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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내린 들녘 세트

별이 내린 들녘 세트

[ 전2권 ]
김서은 | 뮤즈 | 2017년 06월 1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7.3 리뷰 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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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6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768쪽 | 140*210*60mm
ISBN13 9791104913242
ISBN10 110491324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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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아침은 도심보다 이른 시간에 시작된다. 어두컴컴한 새벽부터 사람들의 기상을 재촉하는 요란한 종소리에 아스텔은 간신히 수마(睡魔)를 떨쳐 내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며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지고 있는 새벽 공기는 빠른 기상의 적이었다. 어두운 방 안을 더듬어 겉옷을 챙긴 아스텔은 떨면서 낡은 가운에 팔을 꿴 뒤, 어머니의 유품인 펜던트를 품에 넣었다.
아스텔은 일곱 살에 기차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 메이슨 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해주었던 기억이 있으니 아마도 확실할 것이다.
어머니의 육촌지간이라는 메이슨 아주머니는 아스텔이 열 살이 될 때까지 그녀를 길러준 사람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었기에 아스텔은 어린 나이에 삯바느질을 배워야 했다.
메이슨 아주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갈 곳이 없어진 아스텔은 이 집 저 집에서 하녀로 일하며 떠돌다 간신히 지금의 수도원에 정착할 수 있었다. 아스텔에게 대단한 신앙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다음 날 무얼 먹고 어디서 자야 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성직자는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수도원장은 아스텔이 머리가 좋고 손이 빠르다는 점에 착안해 약초도감을 암기하게 했다. 아스텔은 도감을 통째로 암기한 지난여름부터 젊은 수녀들과 함께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겨울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약초를 캐기 위해 숲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얼굴을 씻은 아스텔은 서둘러 기도실로 내려갔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꼭두새벽부터 성직자들이 새벽 기도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스텔은 늘 자신이 앉는 맨 뒷자리에 앉아 손을 모으고 빨리 아침 식사 시간이 시작되길 기도했다.
매일 똑같이 나오는 묽은 수프와 딱딱한 빵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위장에 밀어 넣고 나면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양초를 만들어야 했다. 녹인 밀랍에 심지를 담갔다가 빼길 반복하는 일에 여념이 없던 아스텔은 수도원장의 호출에 의아해하면서 손을 씻었다.
수도원장이 주목받는 재원인 아스텔을 부르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일하는 도중에 그녀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드문 일이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하며 아스텔은 신중하게 원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너라.”
수도원장인 프랜신은 중후한 인상의 육십 대 여성으로, 아스텔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와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은행의 도산으로 고용주 내외가 자살한 뒤, 갈 곳이 없어진 그녀를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지원해 준 사람이 바로 원장의 동생이었다. 수도원에 들어오기 직전에는 간신히 글자만 익힌 정도였던 아스텔이 신학과 철학, 수학, 역사, 지리 등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하게 된 것도 원장이 그녀의 총명함을 일찍이 알아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수녀들은 아스텔을 훈계할 때마다 수도원장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고 했다. 가난한 여성들은 길거리에서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로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고 있다고, 아스텔이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신께서 프랜신 원장을 통해 그녀를 보살폈기 때문이므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수도원에서 주어진 안정된 삶과 교육의 기회는 아스텔에게 있어 더없이 귀중한 행운이었으나, 그녀는 때때로 터무니없는 미래를 몽상하곤 했다. 이를테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해 줄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든가, 수도원을 나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등의 평범한 삶을 사는 몽상.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스텔이 수도원 생활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스텔은 성직자의 길을 택한 덕분에 길가에서 비명횡사하거나, 마음씨 고약한 고용주에게 맞아 죽거나, 길거리의 창녀들처럼 몸을 파는 등 비참함으로 얼룩진 인생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것은 부모 없이 자라난 아스텔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특혜이자 행운이었다. 더군다나 수도원에서 한솥밥을 먹는 이들은 모두 아스텔을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저 어쩌다 한 번씩, 길었던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텅 빈 방으로 돌아갈 때 자신을 반겨줄 누군가가 있길 바랄 따름이었다.
원장실은 수도원장이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을 싫어하는 탓에 항상 먼지가 많았다. 어디에 뭐가 적혀 있는지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대량의 문서철이 책상과 책장마다 수북이 쌓여 있었고, 구석에 놓인 지구본은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때를 탄 상태였다. 창가의 커튼은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며, 가장 깨끗한 건 원장실 중앙에 놓아둔 탁자와 소파였는데 손님이 없을 시기에는 그나마도 문서철과 책들로 점령당하기 일쑤였다.
늘 보던 것과 비슷한 원장실의 풍경에서 아스텔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 낯선 손님이었다. 그것도 척 봐도 귀족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실크햇과 검은 프록코트 차림을 한 성인 남성이었다.
이름 모를 손님에게는 무척 다행스럽게도 오늘의 소파는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였다. 어쩌면 귀족인 손님이 모처럼 찾아온 덕분에 원장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소파를 정리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스텔은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는 젊은 남자를 너무 노골적으로 관찰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조금 전까지 초를 만들다 온 터라 온몸에서 진동하는 꿀 단내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이분은 델플린드 백작의 영식이시란다. 백작께서는 우리 수도원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 중 한 분이시지. 인사하렴, 아스텔.”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 영식이라는 남자는 아스텔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고개를 살짝 까닥여 보였다. 수도원장은 곧이어 아스텔을 남자에게 소개했다.
“이 아이가 아스텔 메이어입니다. 이곳에 온 지는 칠 년쯤 되었지요. 또래인 견습 수녀 중에서 가장 총명하고 부지런한 아이랍니다.”
“그런가.”
남자는 흔한 인사치레조차 하지 않았지만 아스텔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봐온 몇 안 되는 귀족 중에는 이보다 더 재수 없게 거들먹대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태도보다 더욱 신경 쓰이는 건 프랜신 원장이 굳이 일하는 도중에 자신을 불러 이 사람에게 소개하고 있는 이유였다.
“이분에게 수도원을 안내해 드리렴.”
“예, 원장님.”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 아스텔은 자신을 뒤따르는 남자와 함께 원장실을 뒤로했다. 여전히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한 것과 별개로, 외부와 단절되다시피 한 삶을 살고 있는 아스텔에게 낯선 손님과의 만남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속세를 동경하는 것은 성직자의 길을 걷는 이가 품기에 적절한 마음가짐은 아니었지만, 아스텔은 본래 자신이 수녀에 어울리는 인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이 와인 숙성실이랍니다. 특히 이맘때 생산하는 아이스 와인은 저희 수도원의 자랑이라고 원장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렇군.”
남자의 목소리에는 티끌만큼의 관심이나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스텔은 원장실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와인과 치즈의 숙성실, 양초, 성화 태피스트리 등의 작업실을 그에게 보여주었지만, 남자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뜨고 싶은 듯 무심하게 굴기만 했다. 이런 시시한 견학 따위는 그가 이 수도원을 방문한 진짜 목적이 아니라는 것처럼.
아스텔은 남자의 저런 무신경한 태도가 자신으로 인해 비롯된 것은 아닌지 내내 마음을 졸였다. 원장에게도 어떤 뜻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 남자의 안내역을 맡도록 지시했겠지만, 자신의 미숙함으로 인해 수도원의 원조가 끊긴다면 이후에 일어날 일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뒤를 따라오는 남자의 발소리가 마치 자신을 다그치는 것 같아 아스텔은 더욱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뒤이어 포도원과 양조장, 서고와 기도실, 식당, 숙소 등을 차례로 거쳐 갔지만, 대화의 진전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 행선지인 대 예배당에 들어서고 나서야, 아스텔은 간신히 남자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이 아스텔 메이어라고 했나.”
아스텔은 속으로 뛸 듯이 기뻐하며 남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물론 높으신 귀족 나리의 눈에는 경박하게 비칠 수 있었으므로 기뻐하는 기색은 되도록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스텔보다 머리 하나쯤 키가 더 큰 남자는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을 관찰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텔은 그제야 남자가 자신과 단둘이 될 때까지 일부러 말을 붙이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얼굴은 어느 쪽을 닮았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아스텔은 잠시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초상화조차 남기지 않은 채 오래전에 타계한 부모의 얼굴이 제대로 기억날 리도 없었지만, 오늘 처음 만난 귀족 남성이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도 짐작이 갈 리 없었다.
“두 분 다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기억은 잘…….”
“…….”
아스텔의 대답을 들은 남자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듯이 턱을 매만졌다. 아스텔은 그 틈을 타 머뭇거리며 남자의 얼굴을 관찰했다.
이목구비는 석고 조각처럼 아름답고 섬세했지만, 가늘고 여린 인상과는 거리가 먼 미남자였다. 나이는 이제 이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선명한 시안 블루의 눈동자가 제법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제단과 스테인드글라스를 등지고 서 있었는데, 덕분에 종교적인 엄숙함과 위험한 성적 매력이 공존하는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남자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를 몰래 훔쳐보던 아스텔은 갑자기 눈이 마주치자 엉겁결에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회피해 버렸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밖에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나이는.”
“열일곱……. 석 달 뒤에 열여덟이 됩니다.”
“딱 맞는군.”
무엇이 딱 맞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아스텔의 얼굴을 지켜보던 남자는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세이지 램버트 알트만이다. 너와는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다시 만나게 될 것 같군.”
자신의 이름을 세이지라고 밝힌 남자가 떠난 후, 프랜신 원장은 아스텔을 다시 원장실로 불러들였으나 그녀를 세이지에게 소개한 이유는 일절 설명해 주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정말로 다시 찾아온다면 머지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될 거라고 하면서.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야 간신히 방으로 돌아온 아스텔은 낡은 일기장을 펼쳐 오늘 만난 기묘한 손님에 대한 감상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펜촉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종이를 스칠 때마다 희미한 촛불도 함께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알고 계시겠죠? 그 사람이 어째서 여기에 온 건지.”
아스텔은 로사리오 대신 품에서 꺼낸 장미 무늬의 펜던트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내일의 일과를 위해서는 슬슬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일기장을 덮고 촛불을 끈 아스텔은 이윽고 싸늘한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마나 왔지?”
“이제 로즈몬드입니다요, 도련님.”
지루한 표정으로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던 세이지는 손안의 회중시계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수도원의 정문을 통과한 뒤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삼십사 분 동안, 그는 벌써 열네 차례나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추수가 끝난 초겨울의 황량한 벌판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간혹 눈에 띄는 나무들은 나뭇잎이 전부 떨어진 채 앙상한 나뭇가지만 드러내고 있었다. 지겹긴 하지만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동안은 이 따분한 풍경을 참고 감상해야만 한다. 눈이라도 잠시 붙일라치면 그때마다 포장이 덜 된 시골길의 돌부리에 걸린 마차가 덜컹거렸기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수도의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본가로 돌아온 지 이제 겨우 사 개월. 도시 청년이나 다름없는 세이지에게 영지의 시골 생활은 그야말로 죽음과 같은 권태의 연속이었다. 그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던 사람 찾기는 두 시간 전에 막을 내려 버리고 말았다.
몇 번인가의 허탕 끝에 드디어 ‘진짜’를 찾아냈지만 줄곧 상상했던 것 같은 희열이나 절망은 없었다. 그 소녀가 진짜라는 확신이 들었던 순간, 세이지의 머리를 스친 감상은 고작 한 가지뿐이었다.
이걸로 전부 끝났군.
품을 뒤져 펜던트를 꺼낸 세이지는 로켓의 표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런 조잡한 단서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는 이미 아스텔이 찾고 있던 소녀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텔 메이어라는 소녀는 그가 아버지의 비밀 방에서 봤던 초상화와 정말 똑같이 생겼으니까.
세이지의 부친인 델플린드 백작은 얼마 전부터 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간신히 찾던 인물의 행방을 알았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러자 백작은 타깃을 돌려 이번에는 그 사람의 딸을 찾기 시작했다.
세이지는 슬하의 친자식에게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백작이 생사도 불분명한 남의 자식을 찾는 일에 열을 올리는 것이 우스웠다. 막말로 소녀도 그새 부모를 따라 세상을 떠났을지 알 게 뭐란 말인가.
평생 저렇게 살다 가라지.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기 위해 의미 없이 시간과 돈을 퍼붓고 있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것은 제법 재미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아버지에게 사랑받으려 헛된 발버둥을 쳤던 지난날보다는 훨씬 재밌었다. 그렇게 제삼자로서 흘러가는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던 세이지에게 갑작스레 한 가지 발상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 소녀를 찾아온다면?
백작은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 있었지만, 세이지뿐만 아니라 장남인 로렐에게도 냉담한 사람이었다. 대를 이을 후계자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보험. 그 사람에게 있어 아들들이란 그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특히 백작은 자신의 예전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세이지를 로렐보다 더욱 싫어했다. 세이지는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세이지는 어릴 적부터 얌전하고 똑똑한 아이였기 때문에 유모가 손이 많이 가지 않는다며 좋아했고, 백작도 세이지를 야단친 적이 별로 없었다. 세이지가 기숙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얼굴을 마주할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세이지를 싫어했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세이지는 철이 들 때까지 부모가 자식을 싫어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일인 줄로만 알았다.
아무튼 세이지는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아니, 사랑받는 건 오래전에 포기했으니 인정이라도 받아보고 싶었다. 어차피 실패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인식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었으니까.
백작이 소녀를 찾는 사람에게 상당한 유산분배권을 할애하긴 했지만, 그것은 세이지의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간절하게 찾고 싶어 하는 소녀를 만나게 해준다면, 조금은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지 않을까. 적어도 고맙다는 생각 정도는 할 것이다.
그래서 세이지는 자신이 직접 소녀를 찾는 일에 착수했다. 반신반의하던 백작이 결국 애지중지하던 펜던트를 넘겨주던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짜릿했었다.
세이지는 오래 끌 것 없이 아버지와 소녀를 최대한 빨리 만나게 하는 편이 현명하리라 판단했다. 그편이 아버지의 환심을 얻기에 더 유리할 것이다.
그전에 아스텔이라는 소녀를 한 번 더 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세이지는 다시 펜던트로 시선을 옮겼다. 장미 무늬가 새겨진 은제 펜던트가 겨울의 햇빛을 반사해 둔탁한 빛을 냈다.



“지난번의 그 손님과 말씀이신가요?”
“그분이 꼭 널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하셨단다. 차 마실 시간에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니.”
백작가의 자제라는 손님은 돌아간 지 일주일 만에 수도원을 다시 방문하여 아스텔을 찾았다. 고의인지 아닌지 오늘은 티타임이 가까운 시간에 방문한 덕분에 프랜신 원장은 아스텔에게 그에게 차를 대접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스텔은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세이지와 나누었던 의미 불명의 대화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비록 선택의 여지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가 아스텔에게 나쁜 인상을 받지 않은 것은 확실했으므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뒤바꿔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좋은 인상을 주었다는 의미도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아스텔은 세이지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왔군.”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난 세이지는 여전히 도도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까닥거렸다. 세이지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아스텔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급히 준비된 다과였지만 차와 우유, 잼과 클로티드 크림과 스콘, 쿠키 등 나름대로 구색은 갖춘 모양새였다.
테이블 위에는 평소에 아스텔이 즐기던 것들보다 월등히 좋은 고급품들만이 올라와 있었지만, 전과 별다를 것 없는 침묵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첨으로도 즐겁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도리어 상대가 귀족이니만큼 물의 온도나 우려낸 시간 등으로 까다롭게 트집을 잡는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일 따름이었다.
아스텔은 티포트의 주둥이 끝에만 시선을 집중한 채, 신중하게 들고 있는 티포트를 기울였다. 하지만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티포트를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은 시종일관 부들거리며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세이지는 덤덤한 시선으로 그런 아스텔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티포트를 기울이던 아스텔은 결국 찻잔이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말았다. 하얀 테이블 위로 붉은 찻물이 물감처럼 어지럽게 퍼져 나갔다.
새파랗게 질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스텔과 반대로, 세이지는 침착하게 손수건을 꺼냈다. 곁에서 그녀가 떠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하던 바도 아니었다. 아스텔은 뒤늦게 허둥거리며 주머니에서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테이블을 닦았다. 수선스럽게 테이블을 닦던 아스텔의 손이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던 세이지의 손을 스쳤다.
그 순간, 찻물이 들어 붉게 물든 손수건처럼 아스텔의 흰 뺨이 이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런 아스텔의 표정을 세이지는 조금 낯선 듯이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테이블을 마저 정리한 아스텔은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세이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조금 식은 차를 마셨다. 차 받침에 빈 찻잔을 올려놓고서야 마침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잔 더.”
이번에는 실수 없이 차를 따른 아스텔은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는 세이지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맑은 진녹색의 눈동자 속에서 일순간 무언가가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조만간 다시 오겠어.”
처음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티타임이 끝나자, 세이지는 지체하지 않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오늘의 방문도 바쁜 시간을 쪼개 일부러 들렀던 것이라고 했다.
다음번의 만남을 기약하는 세이지의 말에 아스텔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처음에는 조금 대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었지만 아까 보여주었던 알 듯 모를 듯한 배려에 첫인상처럼 딱딱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가 세 번이나 일부러 자신을 지목하며 찾아오는 이유도 신경이 쓰였다.
아스텔은 때때로 자신을 사로잡았던 몽상을 떠올렸다. 언젠가 자신을 사랑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 수도원을 떠나게 된다는, 현실성이라고는 먹다 흘린 빵부스러기만큼도 없던 한심한 몽상. 그 몽상에 바로 지금, 무언가 구체적인 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아스텔이 다시금 익숙한 몽상의 세계로 빠져들 뻔한 순간, 세이지는 돌연히 손수건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스텔의 손으로도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작은 물건이었다.
“이건……?”
“선물.”
간신히 현실로 돌아온 아스텔은 눈을 크게 뜬 채 세이지의 얼굴과 그의 손에 쥐어진 물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확인해 보지 않을 건가?”
“지금 봐야 하는 건가요?”
“꼭 지금 봐야 하는 건 아니지만.”
세이지는 모호한 태도로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어딘가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아스텔은 건네받은 물건을 수도복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시선이 손수건에 싸인 물건을 따라 아스텔의 수도복 주머니 쪽으로 움직였다.
“나중의 즐거움으로 미뤄둘게요.”
아스텔이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미소를 보이자 세이지는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웃는 것을 처음 본 사람처럼.
잠시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아스텔의 웃는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는 이윽고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잠시간의 침묵 끝에 세이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번에.”
세이지는 수도원 입구에 서 있는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아스텔과 있었던 일들을 다시금 곱씹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 줄곧 ‘초상화의 인물을 닮은 소녀’로서 두루뭉술하게 존재했던 그녀가, 조금 전의 사건을 기하여 비로소 ‘아스텔 메이어’라는 개별적인 존재로 탈바꿈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웃기도 하고 얼굴을 붉히기도 하는,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존재하는 소녀. 그것은 아스텔을 아버지의 인정을 받도록 해줄 수단으로만 여기던 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차에 오른 세이지는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수도원의 정경을 계속 뒤돌아보았다. 어쩐지 아주 조금, 다음번에 그녀를 다시 만날 일이 기다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잠들기 전의 일과대로 일기를 쓰던 아스텔은 문득 세이지가 낮에 건네준 선물을 몰래 꺼내보았다. 손수건을 벗긴 뒤, 세이지가 건네준 물건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본 아스텔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손수건에 싸여 있던 물건은, 놀랍게도 아스텔이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유품과 똑같은 모양의 펜던트였던 것이다.



사흘 뒤, 서고에서 성서를 필사하다가 프랜신 원장의 호출을 받은 아스텔은 직감적으로 세이지가 다시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점심을 먹은 뒤에 나른하게 몰려오던 졸음기가 곱게 접힌 쪽지 하나에 순식간에 달아나 버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손에 묻은 잉크를 닦고 있는 아스텔을 바라보며 옆에서 유명 신학자의 해설서를 뒤적이던 선배 안젤리나가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백작가 도련님이라고 했던가? 누가 보면 연애하는 줄 알겠네.”
“그런 거 아녜요!”
아픈 곳을 찔린 사람처럼 아스텔이 무심코 큰 목소리로 대꾸하자 안젤리나는 짓궂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차피 넌 수녀가 되고 싶어서 수도원에 들어온 게 아니지 않니? 기회가 된다면 환속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환속…….”
아스텔은 안젤리나의 말을 곱씹으며 세이지를 떠올렸다. 지난번의 티타임이 생각 외로 편한 자리였고 세이지에 대한 인상이 많이 바뀐 것도 사실이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그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어머니의 유품과 똑같이 생긴 펜던트를 본 순간, 아스텔은 세이지가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자신을 찾아왔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엔 자신의 부모님이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꽤 높을 것이다. 처음 만났던 날, 그가 어느 쪽을 닮았냐고 대뜸 물어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부모님의 또 다른 유품을 되찾은 셈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아스텔은 펜던트를 받은 것이 그다지 기쁘거나 감격스럽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자면, 기쁨보단 실망에 더 가까운 기분이라고나 할까. 마치 달콤했던 꿈에서 현실로 강제로 되돌아온 것처럼.
“객관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해요.”
“음? 무슨 일 있었니?”
“무슨 일이 있었냐고 하시면…….”
아스텔은 무심코 세이지와 손이 스쳤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가 찻잔을 내밀면서 자신에게 했던 말도.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안젤리나의 의문스러운 시선이 자신의 등을 찌르는 것을 느끼며 아스텔은 도망치듯 서고를 빠져나갔다.

다시금 원장실을 방문한 아스텔은 문이 열린 순간, 자신이 실수로 원장실이 아닌 다른 방에 들어온 것으로 착각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늘 보던 지저분한 원장실이 처음으로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던 문서철들은 깨끗하게 자취를 감췄고 모든 가구는 먼지 한 톨 없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심지어 항상 원장실 안을 맴돌던 퀴퀴한 냄새 대신, 상쾌한 로즈마리의 향기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스텔은 수도원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원장실의 커튼이 짙은 자주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몰라보게 달라진 원장실의 풍경에 아스텔이 충격을 받은 사이, 한 손님이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아이가…….”
“아스텔 메이어입니다.”
그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아스텔도, 수도원장도 아니었다. 아스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세이지와 그 옆의 낯선 중년 남성을 향했다.
아스텔은 한눈에 그가 세이지의 아버지인 델플린드 백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닮았다’는 표현이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세이지와 빼닮은 외양을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이지 쪽이 자식이니 그가 백작을 닮은 것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말하는데 먼저 끼어들지 말아라, 세이지.”
“죄송합니다.”
백작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세이지를 나무라듯이 바라보자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원장실 안에 감도는 냉랭한 분위기를 타파하려는 듯, 급하게 프랜신 원장이 말을 꺼냈다.
“인사하렴, 아스텔. 이분이 널 찾고 계시던 델플린드 백작, 데이빗 해롤드 알트만 경이시란다.”
원장의 말에 놀란 아스텔은 다시 백작을 마주 보았다. 조금 전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백작은 선량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아스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 역시 네 부모님을 빼닮았구나.”
아스텔은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다. 세이지가 자신을 찾아왔던 이유. 그리고 그가 펜던트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와 어째서 원장실이 깨끗하게 청소되었는지도 전부.
“처음 뵙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각하, 이 아이가…….”
“됐네.”
뒤이어 아스텔을 소개하려는 원장에게 백작이 됐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외모뿐 아니라 그런 사소한 행동마저 세이지와 닮은 구석이 있어 아스텔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딱딱하게 굴던 세이지와는 달리,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듯한 시선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저를 대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아가, 네가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구나.”
아스텔이 난감한 시선을 던지자 원장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지는 내내 표정의 변화 없이 차를 마시는 척했지만, 유심히 보면 찻잔의 차가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각하와 산책이라도 하고 오려무나.”

프랜신 원장의 권유대로 아스텔은 백작과 함께 한적한 수도원의 외곽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귀한 손님의 방문을 예상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요 며칠 쌀쌀하던 날씨가 오늘따라 많이 풀린 상태였다. 사냥이 취미라는 백작은 답답한 실내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야외에서 움직이는 편이 좀 더 즐겁다고 했다.
“그래, 직접 약초를 캐러 다닌다고?”
“네. 이맘때는 잡초밖에 나지 않아서 산에 올라갈 일은 거의 없지만요.”
백작은 딱딱한 존댓말을 사용하던 아스텔에게 편한 말투로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수도원의 후원자보다는 부모님의 친구로 여겨줬으면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걸 다 구분할 수 있느냐?”
“저보다 더 잘 아시는 수녀님도 계신걸요.”
“너는 약초에 관해 공부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을 것 아니냐.”
첫 만남에서 내내 무성의한 태도였던 세이지와 달리 백작은 궁금해하는 것이 참 많았다. 그는 아스텔과의 화젯거리가 떨어지는 것이 싫은 것처럼 끊임없이 그녀에 대해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설마 아스텔이 자신이 후원하고 있는 수도원에 있을 줄은 몰랐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아스텔은 처음 보는 백작의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 이만큼의 관심을 받는 것이 처음이었던 터라 기쁘기도 했다. 백작은 별것 아닌 말에도 장하다, 대단하다는 감탄사를 연신 내뱉으며 아스텔에게 내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스텔도 제법 긴장이 풀린 모양새가 되자, 백작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느냐?”
“아주 어릴 때라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스텔은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거리며 주머니 속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어머니는 피아노를 잘 치셨어요. 어렸을 때 어머니 무릎 위에서 같이 건반을 두드리면서 놀았던 기억이 나거든요. 아마 음악 선생님이 아니셨을까 싶어요.”
“…….”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부끄럽지만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어요. 하지만 아버지를 굉장히 좋아했던 기억은 나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종종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나가던 아스텔은 돌연히 입을 다물었다. 세피아 빛으로 변색된 옛 기억의 바닷속에서 어떤 한 조각이 색채를 띤 채 선명하게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기억날 것 같은데―.
“너희 부모님은 두 분 다 내 가장 절친한 친우였단다.”
이어지는 말에 곧바로 망각의 어둠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네 어머니 디안은 지역 축제에서 여왕 자리를 놓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인기가 높았단다. 더군다나 남자들과 설전을 벌여도 지지 않을 정도로 당차고 씩씩했지.”
“어머.”
“그리고 네 아버지 조지는 조금 낯가림이 심했지만 굉장히 재능이 많은 친구였단다. 미술이면 미술, 음악이면 음악, 문학이면 문학, 못하는 게 없었지. 살갑지 못한 성격이라 오해를 많이 사기도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속내가 깊었어. 그러면서도 은근히 허당스러운 기질도 있었고 말이다.”
아스텔은 백작이 풀어놓는 부모님의 옛이야기가 신기하면서 즐겁기만 했다. 메이슨 아주머니는 어머니의 친척이라고 했지만 생전에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스텔의 부모님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남모를 우울감에 젖어 있던 소녀는 백작의 입담에 간데없이 사라졌다. 문득 세이지와 처음 만났던 날, 그가 던졌던 질문이 떠오른 아스텔은 내심 궁금했던 것을 백작에게 묻기로 마음먹었다.
“저어, 백작님.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될까요?”
“무엇이든 말해보렴.”
“저는, 저는……. 두 분 중 어느 분을 닮았나요?”
백작은 그 질문에 잠시 아무 말 없이 아스텔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기억 속의 두 친우와 아스텔의 얼굴에서 닮은 부분을 찾아낸 것처럼, 무척이나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허리를 숙여 아스텔과 눈을 맞춘 백작은 다정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아스텔, 너는 네 부모님 둘을 모두 닮았단다. 조지와 디안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만 닮은 아이가 바로 너란다.”
아스텔은 백작의 대답에 환하게 미소 지었다. 비록 또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부모님의 흔적이 자신의 얼굴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후에도 백작과 아스텔의 환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기억력도 좋은 백작은 아스텔의 부모님과 겪었던 재밌는 에피소드를 생각나는 대로 전부 늘어놓았고, 아스텔은 눈을 빛내며 백작이 하는 이야기 전부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얼마나 즐겁게 이야기했는지, 세이지가 난입하기 전까지 두 시간이나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어댈 정도였다.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이만 가보지 않으면 도착하기 전에 해가 질 겁니다.”
세이지의 말에 백작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정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백작은 금세 아쉬운 눈빛으로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를 너무 귀찮게 한 것 같구나.”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내가 다시 널 만나러 와도 괜찮을까.”
아스텔은 백작의 뒤에 선 세이지가 눈을 부릅뜨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그 표정은 원장실에서 자신을 처음 본 순간 백작이 지었던 표정과 똑같았다.
“……물론입니다.”
세이지에게 까닭 모를 죄책감을 느끼며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위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저어, 아드님도 함께 오시는 건가요?”
“세이지가 신경 쓰이느냐?”
“아닙니다!”
아스텔은 엉겁결에 큰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모습이 썩 귀엽게 보였는지, 백작은 큰소리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정작 아스텔 본인은 세이지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네가 싫다면 데려오지 않으마.”
고개를 숙인 아스텔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잠시 팔을 뻗었던 백작은 금세 다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는 대신,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다음번엔 널 우리 저택으로 초대하고 싶구나, 아스텔.”

백작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집무실로 직행했다. 짧지 않은 여로에 노곤할 법도 하건만, 그는 지친 기색 없이 바로 변호사를 호출하여 여러 법률 서적과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반신반의에 불과했던 것이 확신으로 바뀐 지금, 백작은 어제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작이 검토하고 있는 서류들이 어떤 것들인지 금방 알아본 세이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바깥으로 향했다.
“아버지께서 그런 표정도 지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너희들같이 귀염성 없는 사내놈이 아니니까.”
과연 그게 진심일까. 세이지는 남몰래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남에게만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상냥하게 굴던 아버지는 친자식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미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알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거나.
“정말로 데려오실 겁니까?”
“네 몫의 유산에는 손도 대지 않을 테니 염려 말아라.”
세이지는 이를 갈았다. 무신경한 아버지는 그가 자신 몫의 유산을 침범당할까 봐 아스텔을 경계하는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가 진정 불쾌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배웅하며 미소 짓던 아스텔의 얼굴이 김이 서린 유리창 너머로 아른거리며 떠올랐다. 세이지는 아스텔을 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분명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새까맣게 태워가기만 할 뿐이었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세이지는 지금의 감정을 건사하기도 벅찬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제 고작 세 번을 만나본 상대일 뿐인데, 대체 무엇 때문에.
“본인이 싫다고 하면 어쩌실 겁니까.”
“싫다고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냐. 이제 그 아이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알트만 가문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백작은 세이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마도 그의 기억 속에서는 처음으로.
“플라티나 메도우에서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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