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여행을 하며 일상생활에서와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파리 숙소 부엌에서 서툰 솜씨로 저녁식사를 준비하거나, 베네치아의 골목골목을 서울 우리집 동네 돌아다니듯 거닐 때, 하루에도 격차가 큰 런던 날씨에 당황하지 않고 살포시 내리는 비쯤은 그냥저냥 맞고 다니며, 서울 포장마차에서 새빨간 떡볶이를 콕콕 찍어 먹듯 호치민 노점상에 털썩 주저앉아 쌀국수 면발을 후루룩 먹고 나서 주인아줌마가 권하는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 않는 요거트를 디저트 삼아 푹푹 떠먹을 때 여행은 낯설고 물선 것이 아닌 그저 일상이 되어준다.
--- pp.60~61 ‘일상 같은 여행, 여행 같은 일상’ 중에서
알려진 이름만큼 볼 건 없고 사람만 많다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온 터라 정동진을 향한 발걸음에는 기대감이 전혀 없었다. 바다를 좋아해서 갔던 거지, 산이었다면 그런 소릴 듣고 갔을 리 없다. 물은 언제나 옳다. 바다는 최고다! 정동진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알았다. 실수했구나. 눈으로 보기 전에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을 잊고 있었다. 큰 실수임이 분명했다. 바다 내음에 설풋 생경한 멋이 느껴졌다. 폐철로였다. 바다 앞에 남겨진 폐철로. 바다와 철길, 얼마나 낭만적인 조합이고 특별한 어울림이었는지. 정동진에 대해 그동안 들어온 많은 진부한 증언들을 바닷바람에 날려 보냈음은 물론이다.
--- p.82 ‘기찻길 마법’ 중에서
그곳의 특별한 점은 앞으로 더욱 많은 스타일과 문화가 복합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성당은 가우디가 남긴 미완의 흔적으로, 적어도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야 완성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사람, 한 시대가 완성하는 건축물이 아닌 것이다. 기본 설계를 가우디의 디자인에 의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많은 시간이 더해지며 다른 세대 작가들의 개성과 스타일이 더해질 게 아닌가. 국가와 문화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움직임과 미래를 가진 게 바로 그곳의 특별한 점이다. 아마 나는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하겠지만, 몇 년 후 다시 찾을 성당은 지금과는 분명 다른 모습일 것이다. 양식·문화적 실험과 가능성을 가진 성당의 미래가 무척 기대된다.
--- p.123 ‘그의 도시’ 중에서
녹차라떼에 요지야 캐릭터인 여인을 다소곳히 그려준다. 청아한 미가 인상적이지만 역시 좀 무섭다. 무서운 얼굴을 마시기가 좀 거북하고, 이 얼굴을 어디서부터 없애야 하나 주저하고 있으니, 동료가 입부터 없애라는 무서운 제안을 했다. 동료 말대로 입 부분부터 마시니 여인의 모습은 더욱 무서워졌지만, 부드러운 스팀밀크와 쌉싸름한 녹차 맛이 어우러져 혀끝에 닿는 식감이 좋고, 온몸이 따뜻해져왔다. 편안한 행복감이 깊게 밀려들었다. 철학의 길에 들어설 때만 해도 기대하지 못했던 감정이다. 역시 공간은 그 자체보다, 무언가 이야기가 담길 때 매력적이다. 눈이라는 이야기가 담긴 공간에서 뜻밖에 행복했다.
--- p.172 ‘눈 내리는 길과 라떼아트’ 중에서
상해 여행의 마지막, 수향마을의 아름다운 야경과 함께할 수 있어 만족스러운 밤이다. 유독 물을 좋아하다가 물의 도시에 빠졌고, 물의 도시를 따라 서울에서 상해까지 갑작스러운 여행을 온 터였다. 주자자오, 치바오 그리고 항저우까지 물 위의 마을을 몇 곳이나 경험했으니 목표를 이룬 여행이었다. 그런데도 다른 수향마을까지 가보고 싶은 욕심이 여전한 걸 보면, 물 위의 마을을 찾는 여정은 그리 멀지 않은 날 다시 이어질 것 같다.
--- p.178 ‘다시 찾은 물 위의 마을’ 중에서
교토로 오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유 없이 바빴었는데, 그 생활과 마음상태가 이상스레 느껴졌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그렇게 살았을까, 진부한 후회를 했다. 마음과 머리에 여유가 없으니 나를 볼 때나 다른 이를 대할 때나 날이 서 있었다. 사람과 삶을 대하는 데 기다려줌이 없
었고 관대하지 못했다.
나지막한 바람만 오가는 사찰 안, 간간히 바람이 스치는 풍경소리만 들린다. 가득 차있던 마음과 머리를 비웠다. 다시 채워질 게 분명하지만 비워진 기억만으로도 가끔 여유와 평온을 얻기에 충분할지 모른다.
--- p.240 ‘여백과 정적’ 중에서
딱 부러지는 이유 없이 힘든 일상의 나날이 있다. 그런 피로와 어려움이 한계를 넘어설 때면 난 작은 사치로 나 자신을 달래곤 한다.
갖고 싶었던 귀걸이를 사거나 참고 있던 고칼로리의 매운 음식을 먹으며, 소중한 이와 미뤄왔던 약속과 만남으로 나를 위로한다. 나를 위한 작은 대접을 받은 뒤에는 무슨 일이건 분명 전보다 나아져 있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지만, 한동안 어렵고 힘들었던 일들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씩씩한 모습을 되찾고, 꽤 견딜 만해진다.
‘대접’ 중에서
--- p. 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