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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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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3월 29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48쪽 | 130*188*30mm
ISBN13 9791161110011
ISBN10 116111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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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담배를 피우고 안 그래도 흐릿한 방안 공기를 더 탁하게 만들면서 모닝 씨의 목을 바라보았다. 달처럼 희었다. 내가 와줘서 기쁘다고 한 마디 하더니 모닝 씨는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별다른 거리낌도 없이 말간 눈길로 내 전신을 훑었다. 음란한 눈길인지 그저 호기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습격을 당한 기분이 들어 나는 고개를 돌렸고, 이름을 묻는 그에게 거짓말로 대답을 했다. 순식간에 아무 망설임도 없이 새 성을 꾸며냈던 것이다. 데이비드슨이라고. 그렇게 해서 나는 아이리스 데이비드슨이 되었다. 방어 행위였다. 무정형의 위험에서 자기방어를 하는 나 나름의 방식이었다. --- p.14

“속삭임이 본질적으로 중요합니다. 온전한 인간의 발성은 지나치게 개성이 강해 그 자체의 역사가 너무 뚜렷하게 도드라지거든요. 전 익명성을 추구하고 있어요. 그래야 사물의 순수성이 막힘없이 새어나와 벌거벗은 정체를 드러내거든요. 속삭임에는 특징이 없어요.” --- p.20

조지는 자기가 내 욕망을 조작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감질 나는 자극을 받았다. 그게 나는 두려웠다. 역겨운 건 이 음흉한 관계에 내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고 내 동기도 순수하지 않았다. 조지는 천리안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말하지 않은 내 안의 무언가를 찌르는 법을 알았고, 나 역시 그가 흥분에 상기된 얼굴로 내 쪽을 보던 바로 그 순간 그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걸 틀림없이 느꼈다. --- p.83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평범함이라는 얘기를 하는 거야. 나 자신을 따분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처럼 진부한 삶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야. 허심탄회한 대화, 치졸한 고백들, 열정이 아니라 버릇 같은 관계들. 사방에 그런 사람들이 보이는데 정말이지 끔찍하게 싫어서, 그런 역겨운 삶으로 끌려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과 결별해야 하는 거라고.” --- p.119

무겁고 축축한 시체와 내 몸을 덮친 쭈글쭈글한 노파, 내 입속에 들어왔던 혀가 소스라쳐 발작할 흔적을 남겼지만, 맞서 싸울 힘이 내게는 없었다. 편두통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점점 자라나 머리 전체를 채우고 두개골을 확장하는 느낌이었다. 나한테 머리밖에 없는 것 같았다. 쓸모없는 팔다리 네 개가 달린 여자 험프티 덤프티였다. 게다가 걱정이 많았다. 하루 종일 걱정하고 밤에도 또 걱정을 했다. 내 머리가, 내 시험이, O 부인이, 곧 있을 스티븐의 병문안이 걱정스러웠고 또 걱정을 하는 내가 걱정스러웠다. 불안이 통증에 먹이를 주어 키웠지만 어떻게 멈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p.159

“고마워요, 베건 학생.” 교수가 말했다. “화요일 수업에서 봅시다.” 나는 그토록 탐내던 세미나에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았다. 헤겔?마르크스 그리고 19세기 소설이었다. 로즈 교수는 쉰 살을 한참 넘은 나이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학계의 스타 교수 특유의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 위치의 남자들이 흔히 걸리는 병, 즉 학생들에 대한 경멸이라는 고질병에 독하게 걸린 눈치였다. 나 또한 그를 별 것 아닌 인간으로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놀라운 지성 운운하는 풍문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만남은 묘하게 육감적인 잔상을 남겼다. 틀림없이 목소리 때문이었다. --- p.176

내게 클라우스는 끝까지 젊은 남자였다. 나를 클라우스로 아는 사람들은 한 번도 남자로 봐주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세상에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 - 즉, 내가 여자라는 사실 - 과 내 마음속으로 꿈꾸었던 이상의 괴리에 그렇게 마음이 쓰이지는 않았다. 밤에 클라우스가 됨으로써 나는 효과적으로 젠더의 경계를 흐렸다. 양복에 바짝 깎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이 나라는 인간에 대한 세상의 관점을 바꾸었고 나는 그 시선을 통해 다른 사람이 되었다. --- p.253

날 무너뜨린 게 끝내 보내지 않은 편지였는지 그저 그 목소리였는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씰룩이고 입가가 떨려왔다. 전자든 후자든 몇 개월에 걸쳐 바닥까지 고갈된 자기연민에 불을 댕기고야 말았다. 좋은 시절에 나는 자주 울고 쉽게 눈물도 흘린다. 하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눈물샘은 말라버리고 엉엉 우는 일은 정말 거의 없어진다. 그때 내가 느꼈던 참담함은 비탄이었다. 예전의 내 자아를, 교수가 떠나는 모습을 보았던 그 여자애를 되찾고 싶었지만 이미 죽고 없었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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