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단추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 p.11
수채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 한다 색
을 흐린다는 것은 나를 지울 줄 안다는 것이다 뭉쳐진 색
을 풀어 얼마쯤 흐리멍텅, 해질 줄 안다는 것이다
퇴근 무렵 망원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맞은편 건
물 벽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간다 어디선가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다 바깥으로 뿜어대던 열기를 삼키며 제 색
을 조금씩 허물고 있는 모양이다 삘딩으로 뒤덮인 거리,
둘러봐도 해는 보이지 않는데 지는 해가 분단장을 하듯
붕어빵집 아주머니의 볼과 생선비늘 묻은 전대를 차고
끄떡끄떡 졸고 있는 아낙의 이마에 머물렀다 간다 남루
하디남루한 시장 한 귀퉁이에 지상에 없는 빛깔이 잠시
깔리는 시간
바람이 구름을 몰고 성미산 너머 북한산 쪽으로 간다
한강에서 날아오른 물새 두엇이 물풀 냄새를 끼치며 선
교사 묘지 위로 날아간다
버스가 오기 전 둘 데 없는 눈으로 나는 바닥에 구르는
모래알을 보고, 모래와 모래가 등을 부비는 사이의 반짝
임, 흩어지면 사라지는 틈을 보고, 여위면서 바래가는 가
로수빛을 우두커니 바라보는데
깨어진 구두코에 내린 어둠을 구두약처럼 슬슬 문질러
대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오
는 아내와 시래기 마르는 처마 아래서 나물을 다듬는 어
머니의 집 간난도 설움도 불빛 하나로 단촐해진 지붕을
찾아가리라
저를 얼마쯤은 놓칠 줄 안다는 것 묽디묽은 풍경 속에
서 멈칫, 흐릿해질 줄 안다는 것 색을 흐린다는 것은 그러
니 나를 아주 지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를 아주 지우
지는 못하고 물끄러미, 다만 물끄러미 놓쳐본다는 것이다
--- p.24
나무의 수사학 1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 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 먹는다는 것
도로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 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 p.44
나무의 수사학 2
식육점 간판을 가리다
잘려 나간 가지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흘러갈 곳을 잃어버린 수액이
전기 톱날 자국 끝에 맺혀 떨고 있는 한때
나무에게 남아 있는 고통이 있다면 이제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수로를 잃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의 그
아찔하던 순간도 잠시
빈 소매를 펄럭이듯,
팔 없는 소맷자락 주머니에 넣고 불쑥
한 손을 내밀듯
초록에 묻혀 있는 나무
환지통을 앓는 건 어쩌면
나무가 아니라 새다
허공 속에 아직도
실핏줄이 흐르고 있다는 듯
내려앉지 못하고 날갯짓
날갯짓만 하다 돌아가는,
--- p.46
동백 사원
동백이 무슨 쇠종이라도 된다는 듯이 눈보라가 꽃망울
을 치고 간다 겹겹이 뭉친 망울 속엔 동박새 울음이 들었
고, 가지를 쥐고 흔들던 시월의 서리 묻은 바람이 들었고,
한 방울 머릿기름을 얻기 위해 눈보라 속을 걸어오던 발
소리가 들었다
묵언에 든 동백을 찾아 기억에도 없는 무슨 인연인가에
이끌려 땅끝까지 내달려온 길 둘 데 없는 마음은 미황사
처마처럼 벌어지는 꽃송이와 함께 얼어붙은 대기라도 살
짝 밀어젖혀보고 싶은데
멀리 꽃향기를 날리는 대신 다리에 쇳덩이 추를 달고
떨어지는 독한 것, 동백은 죽어 제 그늘 위에서 다시 피어
나는 꽃이다 산문을 닫아건 채 자신의 중심을 물들이며
추락하는 저 얼얼한 꽃빛이 땅땅 쇠종 소리를 낸다
--- p.85
새의 부족
새들의 노래로 지도를 만드는 부족이 있었다지
새들의 방언에 따라 국경선과 도계를 긋고 살았다는
사라진 부족의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더라
아마도 새들은 모든 뻣뻣한 경계선을 수시로 넘나들었을 거야
수백 킬로쯤 끌고 온 국경선을 강물에 풍덩 빠뜨리고
산정에서 끝난 도계를
노을 지는 지평선까지 끌고 가 잇기도 했을 테지
그런 선들이 악보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끝없이 출렁이는, 새로 그려지는
풍경들은 아마 음표를 닮아 있었겠지
악보를 읽는 일이 지도를 보는 일과 같았을 때
그들의 귓속으론 별자리가 흘러들었을 거야
어느 부족의 방울새는 도라지멍울이나 개암열매가 터지듯이 울고
어느 부족의 방울새는 나뭇잎에 빗방울 부딪는 소리를 내며 울다가
수면 위로 막 뛰어오른 물고기 비늘이
햇빛과 부딪칠 때의 순간처럼 반짝였겠지
노래의 장단과 고저를 따라 해발이 시작되고
강의 시원과 하구를 측량하던 그때
측량할 수 없음을 측량하던 그때
저 부신 부리 끝 좀 봐, 나침반처럼
사라진 지도의 한쪽을 콕 찍으며 날아가는
---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