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적 배경을 지닌 서구와 달리, 다양한 타 종교와 보이지 않는 경쟁 구조에 있고, 또한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타 교단과 경쟁 구조에 있는 한국의 경우 기독교가 변혁 의지가 있는 종교가 된다는 것은 소수의 의식 있는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차별의 문제는 대부분 ‘특수한 문제’로 간주될 뿐, 교회가 긴급히 인식해야 할 ‘보편적 문제’로 인식되지 못한다. 이러한 정황에서 여성의 배제와 차별을 넘어서기 위한 크리스천 페미니즘이 적극적으로 수용되기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서구와 같이 교회 여성들이 목회자, 학자, 평신도 그룹으로 나뉘어져서 각기 자신의 장에서 필요한 변화를 위해 활발히 활동하는 단계도 아닌 상태에서, 총체적 변화를 요구하는 페미니즘의 소리는 아직 한국의 기독교 안에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 본문 중에서
그런데 이러한 여성 문제를 진지하게 보지 않으려는 경향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첫째, 가장 일반적 방식은 여성 문제를 ‘사소한 문제로 만드는 것 trivialization’이다. 여성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사회에는 얼마든지 많다고 주장함으로써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서, 여성 문제는 서구 중산층 여성의 문제일 뿐 한국은 한국 나름의 중요한 다른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선통일 후여권’이라는 공식이 사회운동 자체에 있어서 사실 성차별주의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미국 내 이른바 ‘소수민족’ 남성 신학자들도 인종차별 문제를 더욱 심각한 신학적 문제로 보고 여성 신학자들이 제기하는 여성 문제를 사소하고 덜 중요한 문제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둘째, 여성 문제를 ‘영적 문제로 만드는 것spiritualization’이다. 이 방식은 종교 안에서 쉽게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여성과 남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영적으로 평등하다’는 주장을 강조함으로써 사실상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성차별의 폐해를 보지 않으려는 방식이다. 표면적으로는 평등주의를 말하기 때문에 남성뿐 아니라 많은 여성도 이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또는 반박할 수 있는 논지를 발견하기 어렵게 한다. 사회적 불평등 구조가 ‘영적으로는 평등하다’는 주장 때문에 감추어지거나 간과 되기 때문이다. 표면화된 성차별주의보다 ‘은닉된 성차별주의’가 더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 여성 문제를 ‘특수한 문제로 만드는 것particularization’이다. 성차별 문제가 제기될 때 이를 중세적이라거나 어느 특정 교회나 교단의 문제라고 주장함으로써 여성의 성차별 경험을 ‘지금 여기’가 아닌 특정 시대나 정황에 해당하는 문제로 만드는 방식이다. 개신교는 가톨릭이 성차별주의적 교회라고 말하는가 하면, 개신교 내에서도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교회는 그렇지 못한 교회에만 성차별주의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여성의 성차별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넷째, 여성 문제를 ‘인간 보편의 문제로 만드는 방식universlization’이다. 이는 성차별주의나 가부장주의에 대한 비판적 접근 없이 여성해방을 인간해방으로 봄으로써 오히려 구체적 성차별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는 결과를 야기한다. 여성운동의 모토 중 하나인 ‘여성 문제를 인간의 문제로!women’s issue as human issues!’와 이러한 보편화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동일한 주장 같지만 출발점과 문제 해결 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다. 전자는 성차별 문제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과 남성 모두의 비인간화를 야기하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반反성차별주의 운동의 확산을 의도하지만, 후자는 성차별주의적 억압의 폐해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주장이다. 따라서 가부장주의의 억압성에 대한 비판이나 조명 없이 ‘여성해방’을 ‘인간해방’ 문제에 흡수시키려는 시도는 여성 문제를 진지하게 보기를 거부하는 결과를 낳는다.
--- 본문 중에서
페미니스트 관점으로 보는 교회론은 사실상 이미 무수히 존재하는 교회론에 또 하나의 이해와 해석을 참가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급진적인 ‘변혁’을 모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학은 변혁을 지향해야 한다. 즉 ‘신학 하기doing theology’란, 신학적 주제에 대한 이해와 해석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변혁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교회론은 ‘교리’로서 만이 아니라 ‘운동과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통전성을 이루기 위한 투쟁과 변혁의 장으로서의 교회가 되기 위한 운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새로운 교회 이해는 변화와 변혁의 차원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신학적으로 교회는 모든 이들의 보편적 인간성을 인정해왔다. 그러나 교회가 역사에 관여하면서 지배적이고 억압적이고 가부장제적인 제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따라서 교회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안에서 정의와 사랑을 수호하는 사건들이 일어날 때 비로소 거룩해지는 것임을 끊임없이 재확인해야 한다. 인간의 자유와 통전성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는 교회, 그리고 정의, 평화, 사랑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이루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는 한 개인의 힘이 아닌, 교회의 모든 이들, 즉 성직자와 평신도, 남성과 여성 등 모두의 변화의 노력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다차원적 변화의 노력이 있을 때 새로운 현실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시작될 때, 콕스가 제시한 대로 그동안 오랜 교회의 역사에서 억눌린 순수한 영적 에너지가 ‘거룩한 영Holy Spirit’의 개입과 역사로 교회 안에 복귀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페미니스트 신학적 교회론의 추구는 ‘거룩한 영’의 자유로운 활동 장을 열기 위한 교회 개혁 운동이다. 이러한 교회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큰 정의, 더 큰 평화, 그리고 더 큰 사랑을 향해 ‘열린 교회론’이 되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이러한 상황에서 올바른 신학하기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자아실현의 부정이 여성에게 ‘죄’라는 신학을 가르치지만,59)과연 신학하는 여성에게 자아실현의 장은 어디에 있는가를 진지하게 씨름해야 한다. 이러한 여러 딜레마에 직면한 한국 여성의 상황을 보면서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식민주의 시대 신학의 과제는, 첫째 타자화된 존재로서의 평등의 신학; 둘째 배제된 존재로서의 포괄의 신학, 그리고 셋째 억압된 집단으로서의 정의의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요청 앞에서 여성 신학은 남성중심주의의 탈중심화와 서구적 식민주의와 가부장주의적 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역사성과 일상성에 근거한 신학적 담론을 재구성하는 각론의 신학을 전개해야 하며, 더 나아가 자기성찰적 비판력에 근거한 신학 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