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풀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의식의 행위(무의지적 기억, 예시적 투사 등)에 의해 발견되거나 주어진 어떤 동일성의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상이한 시간의 층이 병존하는 현상을 숙고하도록 가르쳐준다. 프루스트 소설의 독특함은 그러한 직접적 경험 대신 전망과 회고 사이를 움직이는 가운데 자리매김될 것이다. 이렇게 변주되는 운동은 독서라는 행위를 닮아 있다. 혹은 서사적 망의 복합성뿐만 아니라 모든 문장의 복합성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강박하는 재독(再讀)의 행위를 닮아 있다. 더욱이 풀레가 기술하듯 ‘삶’에서 글쓰기로 이행하는 과정을 표하는 순간은 독서 행위에 상응한다. 독서 행위는 분화되지 않은 사실과 사건의 덩어리로부터 텍스트를 구성할 때 감지할 수 있는 뚜렷한 요소를 분리해내는 것이다. 이는 생략, 전환 그리고 강조의 과정을 통해 일어나며 비판적 이해의 실재와 아주 가까운 유사성을 지닌다. 독서와 비평의 친연적 관계는 현대 문학 연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독서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작품의 주인공 마르셀이 소설을 읽는 행위를 보여주는 대목을 읽으며, 나는 이 질문에 가능한 한 문자 그대로 그리고 사실상 단순하게 접근해볼 것이다. 〔……〕 엄밀히 말해서 문제는 한 문학 텍스트가 그것이 기술하고 재현하거나 진술하는 것에 관한about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읽는 것이 한없이 요원함에도 만일 읽혀진read 의미가 진술된stated 의미와 합치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사실상 실제적인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마르셀을 우리의 모범으로 채택하여 이 이상적인 완전성에 접근하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독서가 정말 문제적이라면, 진술된 의미와 그 이해 사이의 불일치가 의심스럽다면 말 그대로 독서를 재현하는 소설 속의 대목이 선호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곳, 즉 성애, 정치, 의학, 세속과 관련한 마르셀의 경험에서 독서의 변별적인 구조를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순환되는 난점에도, 설사 단지 그 대목이 독서 자체에 대한 범례적 요청을 하는 것이지 아닌 것인지를 알기 위한 것일 뿐이라 하더라도, 실제 독서에 관한 대목을 탐구하는 작업이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제 그러한지와 관련된 이러한 불확실성은 불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이후에 나오는 알베르틴과 마르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히 보여주듯 해석적 담론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생산한다. 독서는 문자 그대로의 것과 의혹 사이의 이러한 불안정한 혼합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pp.88-89)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이해했다”라는 표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전체 소설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은 전통적으로 이 ‘이후’를 문학적이고 미적인 소명이 완수되는 순간으로 해석해왔다. 그 순간 경험에서 글쓰기로 화자 마르셀과 저자 프루스트의 합치 속에 이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알레고리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저자에게는 독서 불가능한 형상인 화자 마르셀과 저자 프루스트 사이의 매개할 수 없는 차이는 화자 마르셀이 이 ‘이후’를 자신의 과거 속에 자리매김하여 완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화자인 마르셀은 저자 프루스트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할 때만큼 그 저자와 많이 동떨어지게 되는 때는 없는 것이다. “죽기 전에 진리를 만난 사람은 행복하다. 설사 죽음이 가까울지라도 진리의 시간을 알리는 괘종이 죽음의 시간 이전에 울린 사람은 행복하다.” 저자로서 프루스트는 죽음의 시간처럼 진리의 시간이 결코 제때에 도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엄밀히 진리가 스스로와 합치하지 못하는 무능함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의미가 사라지는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그 자체의 의미가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 pp.114-115
『비극의 탄생』에서 발생론적 유형의 해체는 니체 해석이라는 특수한 영역뿐만 아니라 역사 서술과 기호학의 영역에서도 후속적 귀결이 없지 않다. 『비극의 탄생』과 같이 서사적이고 일관성 있는 텍스트들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단편처럼 불연속적이고 아포리즘적인 정식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니체 저작의 반복되는 구조 원리로 드러난다. 역사 서술의 관점에서 발생론적 서사가 그 발생론적 연속성이 뿌리를 두던 요청을 파괴하는 통찰로 나아가는 일보(一步)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은 교훈적이다. 물론 잘못된 추론이 전개될 수 없었다면, 그러한 연속성은 정식화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역사의식의 발생론을 형성하는 낭만주의에 대한 착란적 해석을 이해하려는 데 범례적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비극의 탄생』에서 역사 속의 발생론적 운동과 언어 속의 기호학적 관계 사이에 작동하고 있는 유비를 고려하면, 수사학적인 자의식을 가진 독서는 문학 언어의 범례로서 메타포가 가진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발생론적 모델이 무엇보다 하나의 수사학적 신비화의 예라면, 그리고 메타포의 형상적 의미와 원래 의미 사이의 관계가 이 텍스트에서처럼 발생론 용어로 구상된다면, 메타포는 맹목의 메토니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의 소리 중심적 이론, 자아의 범비극적 의식과 역사의 발생론적 비전을 『비극의 탄생』 속에 그렇게 탁월하게 형상화한 가치의 총괄적 설정은 새로운 아이러니의 명료한 빛 아래서 공허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 pp.144-145
『나르시스』는 여러 주체 사이의 관계 속에 작동하면서 자아의 형상 구조를 드러냈다. 다른 한편, 『피그말리온』은 메타포로서의 자아와 이 메타포의 재현으로서의 자아, 하이데거의 말로 “재현의 형식적 구조” 사이에 놓여 있는 더 복합적인 관계를 재현한다. 이 재현의 형식적 구조는 미적 판단으로서의 판단에 대한 칸트의 비판에서 주된 관심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수사학적 의식의 이 층위에서 ‘거인’과 ‘초상화’ 같은 이전의 메타포는 확장되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아 개념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아의 ‘자기’ 관심적인 운동이 심지어 가장 숭고하거나 가장 엄격한 경우에 부정되고 난 후에도 남는 것이다. 그런 수준의 담론에조차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루소는 거절한다. 그러한 담론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전개가 모든 단계에서 통제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는 형상 언어의 진리 담론을 자아의 진리 담론으로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진리와 거짓의 관점에서 보면 자아는 루소에게서 특권적 지위를 가진 메타포가 아니다. 이는 루소의 『말제브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백일몽』에 이르기까지 자서전적 텍스트들이 어떻게 독서되어야 할지에 대해 명백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pp.254-255
우리가 출발한 소박한 역사적 질문은?「신앙 고백」은 이신론적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가??답변할 수 없는 것으로 남을 그 텍스트는 그렇게 가정되는 것처럼 이신론적 문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물론 그 텍스트는 그것이 공표하는 것으로 보이는 신념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러한 신념이 필수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숙고하면서 종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 신념을 착란적인 것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신앙 고백」과 같은 텍스트는 극단적으로 서로 배척하는 일련의 주장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자 그대로 ‘독서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중립적인 확인도 아니다. 그것들은 순수한 언명으로부터 행동으로의 이행을 요구하는 설득적인 수행성을 가진다. 그러한 주장은 어떤 선택의 토대를 파괴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그것들은 사려 깊을 수도 정당할 수도 없는 어떤 공정한 판단의 알레고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클라이스트가 쓴 희곡의 예처럼 판결은 그 판결이 비난하는 범죄를 반복한다. 「신앙 고백」을 독서한 후에 만일 우리가 ‘이신론’으로 개종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낀다면, 우리는 지성의 법정에서 어리석다는 판결을 받고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그 신념(여기에 가능한 모든 우상 숭배와 이데올로기 형식이 포함되어야 한다)이 계몽된 정신에 의해 한 번 그리고 영구히 극복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우상의 황혼에 그러한 계몽 정신 자체가 바로 그 극복의 최초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더 어리석어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독서 불가능성을 너무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 pp.332-333
이상의 우리 독서의 요점은 결론적인 난점이 존재론적이거나 해석학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백록』에서 마리옹의 일화를 통해 분명히 밝혀진 것처럼 비유적인(이원적이거나 삼원적인) 대체 유형의 해체는 이해 가능성의 전제를 의문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유적 대체를 장악하는 일을 이해의 목표로 만듦으로써 이 전제를 강화하는 담론 속에도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기획은 형상의 알레고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자체의 서사를 생성한다. 이 서사는 단지 이 (부정적) 인식이 담론의 수행적 기능을 예견할 수 있게 하는 데 실패하고, 그에 상응하여 언어 모델이 단순한 비유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날 때 흔들리기 시작한다. 수행의 수사학과 인식의 수사학, 그리고 비유의 수사학은 한데 수렴되지 않는다. 대체의 연쇄는 다른 상이한 구조를 지닌 체계와 변별적으로 기능하는데, 이 체계는 지시적 규정성에 의지하지 않으며 문법처럼 전적으로 반복 가능하고 전적으로 임의적인 것이다. 이 두 체계 간의 상호교착은 우리가 『고백록』의 대목에서 아나콜루톤이라고 한 형상적 연쇄의 장애로 어떤 텍스트 안에 자리 잡을 수 있다. 그것은 재현 수사학의 용어로 파라바시스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이는 두 개의 수사적 코드 사이의 불일치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을 지칭한다. 이 개별적인 텍스트적 사건은 「네번째 백일몽」을 읽었을 때 나타나듯 텍스트 전체에 걸쳐 산재해 있고, 아나콜루톤은 모든 형상이나 알레고리로 확장된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표현을 약간 넓혀보자면, 그것은 알레고리(혹은 형상)의 영구한 파라바시스, 즉 아이러니가 된다. 아이러니는 더 이상 어떤 비유가 아니고, 모든 비유적 인식의 해체적 알레고리를 무화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체계적으로 이해를 무화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아이러니는 비유적 체계의 완결과는 전혀 무관하게, 오히려 비유적 착란의 반복을 강화한다.
--- pp.404-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