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국제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그 깃발 아래 민족적 자유주의라는 자신의 밀수품을 안전하게 운반한다는 계략을 사용했다. 결국 포트레소프는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민족적 자유주의자다. 그의 글의(그리고 그의 강령과 정책과 신조의) 본질은 이 얄팍한-원한다면, 심지어 악의 없는-계략의 사용에 있다. 즉 국제주의의 깃발 아래 기회주의를 실어나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략의 모든 세부적인 지점들까지 파고들어가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 문제가 무엇보다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포트레소프가 남의 깃발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위험한 이유는 그가 ‘국제주의’의 원칙으로 자신을 가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의 지지자를 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포트레소프는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대변자라고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주의를 민족적 자유주의로 바꿔치기하고 있다.
--- p.75
프랑스 대혁명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까지의 제1시대는 부르주아지가 발흥하여 승리를 이루는 시대, 부르주아지가 상승하는 시대다. 일반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의 시대이고, 특수하게는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시대이며, 수명이 다한 봉건적-절대주의적 제도가 급속히 붕괴한 시대다. 제2시대는 부르주아지의 완전한 지배와 쇠퇴의 시대, 진보적 성격을 가졌던 부르주아지가 반동적인, 심지어 초반동적인 금융자본으로 이행하는 시대다. 이 시대는 새로운 계급-현대 민주주의파-이 세력을 준비하고 서서히 세력을 결집하는 시대다. 제3시대는 막 시작한 시대로서, 제1시대 동안 봉건영주가 처했던 것과 동일한 ‘지위’에 부르주아지를 갖다 놓았다. 이 시대는 제국주의 및 제국주의적 격동의 시대이며, 제국주의의 본성에서 비롯하는 동란의 시대다.
--- p.89
“실제 문제는 자국의 승리인가, 패배인가라는 오직 그 문제만이 있을 수 있다”고 기회주의자들의 시종 카우츠키는 게드와 플레하노프와 그들 일파의 입맛에 맞춰 이렇게 썼다. 정말이지,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이 망각되어야 한다면, 이 말이 진리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 말은 맞지 않다. 여기 또 다른 실제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는 노예주들 간의 전쟁에서 맹목의 무력한 노예로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노예제 타도를 위한 노예들 간의 ‘친교를 위한 시도’에 뛰어들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현실에서 ‘실제’ 문제다.
--- p.152~153
영국은 지금까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정치적 자유가 훨씬 더 광범위했다. 다른 어느 곳보다 이 나라의 부르주아지는 통치하는 것에 익숙하며, 어떻게 통치할지를 알고 있다. 계급들 간의 관계가 다른 나라보다 더 발달했으며, 많은 점에서 더 명료하다. 병역의무제가 없어서 전쟁에 대한 태도에 있어 사람들이 보다 자유롭다. 누구라도 군 입대를 거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운데, 이 때문에 정부(영국에서 정부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부르주아지의 업무 관리 위원회다)는 ‘인민’의 전쟁 열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목표는 법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소수의, 가장 좋은 지위에 있는 숙련 노동자들이 자유당(Liberal) 정책, 즉 부르주아적 정책으로 탈주해버림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사기가 저하된 상태가 아니라면 말이다. 영국의 노동조합은 전체 임금노동자의 약 5분의 1을 포괄하고 있다. 대부분의 노조 지도자들은 자유당원이다. 마르크스는 오래전에 그들을 부르주아지의 하수인이라고 불렀다.
--- p.305~306
전쟁은 모든 인습을 내던지고, 모든 베일을 찢어버리며, 사람들이 자신의 눈으로 완전한 진실을 보도록 하는 등의 유용한 기능을 해왔다. 차르 군주제의 보존은 타민족들을 노예화하기 위해 수백만의 생명(및 인민의 돈 수십, 수백억 루블)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름 아닌 이 정책이 입헌민주당이 떠받들고 섬겨온 정책이다.
자유주의 지식인은 이러한 진실이 불쾌할 것이다. 자신을 인도적이고 자유를 애호하고 민주주의적이라고 여기는, 그리고 자신을 푸리시케비치 일당의 종복이라고 주장하는 ‘중상비방’에 깊이 분개하는 자유주의 지식인 말이다. 그러나 전쟁은 이 ‘중상비방’이 가장 명백한 진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 p.318~319쪽
혁명적 계급은 반동적인 전쟁에서 자국 정부의 패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자명한 공리다. 의식적인 사회배외주의자 도당이나 그들의 영혼 없는 시종들만 이 공리와 다툰다. 전자의 부류에 속하는 자는 예를 들자면 조직위원회의 셈콥스키고(조직위원회의 신문 『이즈베스티야』 2호), 후자에 속하는 자는 트로츠키와 부크보예드(Bukvoyed), 그리고 독일의 카우츠키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러시아의 패배를 바라는 것은 “사회애국주의의 정치적 방법론에 대한 전혀 불필요하고 전적으로 부당한 양보다. 전쟁(및 전쟁을 야기한 조건들)에 대한 혁명적 투쟁이 필요한 상황에서, 단지 해악이 가장 작은 쪽을 지향하는 활동-현 조건에서 매우 자의적인-으로 이와 같은 혁명적 투쟁을 대체하는 것이 바로 사회애국주의의 정치적 방법론이다.”(『나셰 슬로보』 105호)
이것은 트로츠키가 기회주의를 정당화할 때 항상 사용하는 허풍스런 과장법의 한 예다. “전쟁에 대한 혁명적 투쟁”이라는 것이 현 상황에서 어떤 내용을 가지려면, 그것은 전쟁 중에도 자국 정부에 대한 혁명적 행동을 한다는 뜻일 때만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은 그저 제2인터내셔널 영웅들의 전매특허인 공허하고 내용 없는 고함 지르기에 불과하다.
--- p.335~336
대중들 사이에 환멸과 불만과 항의와 분노와 혁명적 기운이 고조되고 있고, 이것이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는 믿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행동으로 전화될 수 있는 상황, 이것이 현재 유럽의 객관적 정세다. 지금 문제는 오직 다음과 같이 제출되어 있다. 자국 부르주아지와 자국 정부에 대항하는 혁명적 행동의 성장과 발전을 도울 것인가, 아니면 혁명적 행동에 제동을 걸고, 그것을 달래고 꺼뜨릴 것인가- 이 두 방향 중 후자로 가기 위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자들은, 대중과 자신들 간의 불화와 파열을, 그리고 혁명적 행동이 더욱더 진지한 국면으로 옮겨가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좌파에게 입으로 하는 그 어떤 양보도, 군비철폐와 평화와 병합 거부와 온갖 종류의 개혁에 대한 그 어떤 약속도, 이 세상의 그 어떤 요구도 다 수용할 것이다.
우리는 대중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어떤 거창한 강령도 믿지 마시오. 당신들 자신의 대중적인 혁명적 행동에 의지하시오. 당신들의 정부와 당신들의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혁명적 행동 말이오. 그리고 그와 같은 행동을 확대하고 강화시키도록 하시오.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 없이는 지금의 야만으로부터 벗어날 어떤 출구도, 유럽에서 어떠한 진보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 p.354~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