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DNA 가닥에 매달린 꼭두각시
곡을 해석하는 가운데 종종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날 정말 만신창이였어요. 연주자는 작곡가의 지시를 성실히 지켜야 하나, 매 순간 자기 느낌과 정서를 통해 그보다 더 풍성하게 드러내 보여야 하잖아요. 그러지 못하면 음악이 죽어버리죠. 피아니스트 역시 음악 시장에 가면 거래 상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자기 세계를 찾아 개성을 드러내야죠. 노예인 동시에 음악적인 반역을 저질러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몸값이 오르잖아요. 그런데 내가 연주한 작품은 제목부터 ‘당신의 삶’이라, 그토록 확고한 엄마 삶의 노선과 여정에 빨려 들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난 그걸 ‘나의 삶’으로 해석하고 싶었고, 청중의 박수갈채는 오로지 나를 향한 것이길 기대했어요. 하지만 나는 결국 이리스 젤린의 DNA 가닥 저 끝에 매달린 꼭두각시에 불과했어요. 게다가 그날 저녁은 그 가닥들이 모두 뒤엉켜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된 꼭두각시가 악보에 찍힌대로 건반만 누르다 내려온 거죠.
무대 공포증 때문에 그런 건 정말 아녜요. 그건 말도 안 되는 핑계에요. 진짜 문제는 엄마와 내가 전혀 다른 기대, 상반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토록 다른 나너와 너나가 내 귀에 번갈아가며 서로 모순되는 이야길 했거든요. 그게 너무 혼란스러워 내 연주하는 음악 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일 수 없었어요. 서로 다른 요구들이 충돌하다 그 혼란 속에 기선을 제압하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내 고막을 때렸어요. 그건 바로 당신, 나, 아니 우리 둘이 함께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웃음소리였어요.
이리스 젤린 역시 시리가 눌러대는 건반 하나하나 피아노 소리에 함께 몸이 굳어, 마지막 화음이 종료될 때까지 매 순간이 너무도 길고 고역스럽게만 느껴졌다.
이토록 엉망진창으로 연주를 말아먹다니, 이리스 젤린은 민망하고 부끄러워 어쩔 바를 몰랐다. 이 속수무책 상황에서 행여 소리라도 지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추스르느라 굉장히 힘들었다. 아이에게 쫓아가서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한편 무대 위 저 복제인간을 향해 불같은 저주가 일기도 했다.
연주를 마친 시리가 허리를 숙여 인사할 때 파란 드레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리는 더웠다 추웠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겨드랑이에도 땀이 배어 검은 얼룩으로 보일 생각에 더 수치스럽고 민망했다. 다다 선생님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오히려 청중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다시 한번 더 깊이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진열장 속 박제된 파란 나비
수백 개의 눈이 같은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쌍둥이를 향한, 복제인간을 향한 시선에 사람들의 끈적이는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진열장 속 박제된 파란 나비처럼 그렇게 들여다 볼 작정으로 그들은 마치 곤충채집이라도 하듯, 잡아다 죽여 가두어 둘 심상찮은 눈초리로 나를 모두 그렇게 쏘아보고 있었다.
우리 쌍둥이들은 항상 규범에서 벗어난 인생들이었다. 옛날 같으면 바로 죽여 버리거나 로마의 로물루스와 레무스처럼 그냥 길에 버렸다. 샴쌍둥이들은 서커스단에 팔려가 사람을 울리거나 웃기는 광대 노릇을 하기도 했다. 아니면 일찌감치 알코올에 담겨 해부학 실험실의 진열장을 채우는 표본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 쌍둥이는 이른바 ‘생명 실험’의 본보기로도 주목 받아, 살아있는 실험 재료로 관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둘로 나뉜 쌍둥이들은, 그렇게 나뉠 수 없는 보통 인간을 이해하는 방편이 되어 그들에게 마땅한 도움을 주어야 했다. 그래서 나치의 집단수용소에 붙잡혀 온 쌍둥이들을 상대로 서로 다른 분량 혹은 다른 방식으로 병원균을 주입해 서로 비교 관찰하며 측정하고, 적당히 괴롭히거나 토막을 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인종과 소질, 성격 형성에 대한 연구도 쌍둥이를 재료로 답을 찾으려 했다. 이런 생각은 드디어 우리 같은 복제인간의 출산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저기 무대 위에서 떨고 있던 나는 사실 구경거리조차 아니었다. 그 행사에 참석한 청중들은 내 연주와 내 음악을 들으려고 온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세계적 피아니스트 이리스 젤린의 복제인간에 대한 궁금증으로, 그녀와 나를 비교하려고 온 것이었다. 객석에서 수군대는 나에 대한 이야기가 충분히 들렸다. 카타리나 할머니가 나에게 내뱉던 ‘괴물’이라는 쑥덕거림이 여기저기서 다시 들렸다.
긴장된 걸음으로 시리가 무대에서 퇴장하자 고통스런 박수 소리는 곧 멈췄다. 그런데 비밀신호라도 주어진 듯 객석의 관중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스 젤린 쪽에 시선을 모으며 다시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청중들은 복제품의 연주만으로 흡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 짝퉁 말고 진짜를, 오리지널 이리스 젤린을 호명했다.
“연주해 주세요!”
누군가 큰 소리로 먼저 외치자, 사람들이 모두 따라했다.
“연주해, 연주해, 연주해!”
이리스 젤린은 좀 놀랐으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토마스 베버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는 동안 이리스는 눈으로 무대에서 이미 사라 진 시리를 찾고 있었다. 평론가는 이리스 젤린에게 허리를 숙이며 조용히 물었다.
“제가 무대 위로 안내할까요?”
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론가는 이리스 젤린의 휠체어를 무대로 밀고 올라가 피아노 앞에 세워주었다. 객석이 곧 조용해지고, 사람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리스 젤린은 병든 손으로 객석에서 기대하는 〈메아리〉와 〈이슬방울〉 중 몇 곡을 연주했다. 두 오페라의 서곡과 방랑가곡 〈기쁨의 눈물이 흐를 때〉로 마무리했다.
그녀의 연주는 딸의 연주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건 누구 귀에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원본이 지니는 광채, 오리지널의 아우라는 그렇게 사람들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건 마모된 그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원복과 똑같이 복사해도, 그건 어떤 가치도 없는 것이고 진품에는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다.
망가진 복제인간
당신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마쌍! 나는 무대 뒤에서 창작자를 향해 열광의 박수를 보내는 청중들의 소리를 들었어요. 물론 그들이 옳죠. ‘유일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인간은 모두 유일해서, 똑같은 인생 두 개가 존재할 수는 없잖아요. 그건 나처럼 그냥, 있어서는 안 되는 거죠.
오리지널인 엄마를 향해 쏟아지는 우렁찬 박수 소리를 듣지 않으려 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기를 쓰고 귀를 틀어막았어요. 망가진 복제인간, 삶의 목표가 어긋난 쓸모없는 인생, 나 자신이 너무 옹색하고 비참하고, 당신에게 배신당했다는 느낌도 떨칠 수가 없더군요.
그런데 불쑥 야네 오빠가 와서 내 곁에 있었어요. 내가 간절히 기다린 건 이리스, 당신이었는데, 당신 대신 그가 나타나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 주더군요.
“오빠 차 타고 우리 바닷가에 좀 가자.”
내가 부탁했어요.
“며칠만 지내다 오면 안 될까?”
이리스, 당신을 다시 보기가 힘들 것 같았어요. 이제나저제나 행여 엄마가 나를 찾아서 불러주기만을 간절히 바랐지만, 천천히 무대 뒤쪽 출구로 내 발길을 돌렸어요. 당신 삶을 다시 지켜내기에 내 연주는 너무도 수준 이하였던 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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