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는 이 두 사람의 여성을 등장시키면서 가족제도하에서 겪는 여성의 고통을 표현하고 비판했다. 보옥은 “여자의 몸은 물로 만들어져 있고 남자는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등의 말로써 여성 존중을 강조하고 있다. 『홍루몽』은 남존여비사회에서 여성을 존중하는 입장으로 여성의 세계를 묘사한 최초의 소설이라고 불린다. --- p.42
전족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여성의 특이한 풍속이었다. 3~4세의 철없는 때부터 여자아이의 발을 심하게 조여 매어 성장하지 못하게 하고, 발끝을 가늘게 조여 붙여서 소위 ‘삼촌금련(三寸金蓮: 약 10cm)’이라고 불리는 크기로 제한시켜 이것을 ‘미(美)’라고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고통 때문에 울부짖고 피륙(皮肉)이 썩어 문드러지며 선혈이 낭자했다. 밤에는 잠을 잘 수도 없고 음식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갖가지 질병이 이것 때문에 생겨났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성장해도 움직임이 느려져서 몸에 위험이 닥쳐도 달아날 수 없게 된다. (중략) 전족의 근절은 100년에 걸친 끈질기고도 강한 운동을 요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pp.45~48
혁명참가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회검(懷劍)을 손에 쥐고 남장을 했던 추근의 모습이 상징하듯이 신해혁명기 여성운동에서는 여성이 스스로의 여성성을 부정하고 남성화를 지향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었다. 또한 여성을 혁명에 동원할 필요성이나 여성의 지위향상이 주장되었지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반청혁명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였으며, 결코 순수하게 여성 자신의 해방이나 권리 획득이 목표가 되지는 않았다. --- p.70
5·4운동이 시작되자 우리들은 곧바로 호응하여 우리 학교는 그 지방 데모의 선두에 섰다. [중략] 다시 구국18인단을 조직하고 의식衣食을 절약하여 구국을 위해 기부했다. 또한 상인들에게 파업을 하도록 요구하고, 상점으로 가서 일본 제품의 유무를 조사하여 발견될 경우 군중 앞에서 불태워버렸으며, 일본 제품을 사지 않게끔 상인들에게 울면서 당부했다. 「호남 도원桃源여자제일사범학교의 5·4운동기 애국운동」왕일지, --- p.108
1926년 1월 16일에는 「여성운동 결의안」이 국민당 제2회 전국대표대회(二全大會)에서 채택되었다. 이 결의안은 제1회 대회의 선언에서 보여준 남녀평등원칙을 구체화한 것으로서, 부녀부가 추진해온 여성운동의 방침―여성을 국민혁명에 참가시키고 더불어 여성 자신의 해방에도 힘을 기울인다― 이 명시되었다. 또한 이 ‘결의안’에는 남녀평등, 결혼의 자유, 남녀 동일 임금, 여성의 재산상속권을 정하는 법률 제정, 인신매매 금지, 여자교육의 향상 등 구체적인 항목이 상정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민족 전체의 해방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여성의 해방도 달성될 수 없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어서 국민혁명의 성공이 여성운동보다 우선시되었다. --- p.120
정치에서 ‘인민’의 의미에는 당연히 남녀 양성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남자에 한했던 민주정치는 결코 순수한 민주정치가 아니다. ‘인민’이란 명칭은 남자만의 호칭이 아니고 남녀를 포함한 인민 전체를 총칭하는 것이다. 인민 전체가 정치에 참여하는 권리를 가진 민주주의만이 참된 민주주의이다. [중략] 「북경여권운동동맹회 선언」1922년 8월, --- p.
여성들은 재빨리 전선으로 향하여 북벌군의 격려활동이나 후방지원 활동에 참가했으며 그 모습은 당시 신문 등에 수없이 보도되었다. 더욱이 북벌의 진전과 함께 여자북벌구호선전대나 북벌공작단 등이 조직되어 구호, 선전, 위로활동을 했다. 또한 1926년 말에 국민정부가 광동에서 무한으로 천도하면서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武漢分校)가 개설되자 처음으로 여학생을 받아들여서 정규의 군사교육이 행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수험생이 모여들어 거의 200명의 여성이 합격했고, 훈련을 받은 후 전선에도 배속되었다. --- pp.148~149
최초로 여성이 중국 공장에 고용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20세기 초 강남의 면방직 공장에서 여성이 노동했던 사실은 확인된다. 천진이나 청도 등 중국 북부에 있는 방적공업 중심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남성노동자를 고용한 공장이 운영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가 되자 드디어 남성노동자에서 여성노동자로 노동력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 p.165
1938년 상해 공동조계의 통계에서 중국인 여성의 직업별 인원수를 보면 ‘상업’에 4,150명, 은행·금융·보험업에 102명, 의사, 변호사, 신문기자, 회계사 등의 전문직에 1,467명, 정부 및 시정기관 직원이 81명, 서기, 속기사 등이 58명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 p.171
1930년대의 여성은 다양한 패션을 즐겼다. 스커트의 길이, 구두 굽의 높이, 액세서리, 두발 형태 등을 개인의 생냈 스타일에 맞게 선택하고 자유로이 변화시킬 수 있었다. 전족을 하지 않고 ‘치파오’를 입거나 짧은 웃옷에 바지를 맞추어서 경쾌한 복장을 갖추어 입고, 화장을 하고, 반지나 액세서리 외에 부채나 장갑 등에도 신경을 쓰는 여성들의 장식은 가정주부의 자태로서도, 직장여성의 모습으로서도 사람들의 선망이 되었다. --- p.193
1920년대 말이 되면 ‘독자적인 사회적 직책을 양성하고 그 특수한 필요성에 적응시킨다’는 목표로 중등여자교육이 단독으로 결정되었다. 1935년 국민당 제5기 전국대표자대회의 선언에는 ‘체력, 지식 양면이 건전한 모성을 육성하여 종족 쇠망의 위기를 구하고 국가나 사회의 견실한 기초를 만든다’는 내용이 넘쳐흘렀다. 보수진영은 세력을 얻고 여성해방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1935년 4월 북평 시장은 남녀공학 단속안을 의회에 제출하고 공학 폐지를 실행했다. 교육계뿐 아니라 1933년 북평시정부는 경비 절감을 이유로 여자직원을 전원 해고했고, 광주의 이발사대회에서는 남성의 직장 확보를 위해 여성이발사를 배제했다. 강소성 송강에서는 30세 이하의 과부를 전절당(全節堂)에 모여 살게 하는 등 사회 풍조가 여성해방과는 반대로 나아갔다. --- p.206
‘43년 결정’은 일면으로 중국여성이 사회적 노동에 참가하여 경제적 자립을 얻도록 도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 경제적 자립 측면에서만 여성해방이 달성되었을 뿐 다른 여성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면을 실종시켰고, 여성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목소리를 ‘원망’이라고 단죄하고 여성운동을 당에 복종함을 강제한다고 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이후에도 오랜 기간 문제가 되었다. --- p.256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있었던 중국은 문화적 쇄국 상태에 있었으며 1949년 혁명에 의해 여성해방=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는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에 의념(疑念)을 품을 여지가 없었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1980년대, 동시대의 세계 사상이 한꺼번에 유입되는 가운데 여성해방의 선진국이라 자부하던 중국여성들 가운데서도 스스로의 문제를 재고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 pp.317~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