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은 아직 꿈이 많다. 아니 그럴 나이다. 어떨 때는 쉴 새 없이 노래를 부르고, 어떨 때는 게임에 빠져 정신없이 그것만 하는 영락없는 그 또래 아이다. ‘가면라이더’에 반하면 자면서까지 잠꼬대를 해대고, ‘스파이더맨’에 꽂히면 종일 스파이더맨 놀이만 한다. 아빠인 나에게 벽을 타고 다닐 수 있게 해달라며 얼마나 졸라댔는지 모른다.
우리 아들은 그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듯 지독한 개구쟁이다. 40점짜리 수학 시험지를 들고 와서는 성적이 조금 올랐다면서 당당하게 말하는 녀석, 자기보다 못하는 친구 한두 명을 거론하며 자기 점수를 인정해달라는 녀석…. 내가 어렸을 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내 아들은 당당하다.
마이클 조던의 농구를 보며 나도 그렇게 되겠다며 미친 듯이 농구연습을 했던 학창시절….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가 꼭 나인 것 같아 만화책을 보고 또 봤던 그 시절에 나는 아들을 낳는다면 반드시 함께 농구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184센티미터인 나보다 키가 훌쩍 커서 내 슛을 마음껏 막아내는 아들의 모습은 이제 마음속에서만 간직해야 한다. 의학보고서에 따르면 내 아들에게는 길어야 5~7년의 시간만 남아 있다. 100센티미터가 겨우 넘는, 앙상한 팔다리로 구부정하게 걷는, 손발톱조차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아이, 대한민국 5000만 인구 중 단 한명만 앓는 희귀질환을 가진 아이가 바로 내 아들 홍원기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아이들의 성탄 선물을 준비하면서 만약 산타클로스가 있다면 나도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원기는 한 번도 머리카락이 수북하게 난 적이 없다. 원기에게 가발이 아닌 진짜 머리카락을 주셨으면 좋겠다. 그것도 아주 많이. 원기가 성탄절 아침에 자기 머리에 엄청나게 많은 머리카락이 있는 걸 발견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말을 할까.
“아빠, 이것 봐! 산타할아버지가 내 머리에 머리카락을 이만큼 심어주고 가셨어. 대박이야, 대박!”
녀석은 분명 이렇게 소리 지를 것이다. 얼마나 좋아할까. 얼마나 신기하고 자랑스러워할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까. 그때까지 원기는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산타클로스를 믿는 믿음」중에서
예약한 날이 되어 원기를 데리고 춘천의 한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담당 선생님은 원기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하셨다. 원기의 서 있는 사진과 양손 그리고 머리 부분을 주로 찍으셨다.
“일주일 뒤에 다시 오셔야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만 말씀하셨다. 불안했지만 분명 원기를 하나님께서 건강한 아이로 자라게 해주실 것이고, 문제가 있다면 치료하면 된다고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일주일은 금세 지나갔다. 원기와 아내와 함께 다시 병원을 찾았다. 선생님은 매우 담담하고 차분하게 우리에게 말씀해주셨다. 원기가 소아조로증을 앓고 있다고. 그리고 좀더 세부적인 검사를 위해 입원해야 한다고. 충격적이었던 건 처음 원기를 봤을 때부터 소아조로증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고, 다만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사진을 여러 장찍어 분석했다는 것이다.
내 아들 원기가 우리나라에 단 한 명뿐인, 그래서 이름조차 생소한 소아조로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도 모르게 울먹이며 의사 선생님께 말했다. 아니, 중얼거렸다.
“그랬군요. 그랬군요. 어쩐지 뭔가 이상했어요. 그래서 원기가 머리카락이 안 났군요….”
늘 원기에게서 느껴졌던 이상한 그 무언가의 실체를 결국 알게 된 것이다. 원기에 대한 그 찜찜한 느낌은 역시 틀린 게 아니었다.
---「원기와의 1박 2일」중에서
원기와 이 세상에서 시간을 공유하는 동안 꼭 듣고 싶은 말이 있다.
“아빠, 아빠가 있어서 정말 재밌었어. 아빠 덕분에 신났어요. 고마워요, 아빠.”
원기에게 그런 아빠로 기억되고 싶다.
---「원기에게 듣고 싶은 말」중에서
주말 이후 원기의 그녀는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나중에 원기에게 ‘친구로서 네가 좋다’는 말만 해주었다고 한다. 원기의 대형 사고는 그녀의 거절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아내와 내가 원기의 이 용감한 행동을 걱정한 건 혹시나 원기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아이나 학부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에게는 원기가 특별하고 소중한 아이지만, 다른 아이나 부모들은 어쩌면 원기를 피하고 싶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원기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한다.
“아빠, 나 결혼 못하면 어떡하지? 누구랑 살지? 아빠 엄마랑 같이 살아도 돼?”
“당연하지. 원기는 언제나 아빠 엄마랑 살면 돼. 걱정 붙들어 매셔!”
원기에게는 씩씩하게 말했지만 이런 얘기를 나누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녀석이 자기 상태에 대해 알고 말하는 건가 하는 걱정이 들어서다. 혹 자기 미래를 어느 정도 포기한 건 아닌지 불안할 때도 있다.
나이가 들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함께하고 싶어지는 당연한 일을 원기는 할 수 있을까?
---「원기의 그녀」중에서
원기가 소아조로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내와 밤마다 나눈 이야기가 있다.
“원기가 유치원을 졸업할 수 있을까?”
“원기가 초등학교에 갈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원기가 유치원 졸업발표회를 하던 날, 아내와 나는 긴장해서 큰 눈만 껌뻑거리던 녀석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건강하게 유치원을 졸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이제 열두 살이 된 원기는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녀석은 내 새끼손가락을 잡아야 할 만큼 키가 작다. 다섯 살에도 열두 살에도 말이다.
원기가 내 새끼손가락을 잡고 걸어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는 녀석이 얼른 커서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었으면, 더 크면 어깨동무를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상상했다. 물론 전혀 상상치 못한 방향으로 인생은 흘러갔지만…. 그 막막하기만 하던 길 한복판에서 우리 가족은 조금씩 방향을 잡았고 그렇게 곧장 걸어나갔다. 어쩌면 갈기갈기 찢길 것만 같았던 그 힘든 시간이 우리 가족을 더 끈끈하게 엮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진짜 가족이 된 것 같다.
---「새끼손가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