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게 균형 잡힌 욥의 태도는 놀랍기 그지없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형통했던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임을 잘 알았다. 그는 비록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자격이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이전에 자신이 누렸던 복이 자기 공로 덕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현재 당하는 고난도 꼭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은총을 평가하는 잣대로 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어떤 때는 축복을 내려 주시다가 왜 다른 때는 안 그러시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척하지 않는다.
--- pp. 35-36
고난당하는 친구와 시간을 보내 본 사람이라면,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한 채 그저 곁에만 있는 일이 얼마나 힘든
지 알 것이다. 결과를 전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채 인생을 하나하나 다시 세워 나가야만 하는 친구 곁에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묵묵히 고난을 함께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뭐가 잘못됐는지 조사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러면서 친구가 그 원인을 제거해 최대한 빨리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우리가 도울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한다. 원인을 알면, 적어도 우리 자신은 그와 같은 운명은 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고난의 핵심에 숨어 있는 신비를 받아들이려 하기보다는 그 고난의 이유가 옳든 그르든 간에 파악해 내려고 애쓴다. 욥의 친구들은 이런 유혹에 무너졌다.
--- pp. 41-42
시장 경제가 거의 전 세계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은 경쟁 때문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기업, 정치 그리고 다른 형태의 경쟁은 중대한 경쟁적 국면을 띠고 있지만, 실은 협력의 형태들이다. 사회가 경쟁을 촉진하는 것은 모두가 번성하기 위함이다. 경쟁에서 실패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보응은 궁핍으로 내몰리는 게 아니라, 더 생산적인 일로 전환되는 것이다. 많은 회사들이 도산하기도 하지만, 성공적인 경쟁자들이 반드시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뉘기는 하지만, 승자가 헌법을 개정하여 패자를 유폐시키는 것은 아니다. 경력에 부침이 있겠지만, 실패에 대한 정당한 보응은 “당신은 이 도시에서 다시는 일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당신의 재능에 더 맞는 일을 찾도록 도우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다.
--- p. 150
결국 우리의 일하는 습관은 우리 인격이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인격은 여호와의 계시를 얼마나 알고 또 얼마나 경외하는가에 따라 형성된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아 갈수록 우리 인격은 하나님을 닮아 갈 것이다. 참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지혜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을 포함해 삶의 모든 영역에 생명을 가져다준다. 지혜는 신뢰할 만한 행위, 부지런함, 건전한 영리함, 너그러움, 궁핍한 사람을 위한 공의, 말하는 습관의 변화, 겸손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지혜로워지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정하시며 우리의 영원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다.
--- p. 159
예레미야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다의 지도자들, 즉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지긋지긋한 불신앙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들의 근시안적인 생각과 서로에게 했던 거짓말을 기꺼이 믿는 마음이 유다와 수도 예루살렘을 완전한 파멸로 인도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일은 엄숙한 임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일하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이요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심각한 손해를 입힌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는 일은 왕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책무였다. 이스라엘이 파국을 맞은 것은, 왕과 백성이 언약에 규정된 의무를 소홀히 한 까닭이었다.
--- pp. 255-256
크리스천들은 직장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리라 기대하면서 수준 이하의 업무 수행을 해서는 안 되며, 그리 되지도 않는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복되게 해야 한다면, 능력을 갈고 닦아 대등한 경기장에서 경쟁에 참여해야 한다. 한 무역협회가 공급자 우선관계나 고용 선호, 세금 또는 정규적인 이익, 혹은 크리스천들에게만 유익하도록 고안된 어떤 체계를 채택해 실행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도시를 축복하는 일이 아니다. 1800년대 중반 아일랜드에 기근이 들었을 때, 많은 성공회 교회들은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겠다는 사람들에게만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물론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였고, 그 결정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기독교 종파가 다른 종파를 배제하면서 자기 식구들만 챙기는 행위였다. 비기독교인들을 차별하는 기독교인들이 일으킨 훨씬 더 큰 손해를 상상해 보라. 그런 차별이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역사의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 pp. 277-278
개개인이 정의로워야 한다. 하지만 개인으로 이루어진 전체 국가가 의로워지기 전까지 하나님의 회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전 세대와는 관계없이 현재 잡혀간 포로들 전체에게 의로운 삶과 책임을 요구하신다. 에스겔 18장 5-9절을 보면 의로운 사람과 사악한 사람 모두의 제의적·도덕적 행위들을 광범위하게 지적한다. 나아가 이러한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이 ‘살아 있는지’ 또는 ‘죽어 있는지’를 판단한다. 이 행위들 가운데 네 가지가 일과 관련이 있다. 채무자의 담보를 반환하는 것, 가난한 이들을 부양하는 것, 과도한 이자를 부과하지 않는 것, 정당하게 일하는 것이다. 정당하고 정의로운 기준을 지키지 않는 것, 더 나쁘게는 다른 이에게 무분별하게 피 흘리게 하는 행위는 죽음이라는 벌을 초래할 것이다(겔 18:13).
--- pp. 294-295
에스겔 18장 7절은 빚에 관한 것이지만, 같은 원리를 모든 종류의 상품에도 적용할 수 있다. 상품의 결점이나 위험성 여부를 알려 주지 않는 것, 구매자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비싼 상품을 판매하는 것, 제품의 장점을 구매자의 필요에 부적당하게 맞추는 것과 같은 모든 관행은 에스겔 18장 7절에 나온 학대나 다름없다. 구매자의 안녕을 거래에서 침범할 수 없는 목표로 삼지 않는 한, 그러한 관행들은 선의의 사업에도 서서히 파고들어올 수 있다. 에스겔의 용어를 빌면, 구매자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겔 18:9).
--- p. 298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에게 정복당했을 때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끌려온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에게 매우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환경 덕분에 그는 바벨론 왕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부패하고 불경스러운 바벨론 정부에서 발을 빼고 다른 유다 백성들과 함께 지내면서 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써야만 했을까? 아니면 바벨론의 권력과 영광의 삶을 누리고 사는 한편, 신앙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치부해 자기 골방에서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서 살아야 했을까? 다니엘은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공개적으로 계속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동시에 전도유망한 인생 경력을 쌓아 간다. 그가 어떻게 이런 험난한 물결을 헤쳐 나갔느냐 하는 이야기는 오늘날 일터에 있는 크리스천들의 지침서요, 동시에 연구 사례가 된다.
--- p. 320
실제 삶에서 용기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때 나타나는 결과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따르는 위험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들이 확신을 굽히지 않을 경우 닥칠 결과도 알아서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우리도 우리의 일터에서 윤리적인 경계선이 어디인지를 알고,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뭔가를 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어떻게 할지를 사전에 생각해 두어야만 한다. 오랫동안 하버드경영대학원에 몸담고 있는 한 교수는 “‘저는 못 합니다’라고 말해야 할 상황을 미리 제대로 알고, 근무하게 되는 직장마다 사직용 멘트를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감언이설에 속아 한 단계 한 단계 서서히 무슨 일이든 다 하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충고했다
--- p. 337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욘 3:5a) 그들이 행한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고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욘 3:10).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요나는 낙심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셔서 하길 원하신 그 일의 결과를 자신이 좌지우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니느웨가 용서가 아니라 벌을 받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의 결과에 맞게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하고(욘 4:5),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같이 누리지 못한다. 우리의 태도도 이와 똑같지 않은가? 우리의 일에서 보람이나 성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을 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하는 일의 참된 가치를 보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는 것은 아닌가?
--- p. 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