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이제 오려고 하는 마지막 여름의 어둠을 향해서 나는 속삭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섹스의 기쁨도 모르고 사랑의 감동도 없다. 멀리로 나 있는 길을 바라보면서 나는 스산한 먼지바람 속에 서 있다. 초록빛 강물 냄새와 오래된 풀잎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바다로 가는 길이 이쪽인가요, 하고 차를 멈추고 여행자들이 내게 묻는다. 바람이 나의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길가의 키 큰 마른 풀들을 눕게 한다. 그들의 차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음악이 요란하고 그들은 푸른 사과를 산다.---「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중에서
이런 것 아세요? 이유 없는 고독은 기억 이전의 기억 때문이라고. 절대로 절대로 기억할 수 없는 기억 이전의 기억이 악마처럼 자라나 병을 만들죠.---「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애」중에서
안녕, 잘 가라. 짧은 말이다. 그것뿐이다. 삶이 영원하다면 나는 이렇게 당신을 안지 않았을 것이다. 지독한 고독을 선택한 이 고행이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나는 당신을 욕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징계위원회」중에서
언제인가, 내가 잠을 깬 이 순간은. 언제인가, 하루의 처음 무심코 펼쳐든 책 속의 이야기가 그대로 나 자신의 것으로 되어버리는 그런 때는. 이미 나 자신이거나 앞으로의 나 자신인 그것들.
암시와 회상, 망각과 착각 사이를 오가는 현기증. 그 현기증 사이로 모든 확실한 것들이 빠져나가는 미끌거리는 느낌. 이것이 배수아의 소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익숙하고 안정적인 사물들의 세계가 녹아 없어지기 직전에 이르는 재난의 체험이다. 이 재난이야말로 우리에게 ‘새로운 것’에 대한 체험의 입구로 데려다준다는 점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 우리의 고질병인 근원적인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시적인 재난. 그리고 무엇보다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는 재난. 그 재난에는 분명히 음산하고 고통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거기에는 아름답고 황홀한 측면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_권희철(문학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전공 교수)
배수아의 소설은 익숙한 정체성의 징표들을 버리고 ‘구별된 나’를 선언했다. 부당한 보편성이나 미리 놓여 있는 공통감각으로 환원되지 않는 단독적인 ‘나’를 재발견하기 위해 배수아의 소설은 여행을 계속해온 셈이다. 가족과 성性과 국적과 이름을 거부함으로써, 그리하여 원치 않는 규정과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즉, 배수아의 소설은 ‘나’를 둘러싼 기존의 모든 관계와 절교한다. 때로 이 자발적 고립은 그들을 가두는 동굴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고립과 고독은 ‘나’들에게 일종의 심연을 경험케 한다. 이 어두운 ‘심연’은, 다른 배치 속에서의 나로 나아가기 위한 돌파와 탈출을 위한 극적 조건이다. 심연에서 ‘도약’은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다. _김미정(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