진은 운동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는 이회영의 말에 독립운동의 과정 그 자체도 결과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족함 없이 부유하게 자랐다. 가난이라곤 꿈도 꿀 수 없었던 그가 어째서 전 재산을 팔아가면서까지 나라를 위해 희생하려고 했을까?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온 1905. 이회영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방한 목적을 짐작한 그들은 대책을 세우기 위해 모인 것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이 그 때 나온 대책 중 하나이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은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헤이그로 향한다. 물론 이 사건의 기획자는 이회영이다. 눈치 빠른 일본이 이미 만국 평화 회의에 가담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 사람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 이상설을 만나고 귀국한 이회영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통해 외국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독립운동 방안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학교를 건립해 2세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해 무력으로 일본군을 축출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헤이그 특사 실패 후 국외에 독립기지마련을 위해 191012 여섯 형제와 가족, 노비 40여명의 일가족 전체가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이 때 여섯 형제가 전 재산 약 600억 원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다.

이 후 이회영은 신채호, 이을규, 이정규 등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무정부주의운동, 즉 아나키스트 운동을 전개한다. 김종진은 이회영의 아나키즘 이론이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리를 실천해나가면서도 공산주의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빠지지 않고 개인과 사회의 자유를 확장할 수 있는 현실적 방책임을 깨닫게 된다. 이회영은 공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도 결코 남을 억압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남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공의가 실현되는 진정한 평화사회를 위해 싸우는 평화주이자 이다. 이회영의 삶을 책 한 권으로 읽어보니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는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그 시대에 태어나 꼭 한 번은 만나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현재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아마 몇 명은 있을 지도 모른다. 아직 위급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아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 뿐. 분명히 때가 되면 나타날 것이다. 나도 그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살면서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사회에 더 많이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회영의 생애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라는 말로는 그 의미를 전달하기가 부족하다. 환각을 넘긴 노인이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목숨을 바치는 광경에서 느낀 비장함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뛰어넘는 진정한 인간의 길인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망국 직전과 비슷할 정도로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족하다. 국회청문회의 청문대상이 될 정도로 성공한 인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병역 비리,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등에 연루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지위와 재산은 물론 생명까지 모두 신념을 위해 바친 이회영의 생애를 살펴보면 우리의 삶도 되돌아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국민들 모두, 살면서 한 번쯤은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읽는 것이 좋다. 우리 모두 이 책을 읽고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깨달아야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게 위해서는 지배층의 어떤 노력이 필요한 지를 깨달아야한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었다. 누구보다 먼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나라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풍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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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평* | 2015.01.19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인간완성 종결자 고 이회영 선생님과 항일운동 동지들의 삶을 다시 살아 숨쉬는 것 처럼 책을 써주신 이덕일 작가님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올린다.    항일운동가 일대기 중 읽은 것이라곤 초등 위인전집이 전부인 나로서는 이렇게 생생하고 감동적인 항일운동 책은 처음 접해본다. 그저 교과서에 나온 인물들 이름.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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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완성 종결자 고 이회영 선생님과 항일운동 동지들의 삶을 다시 살아 숨쉬는 것 처럼 책을 써주신 이덕일 작가님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올린다.  

 항일운동가 일대기 중 읽은 것이라곤 초등 위인전집이 전부인 나로서는 이렇게 생생하고 감동적인 항일운동 책은 처음 접해본다. 그저 교과서에 나온 인물들 이름. 연도 외우기가 전부였기에 인간으로서 겪은 가난. 배신. 사랑. 희망. 용기 속에서 끝까지 존엄성을 지키며 어떠한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던 멋진 인간의 삶을 접하고는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였다.

 불과 몇 십년 전 만주와 중국에서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최하층 빈민가에서 추위에 떨면서 이불은 전당포에 맡겨 냉방에서 웅크리고 자고 차비가 없어 먼 길을 걸어다니면서 감시의 눈을 피해 무장독립투쟁을 하는 열혈지사들의 이야기는 안란함에 나태해진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쉽게 빠져드는 권력욕과 증오심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 자체가 위협으로 여겨져 핍박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슬픈 이야기들이였다. 옆에서 보면 처참하고 슬픈데 정작 본인들은 그 곳에서 희망을 안고 따뜻하고 의연한 삶을 살아간다. 그저 배고픔과 혈육을 잃은 슬픔을 동지들의 의리와 퉁소 한자락 불기과 난초 치기를 하며 견뎌간다. 그리고 계속 무장 투쟁을 한다. 원수와 배신자를 처단하고 잃은 아이를 대신해 또다시 아이를 낳고 교육시키고 결혼시키고 가난해서 헤어진 부인과 편지를 주고 받는다. 배신자에 의해 잡혀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동지와 가족들이 계속 그 뜻을 이어나간다. 민족.공산 이데올로기가 아닌 선한 마음을 가진 평등한 자유인으로 응당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뜻을 전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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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6건) 한줄평 총점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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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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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플래티넘 | 2022.08.14
구매 평점5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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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로얄 r**e | 2022.03.15
구매 평점5점
아들과 읽으려 구매했네요 역사를 알아야 자아를 찾을수 있다란 생각으로
1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1
m*****3 |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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