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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샤토브리앙

나폴레옹과 샤토브리앙

: 최초의 현대적 정치인과 정치 작가

[ 양장 ]
리뷰 총점9.5 리뷰 2건 | 판매지수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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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1월 3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650g | 148*210*30mm
ISBN13 9791160870329
ISBN10 116087032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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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브리앙이 1800년 5월에 팔 년이라는 기나긴 망명 생활을 마치고 고국 땅을 다시 밟을 때 마주한 모습은 이처럼 가톨릭교가 뿌리째 뽑히고 모욕당하고 박해받는 프랑스였다. “한바탕 화마가 휩쓸고 가기라도 했던 것처럼 마을들은 무참히 허물어져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진흙에 먼지, 오물, 무너진 건물 잔해뿐이었다. 길 양으로는 무너진 성들이 보였다. 베어낸 나무숲 사이 네모나게 잘린 나무 그루터기들 위에서 아이들이 뛰놀았다. 듬성듬성 이가 빠진 담장 벽들과 버려진 교회들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내몰리고 죽임을 당했다. 종은 사라지고 종탑만 남았고, 무덤에서는 십자가가 사라졌으며, 성인상들은 본래 서 있던 보금자리에서 머리가 잘린 채 내동댕이쳐졌다. 성벽들은 공화당원들이 괴발개발 갈겨쓴, 이미 닳아버린 문구들로 너저분했다. 자유,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따금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지우려고 해보았지만 검붉은 글자들은 이내 석회층 위로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이 나라는 겉보기에는 무너지기 직전의 형국이었지만, 실은 중세의 야만과 파괴의 어둠을 뚫고 나오는 국민들처럼 새로운 세상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십여 년간 탄압과 박해를 거듭했던 반계몽주의는 끝내 가톨릭교를 이기지 못했다. 찬란한 여명은 혁명기 프랑스의 격랑 속에서도 여전히 가톨릭교를 쉼 없이 밝히고 있었다. ---- p.20

권력을 다지기 위해서는 민심을 모아야 했다. 나폴레옹은 브뤼메르(혁명력의 두 번째 달, 10월 22일~11월 21일_옮긴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 왕정복고를 막기 위해 가톨릭 교인들을 자신의 통령 정부에 잡아두려고 안간힘을 썼다. 프랑스 인구에서 가톨릭 교인은 팔십 퍼센트에 육박했다. 따라서 국민적인 타협을 이루려면 가톨릭 교인들의 손을 잡아야 했다. 나폴레옹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도덕 없이는 어떤 사회도 존재하지 못한다. 종교가 없으면 올바른 도덕도 없다. 따라서 국가를 든든하게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종교뿐이다. 종교 없는 사회는 나침반 없는 배와 같아서 항로를 확보하지 못해 항구에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샤토브리앙도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둘 다 가톨릭식의 교육을 받았으나 그다지 가톨릭의 축복은 받지 못했다. 두 사람은 빠르게 불가지론자가 되었지만 결국 가톨릭교로 귀의했다. 나폴레옹은 정치적 기회주의, 샤토브리앙은 문학적 재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옛 자코뱅파(중앙집권적 공화정을 주장한 급진파_옮긴이) 당원들과 탈당자들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정치적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는 개신교를 공식 종교로 채택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새로운 전선을 내세운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 ---- p.21

결별은 소리 없이 이루어졌다. 샤토브리앙은 자신의 진가에 맞는 적수를 찾아냈다. 요직을 맡지 못했지만 그를 보필하는 수고도 없었다. “감히 나폴레옹을 떠난 나는 그와 같은 반열에 올랐다. 그는 마치 내가 충심으로 맞서기라도 했다는 듯 나를 향해 온갖 권력을 휘둘렀다. 자신이 실추할 때까지 양날 검을 내 머리 위에 매달아놓았다. 가끔은 타고난 기질을 발휘해 자신이 누리는 치명적인 번영 속에 다시 나를 끌어들이려고도 했다. 가끔은 나 역시 그에게 탄복할 때도, 단순한 왕조의 변화가 아닌 사회 변혁을 목도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기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관계 속에 서로 상충되는 성향이 다시 드러났고, 그가 나를 총살하려 한다면 나 역시 아무 죄책감 없이 그를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흔히 뭔가를 정말 싫어하는 이유는 으레 그 대상을 통해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이 보여서다. 그렇게 시작된 증오의 역사는 『죽음 저편에 대한 사색』이라는 걸작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 p.46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샤토브리앙은 브르타뉴 출신이었다. 원주민들 스스로도 항상 프랑스인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두 지방의 앙팡테리블(생각보다 태도가 영악하고 조숙한 무서운 아이들을 뜻한다_옮긴이). 나폴레옹과 샤토브리앙도 다른 원주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정적으로 프랑스를 포용하기 전에는 둘 다 외떨어진 고장에서 자랐다. 나폴레옹은 야심찬 유지 집안 출신이었고, 샤토브리앙은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한 아이가 몽상에 잠겨 있는 동안, 다른 아이는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있었다. 낭만주의에 투박한 전원주의로 응답하듯이. ---- p.48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샤토브리앙 역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은 두 사람 모두에게 낭만주의로 물든 영광에 대한 꿈을 키우는 시간이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시골마을 플랑쿠에의 외가댁에 맡겨지는 생애 첫 망명을 가야 했다.” 그곳 외할머니 댁에서 생후 삼 년을 보냈다. 샤토브리앙은 플랑쿠에에서 자라면서 강인하게 단련된 듯했다. 샤토브리앙에게는 누나 여섯과 형 셋이 있었는데, 그중 형 한 명과 누나 네 명만 살아남았다. 샤토브리앙은 네 살 무렵 생말로에 돌아와서도 살뜰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늘 유모들의 품을 전전했다. “[어머니의] 애정은 모두 형에게만 집중되었다.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장남인 어린 콩부르 백작만 맹목적으로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 결국 나는 사람들의 손에 맡겨졌다. 게다가 교양과 기품이 넘치는 어머니는 사교생활과 종교적인 의무들에 몰두했다. […] 어머니는 정치, 떠들썩한 분위기, 사교계를 좋아하셨다[…]. 기질적으로 산만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데다 검소하고 잔소리가 많은 탓에 어릴 때에는 어머니의 훌륭한 장점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명령하지 않고도 아이들을 휘어잡으셨고, 인색한 척하면서도 너그러우셨으며, 늘 투덜댔지만 마음은 여리셨다. 아버지가 집안 식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면 어머니는 골칫거리였다.” 어머니는 샤토브리앙에게 거리감을 뒀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욕까지 했다. “못생겨서는!” 샤토브리앙이 어린 시절 내내 듣던 핀잔이었다. 그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서러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부모의 무관심과 냉대로 고통 받았다. 특히 어머니의 애정에 몹시 굶주렸다. 물론 시대 탓이기도 했지만, 부모는 아버지가 그토록 힘겹게 되살린 가문의 이름과 지위를 굳건하게 지킬 장남만 유독 편애했다. ---- p.64

나폴레옹의 공화주의 사상 뒤에는 사실 코르시카의 독립과 파올리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파올리는 나폴레옹이 몇 차례 부탁을 했는데도 그를 기용하기 꺼림칙한 기색이었다. 사실 파올리는 나폴레옹의 아버지가 예전에 프랑스 측으로 전향했던 일로 보나파르트 일가를 상당히 불신하는 상태인데다 옛 충신들을 더 선호했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프랑스를 몇 번 오가는 과정에서 희망을 품기까지 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십만 명 가까운 의용군을 모집하는 법안이 표결에 붙여지자 희망은 더욱 커졌다. 나폴레옹은 내심 코르시카 의용군을 지휘할 장교에 자신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791년 10월에 다시 코르시카로 돌아갔다. 유럽 군주 세력들을 상대로 예고된 전쟁이 임박했다. 프랑스 국민공회는 선거로 뽑히는 경우가 아니면 장교들이 코르시카 의용군 지도자로 나서지 못하게 금지했다. 나폴레옹은 선택의 여지가 없자 마지못해 선거에 나섰다. 그는 파올리의 지지를 받는 장 바티스트 퀜자와 동맹을 맺고 2인자 역할을 맡았다. 선거는 활기를 띠었고, 결국 1792년 4월 초에 두 사람이 뽑혔다. 며칠 후, 파올리의 사주를 받은 퀜자와 나폴레옹이 이끄는 코르시카 의용군은 프랑스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아작시오 요새를 탈환하려고 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는 중립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결국 코르시카 의용군이 퇴각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나폴레옹은 파올리의 신뢰를 잃었고 명령도 받지 않고 멋대로 행동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7 92년 5월, 나폴레옹은 입신출세를 위해 파리로 돌아갔다. 사실상 프랑스 군대에서 그가 얻은 마지막 휴가는 1791년 12월 31일에 끝난 상황이었다. 1792년 2월 6일, 나폴레옹은 군대 지휘관에서 제명되자 집행부에 자신의 사정을 하소연했다. 마침 왕권이 실추되어 군대 지휘관이 필요했던 터라 나폴레옹은 쉽게 복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위로 승진했다. ---- p.75

1791년 7월 10일,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자마자 샤토브리앙은 미국 독립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을 만나려고 했다. 그래서 아르망 연대장이라고 불리는 라루에리 후작의 추천장까지 받았지만, 당시 워싱턴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결국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도 샤토브리앙은 『죽음 저편에 대한 사색』에 성사되지 않았던 그들의 만남을 이렇게 언급했다. “마음이 상하진 않았다. 나는 원래 영혼의 위대함이나 부의 막대함에 절대 위압감을 느끼지 않는다. 영혼의 위대함에는 위축되지 않을 정도의 감탄을 느낄 뿐이고, 부의 막대함 앞에서는 존경보다 연민을 느낀다. 어떤 사람을 보고 못 보고의 문제로 동요되는 일은 전혀 없다. […] 뭔가 고요한 것이 워싱턴의 행동을 감싸고 있다. 움직임이 차분하다. 미래의 자유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듯하다[…]. 새로운 유형의 영웅이 짊어지고 있는 건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 조국의 운명이다[…]. 과연 그 깊은 겸양에서는 어떤 빛이 솟아오를까! […] 워싱턴은 자신의 전장에 미국이라는 전리품을 남겼다.” ---- p.100

툴롱에서 나폴레옹은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워졌다. 특히 툴롱이 함락된 후 진행된 엄청난 탄압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면서 더 친해졌다. 오귀스탱은 나폴레옹을 맹목적으로 믿었고, 형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에게 나폴레옹의 “탁월한 장점”을 늘어놓았다. 1794년 2월 7일, 나폴레옹은 꿈에 그리던 이탈리아 방면군 포병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사령관이 되어 제일 먼저 맡은 임무는 파리에 진정서를 보내 이탈리아에서 공격을 재개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이었다. 그의 계획은 채택은 되었지만 결국 유보되었다. 그러자 라자르 카르노는 “방향을 잘못 잡은 혁명 조직과 정복정신으로 바뀌어버린 민족정신이 갑자기 프랑스에 확산된 것은 아닌지” 염려했다. 나폴레옹에게 승진 직후는 불확실한 시간이었다. 시대가 혼란스럽다 보니 무작정 충성하기도 위험했고 불운한 일도 많았다. 혁명의 핏빛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 이튿날,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순수하게 믿고 좋아했던 로베스피에르가 그런 참담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만일 아버지가 전제정치를 열망했다면 나 역시 칼로 찔러 죽였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를 무척 존경했지만, 실패한 로베스피에르와 달리 자신은 혁명을 끝내면서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 p.106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은 야망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1796년 3월에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나폴레옹은 영광을 향해 승승장구했다. 툴롱 공성전 이후부터 1795년 방데미에르 사건 사이에 구상된 이탈리아 원정은 대혁명과 프랑스의 전망에 대한 깊은 정치적, 전략적 사색의 결실이었다. 나폴레옹의 구상은 프랑스 혁명의 최종 승리를 목표로 브뤼메르 18일까지 이어졌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대프랑스 동맹의 주요 적국이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를 물리치는 건 혁명을 성공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혁명을 마무리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탈리아는 혁명의 부차적인 무대였을 뿐, 핵심은 외국 군대의 통로를 차단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를 통해 빈으로 가는 길을 열어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방면군은 삼만 명밖에 안 되는 병력에 장비는 보잘 것 없었으며, 군수품 납품업자들이 매수되어 물자 보급마저 어려워지자 여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정면에는 팔만 명의 적군 병사들이 버티고 있었다. 상대는 볼리외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대와 콜리 장군이 지휘하는 피에몬테 군대였다. ---- p.116

나폴레옹은 자신의 장점을 밀어붙여 모 아니면 도로 과감하게 운명을 걸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자신의 운을 쓰고 또 쓰며 남용한다. 이제 두 군대는 수적으로 동등했지만 정신 상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연패를 당하면서 사기가 땅에 떨어진 반면, 리볼리 전투 이후로 스스로 천하무적이라 느끼는 프랑스 군대는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도처에서 오스트리아 병사들이 뒷걸음을 쳤다. 그때 라인 방면군이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칫했다가는 기지에서 멀어질 위험도 간과할 수 없었다. 총재정부는 라인 방면군의 지원이 없어도 행동을 개시하라고 지시했지만, 나폴레옹은 이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1797년 3월 31일,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을 이끄는 카를 대공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번 여섯 번째 원정은 불길한 조짐이 보이고 있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양 모두 몇 천 명은 더 죽을 겁니다. 그러니 합의하는 편이 좋을 것 같소. 모든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아무리 증오에 찬 열정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 p.123

삼십대에 접어들면서 샤토브리앙과 나폴레옹은 운명을 완성하고 영광의 월계관을 받을 준비를 했다. 한 사람은 권력으로, 다른 한 사람은 문학으로. 이제 프랑스와 프랑스인들을 끊임없이 도취시킬 춤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문학과 정치가 서로를 갈구하는 춤의 서막. 이루어질 수도 없고 영원히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랑 같은 춤. 상대 앞에 절대 나서지 않는 사랑. 두 사람 모두에게 커다란 실망만 남기는 사랑. ---- p.138

이상하게도 내부의 반목은 브뤼메르 후원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나폴레옹을 활용해서 제 실속을 챙길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나폴레옹이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온 세상이 알게 되었다. 일단은 나폴레옹과 타협해야 했다. 푸셰 주변의 자코뱅파들, 구체제로 돌아가고 싶은 탈레랑의 온건파들, 벤자맹 콩스탕 곁에서 정치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 브뤼메르를 위해서 그토록 애썼으나 소외되었던 위원회의 관념론자들, 끝없이 비평을 쏟아내는 법제 심의원 의원들, 일부 국가 참사원 위원들, 성공한 동료를 시기하는 대다수의 장군들이 협상에 나섰다. 나폴레옹은 이처럼 다양한 대립에 맞서면서 새로 얻은 권력이 얼마나 불안한지 매일 확인했다. 권력을 확고히 다지려면 다양한 저항운동을 물리치는 동시에 모든 걸 다시 구성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국가 참사원, 입법의회, 법제 심의원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루이 16세처럼은 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폴레옹은 다른 사람들, 특히 장군들을 차례차례 대사 또는 군대 부관으로 보냈다. 그리고 공화파 반체제 인사들을 축출해 의회를 경질했다. 이내 새로운 체제에 봉사하려는 재능 있고 유능한 이들이 여론을 좌지우지했다. ---- p.157

샤토브리앙은 앙기앵 공작이 처형된 직후인 1804년 3월에 사임한 이후로, 비록 신념은 굽히지 않았지만 수입만큼은 손해가 막대했다. 사실 처음 있는 일도, 그때가 마지막도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최후의 순간까지 곤궁하게 살아야 했으니까.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미래의 수입을 담보로 한 어음으로, 빚으로 살아가는 샤토브리앙은 돈만 밝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돈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확실했다. 1804년에 그는 씀씀이를 줄여서 이사해야 했다. 새 황제를 둘러싸고 혼란에 빠진 파리를 벗어나 친구 조제프 주베르의 시골집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글을 썼다. 머릿속으로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로마 황제들의 궁정을 묘사해서 나폴레옹을 징벌할 계획이었다. 제목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순교자들』로 정했다. 그래도 샤토브리앙은 그해, 1804년 가을에는 친구 주베르의 시골집에서 행복했던 듯하다. “오전에는 작업을 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아리따운 언덕 위나 빌뇌브를 에워싼 매혹적인 초원 한가운데에서 평화롭던 옛 시대의 쾌활함이 느껴지는 온갖 유쾌한 장난에 빠져들곤 했다. 평온하고 순박한 느낌이 드는 주베르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은 늘 유쾌하게 지낼 수 있었다. 샤토브리앙이라는 이름이라고는 그가 쓴 저서밖에 몰라서 그저 『기독교의 정수』 저자이자 『아탈라』의 예찬자로만 알고 있던 근엄한 사람들마저 그 순간을 함께 했더라면, 아마도 가장 완벽하고도 사랑스러운 자연스러움에 마음을 열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장난들에 기꺼이 동참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고는 놀라워하면서 결국 이렇게 말했을 터이다. 이 재주꾼은 분명 훌륭한 사람일 거야.” 그곳에 머무는 동안 샤토브리앙은 가족이 쉬쉬하며 숨긴 바람에, 나날이 상태가 불안정해졌던 누이 뤼실이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1805년에는 샤모니 알프스로의 사랑의 도피와 여행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때부터는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정기적으로 몽블랑 여행기를 기고했다. 샤토브리앙은 내면의 망명으로 차분해진 반면, 나폴레옹은 외적인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 p.183

아첨꾼들이나 침묵하는 자들 일색인 무리 속에서 커지는 단 하나의 목소리는 귀에 거슬리는 비평이었다. 위세당당하게 글을 쓰는 샤토브리앙이었다. “나폴레옹이 왕족은 해치웠는지 몰라도 나는 해치우지 못했다.” 검열의 발톱을 통과해 1807년 7월 4일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실린 한 기사에서 샤토브리앙은 독설을 던졌다. “비천한 침묵 속에 노예의 사슬 소리와 밀고자의 목소리만 울려 퍼질 때, 다들 독재자 앞에서 숨죽여 떨고 있을 때, 그의 총애를 잃는 일만큼이나 호의를 받는 일도 위험할 때, 국민들의 복수를 떠맡은 역사학자가 나타났다. 네로 황제가 호사를 누리는 동안 로마 제국에는 이미 타키투스(Tacitus, 로마 제정 초기의 역사가_옮긴이)가 태어났다.” 파리 시민들은 글 속에 담긴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진노는 더욱 컸다. 샤토브리앙은 그 분노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폴레옹이 격분했다. 사람이 화를 내는 건 모욕으로 받아들여서라기보다 그 말이 자신을 겨냥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뭐라! 영광까지 멸시한다고, 감히 세상을 조아리게 만든 사람에게 또 도전하다니! 샤토브리앙은 내가 바보인 줄,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안다! 그놈을 튈르리 계단에서 칼로 베어버릴 테다.’ 나폴레옹은 '메르퀴르 드 프랑스'를 폐지하고 나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 재산은 사라졌어도 내 인격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나폴레옹은 세상에 관심을 쏟느라 나를 잊었지만, 나는 협박의 무게 아래서도 계속 건재할 것이다.” 결국 샤토브리앙은 신중을 기해 망명 대신 근교로 몸을 피했다. ---- p.208

나폴레옹은 망명길에 올랐다. 1814년 5월 3일, 날개가 찢어진 독수리는 엘바 섬에 도착했고, 같은 날 루이 16세의 동생은 똑같은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면서 파리로 돌아왔다. “인간의 얼굴이 그렇게 위협적이면서도 무시무시한 뭔가를 표현한 적이 또 있었을까 싶다. 한때 유럽의 승자였던, 온몸이 상처투성인 정예병들은 한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무수한 포탄들을 눈으로 보았던 이들이었다. 전장의 포화와 화약 냄새를 온몸으로 느꼈던 사람들. 자신들의 장군을 빼앗긴 바로 그 사람들은 전쟁이 아니라 시대 때문에 불구가 된 옛 왕을 맞아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점령당한 나폴레옹의 수도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군대의 감시를 받으면서. 어떤 이들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일부러 보지 않으려는 듯 깃이 달린 넓은 근위병 모자를 눈까지 푹 눌러썼고, 어떤 이들은 분노의 경멸 속에 입 꼬리를 내렸으며, 어떤 이들은 콧수염 사이로 호랑이처럼 치아를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받들어총을 할 때의 몸짓에는 격분과 함께 무기에서 떨리는 소리가 났다. 단언컨대 그들에게는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모진 시련과 고통이었다.” 혁명이 시작된 지 이십오 년 만에 왕이 돌아왔다. ---- p.250

샤토브리앙은 어수룩한 척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마법사가 되었다. 염문을 꽤 많이 뿌렸다. 그중 가장 유명한 연애 상대로는 폴린 드 보몽, 나탈리 드 노아유, 클레르 드 케르생, 뒤라스 공작부인, 델핀 드 퀴스틴, 코르델리아 드 카스텔란, 오르탕스 알라르 그리고 가장 전설적인 상대였던 쥘리에트 레카미에가 있다. 샤토브리앙은 등반가처럼 하나를 잡아야만 다른 하나를 놓았다. 불륜 상대들에게조차 불성실한 셈이었다. 앞에서는 찬사를 바치면서도 뒤에서는 조롱과 변덕, 무심한 태도, 잔인하고 이기적인 행동들을 반복했다.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광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는 사랑했던 여자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는데, 혹시 여자들이 그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불행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수줍음을 타는 성격 덕분에 샤토브리앙은 여러 여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글을 쓸 때는 다작하지 않고 신중하게 썼다. 샤토브리앙은 난봉꾼도 바람둥이도 아닌, 자기도취적 심미주의자였다. 그는 사랑받는다고 느끼기 위해 여자들을 꿈꾸며 이상화시켰다. 샤토브리앙은 한껏 감수성이 고조되었다가도 이내 권태를 느끼고 마음이 갈팡질팡 옮겨 다녔다. 그런 그를 믿는 여자가 바보였다. 샤토브리앙은 젊은 여성들과 있으면 거북해서 상류사회 경험이 풍부한 기개 있는 여성들과 함께 있는 편을 좋아했다. 대개 좋은 집안 출신이거나 결혼을 잘해서 상류사회에 속하는 유복한 여성들이었다. ---- p.263

나폴레옹의 연애에서 중요한 부분은 늘 조제핀의 몫이었다. 1795년 10월, 국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며칠 후에 열네 살 난 외젠 드 보아르네가 나폴레옹을 찾아갔다. 외젠은 어머니 조제핀의 심부름으로 작고한 아버지의 유품인 검을 간직해도 되는지 허락을 받으러 왔다. 파리 시민들에게 무장 해제를 강요하는 국민의회 칙령 때문에 당국에 검을 맡겼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이를 수락하자, 이튿날 조제핀은 개인적으로 감사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그 뒤로도 방문은 여러 차례 이어졌다. 조제핀은 평소 취향으로는 너무나 드문 일이라며 나폴레옹에게 핀잔을 주었다. 나폴레옹은 첫 만남 이후 보름 가까이 조제핀과 밤을 보내면서 용서를 구했다. 두 사람은 석 달 만에 결혼했다. 보나파르트 장군다운 속전속결이었다! 사실 조제핀은 의회에서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었다. 한때 라자르 오슈 장군과 아르망 콜랭쿠르 후작, 폴 바라스의 연인이었던 조제핀은 관록 있는 여성이었다. ---- p.271

영국에서 샤토브리앙은 목사의 딸 샤를로트 이브와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망연자실했다. 그는 『르네』에 절망과 실망을 고스란히 담았다. 망명에서 돌아와 새로운 삶이 펼쳐졌어도 아내 셀레스트와 함께 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망명자 명부에서 말소되기를 기다린다고 핑계를 대면서 아내를 거추장스러워했다. 이내 샤토브리앙은 퐁탄의 오랜 지기 주베르의 소개로 폴린 드 보몽을 만났다. 혁명 때 온 가족이 죽고 혼자 살아남은 폴린은 결핵을 앓고 있었다. “보기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던 폴린은 르브룅 부인이 그린 초상화 속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 수척하고 창백한 얼굴에 아몬드 같은 두 눈에 광채가 넘치도록 가득해서였을까, 반쯤 기력을 잃은 눈빛은 나른하고 그윽하게 빛이 났다. 마치 햇살이 물의 투명함을 통해 은은해지듯이. 성격은 강렬한 감정과 앓고 있는 내면의 병 때문에 조금은 꼿꼿하고 성급했다. 고결한 영혼과 위대한 용기를 지닌 그녀는 만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불행히도 세상과 거리를 두고 은둔했지만, 다정하게 그 고독한 지성을 세상으로 불러내면 다가와서 하늘의 말을 전했다. 폴린은 극도로 쇠약해진 탓에 표현이 느릿했는데, 느려서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다. 곁을 떠날 무렵에야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미 죽음에 사로잡혔고, 나는 그녀의 고통을 달래주려 온몸을 바쳤다.” ---- p.284

『아탈라』, 『기독교의 정수』와 함께 샤토브리앙은 문학의 브뤼메르 18일을 만들어 프랑스 문단을 전복시켰다. “『기독교의 정수』는 나의 걸작으로 남을 것이다. 일대 혁명을 일으켜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문체와 새로운 글쓰기로 가히 어휘의 제국을 세운 샤토브리앙은 정치적 글쓰기와 정치 작가를 만들었다. 앙드레 말로라는 빛나는 계승자로 여전히 영속되는 프랑스의 새로운 전통을 세웠다. 그때부터 문학은 대의를 돕고, 작가는 전사가 되었다. 글 쓰는 작가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갔다. 정계에 들어가 관직을 차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하면서 권력을 잡거나 권력에 맞서면서 정치적 소임을 다했다. ---- p.304

1815년 8월 9일, 나폴레옹 일행을 태운 영국 군함 ‘노섬버랜드’호가 출항해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직행했다. 1815년 10월 17일, 나폴레옹과 그 일행은 세인트헬레나 섬에 내렸다. 일행을 맞은 건 쥐가 들끓는 막사로 이루어진 감옥이었다. 나폴레옹에게는 좁은 방 네 개가 배정되었다. 하인들에게는 나폴레옹의 숙소와 다른 건물 두 채 위 다락방 두 개. 나머지 일행들에게는 부속건물에 있는 초라한 방이 배정되었다. 날씨는 비가 잦고 변덕스러운 편이었다. 감시 체제는 엄격했다. 서신 교환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산책은 밀착 감시 아래 했으며, 이동은 한정된 섬 안에서 동행과 함께 해야만 했다. 경비들은 이중으로 보초를 서면서 감시를 했고, 섬 주민들과의 대화는 금지되었다. 방문객은 엄격한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한데다가 감시 하에 제한된 말 밖에 전하지 못했다. 지출은 이만 리브르에서 팔천 리브르로 축소되었다가, 나중에 나폴레옹이 항의하자 만 이천 리브르로 늘어났다. 감시자인 영국 총독 허드슨 로우는 1816년 4월 17일부터 1816년 8월 18일까지 여섯 번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들의 유배 생활을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갖은 학대를 했다.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그때부터는 급격하게 상황이 변했다. 나폴레옹도 별 수 없이 수행원들 틈바구니에서 질투와 인색한 경쟁관계에 시달려야 했다. 나폴레옹은 물질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조건에서 복종하는 충신을 보게 되었다. 요컨대 남은 생애 동안 나폴레옹을 순교자로 만들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순교는 그에게 전설의 길을 터주었다. 오 년 육 개월 십팔 일 동안 갇혀서 고립되어 속절없이 지낸 나날은 나폴레옹의 영광을 만들었다. 나폴레옹을 멀찍이 떼어놓았다고 생각한 영국인들은 오히려 그에게 전설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 p.358

오 년 동안 나폴레옹은 역경의 동반자들을 일부 잃었다. 라스 카즈가 제일 먼저 떠났다. 1816년 12월 30일, 라스 카즈는 편지 한 통을 빼앗긴 후 아들과 함께 추방되었다. 압수된 그의 글은 1823년에야 돌려받았다. 1818년 3월 14일, 구르고도 떠나겠다고 숱하게 위협한 끝에 결국 지친 나폴레옹을 남기고 섬을 떠났다. 넉 달 후에는 주치의 오미라가 떠났다. 영국인들의 무례한 언동과 나폴레옹과의 우정 어린 관계 사이에서 모순을 느껴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819년 7월 2일, 더는 견딜 수 없었던 몽톨롱 부인은 두 아이들과 함께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인들 중에도 변절자들이 많았다. 아르샹보 형제 중 하나인 상티니와 재무관 루소는 물자 제한을 이유로, 르파주와 장티이니는 병을 핑계로, 후에 1818년 2월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숨을 거두는 치프리아니는 복통을 이유로 들었다. 새로운 하인들이 1819년 9월에 도착했다. 신부인 부오나비타 사제와 비냘리 사제, 의사 프란체스코 안토마르치, 나중에 심각한 병에 걸려서 대체되는 주방장 샹들리에 그리고 급사장 쿠르소가 그때 들어온 이들이다. 나폴레옹은 견디기 위해 삶을 설계했고, 설계한 삶을 위해 예법과 예식을 강요했다. 일과도 습관에 따라 리듬을 정했다.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에 기상. 몸단장과 의사 검진 그리고 날씨에 따라 산책. 오전 열 시경에 홀로 아침 식사. 그 다음에는 회상록 구술 작업 또는 낮잠. 오후 두 시 경이면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욕조에 몸을 담그고 목욕하면서 장교 한 명과 함께 하는 토론 시간. 때로는 심지어 몽톨롱 부인과 그 토론을 함께 해서 터무니없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런 뒤에는 방문객 접견. 오후 네 시경에는 사륜마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 수행하는 부인들을 질겁하게 만들며 유람을 했다. 돌아와서는 작업 및 독서 또는 정원 산책. 저녁 여덟 시 무렵 저녁 식사. 그러고는 살롱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살면서 겪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이야기했다. ---- p.364

1821년 3월 17일, 나폴레옹은 유난히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그야말로 단도로 복부를 쑤시는 느낌이었다. 결국 안토마르치의 부족함을 일시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영국인 의사 한 명이 불려왔다. 하지만 그도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고, 처방한 약도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더 이상 의사들의 무능함에 속지 않았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1821년 4월 13일부터 24일까지 갖은 애를 써가며 유서를 작성했다. 1821년 4월 29일, 그는 숨이 가쁘다고 호소했다. 그의 침대는 창문 두 개 사이로 옮겨졌다. 여러 날이 지나도 나폴레옹은 계속해서 정신착란 상태에 빠졌다가 의식을 잃기를 반복하며 고통스러워했다. 모든 음식을 거부했다. 5월 3일, 그는 마지막으로 비냘리 신부를 불러 병자성사를 받았다. 5월 4일에서 5일 사이에 불안한 밤을 보냈다. 나폴레옹은 자꾸만 침대에서 나오려고 했다. 몽톨롱은 간신히 그를 진정시켰다. 새벽 네 시 무렵, 나폴레옹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군대 앞으로.” ---- p.372

나폴레옹이 실추하고 머지않아 세상을 떠나자, 사실상 샤토브리앙은 대적할 상대가 없어져서 적잖이 실망했다. “나폴레옹이 떠나니 허무하다. 앞으로 다가올 제국도, 종교도, 야만인들도 보이지 않는다. 문명은 최고점에 올랐지만 더는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불모의 물질문명이다. 도덕을 통해서만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길을 통해서만 민족들의 창조에 이르게 되고, 철길은 우리를 더욱 빠르게 심연으로 이끌 뿐이다.” 샤토브리앙은 나폴레옹의 인생에 여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어떤 별도 그의 운명을 저버리지 않았다. 창공의 절반은 그의 요람을 비출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무덤을 비출 테니.” 나폴레옹이 죽으면서 텅 비어버린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샤토브리앙은 자신의 일대기를 썼다. 소멸에 맞선 개인의 영웅적인 새 서사시와도 같은 『죽음 저편에 대한 사색』을 집필했다. ---- p.379

샤토브리앙과 나폴레옹 사이에 진정한 접전은 없었다. 두 천재 사이에 놓인 가식적인 태도와 압도적인 경쟁관계 때문이었다. 남몰래 서로의 입장을 동경했다. 낭만주의는 나폴레옹주의에 저항했다. 프랑스의 두 앙팡테리블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의 장은 정치와 문학이었다. 행동과 사상, 낙관주의와 회의주의, 복종과 비판, 거짓말과 진실, 어둠과 밝음, 야심과 열정이라는 부자연스러운 동맹이었다. 나폴레옹이 샤토브리앙을 무례하게 대한 게 아니라, 샤토브리앙이 나폴레옹을 무례하게 대했다. 군대와 문학의 두 천재는 정치적, 문학적인 쿠데타의 현대성에 눈뜬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성공을 거머쥐었다. 각자의 브뤼메르 18일에. 샤토브리앙은 낭만주의의 다이너마이트로 문학을 폭발시켰다. 그때부터 문학은 대의명분을 도왔다. 샤토브리앙은 문학을 통해 정치를 했다. 글이 정치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 문학의 혁명은 나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빅토르 위고는 이런 전복을 이렇게 요약했다. “샤토브리앙이 되어라.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말라.”
프랑스가 그토록 많은 상징체계들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건 나폴레옹과 샤토브리앙 덕분이다. 두 사람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징표처럼. 군주제를 벗어난 위대한 국가는 비로소 국민들에게 끝없이 갈망하는 꿈을 선사하며 힘차게 날아올랐다. 언제나 더 높고, 언제나 더 원대한 꿈을. 갑갑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꿈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때로는 꿈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다시 시작한다. 한 편의 소설과도 같은 인생을. 필사적인 탐색을. 결코 해소되지 않는 이상에 대한 갈증을. 삶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노력을. 인류 최후의 표시를. 죽음으로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더 훌륭히 거듭나기 위해 끊임없이 기억을 만들어내는 인류를.
----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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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의 재기 발랄한 책을 읽다 보면, 나폴레옹은 위대한 문체를 갖고 있는 작가들에게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케르의 만찬」과 이탈리아 원정 때 조제핀 드 보아르네에게 보낸 편지들에 담긴 서정적인 표현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여느 작가보다도 그를 사로잡은 문인은 다름 아닌 『기독교의 정수』를 쓴 작가 샤토브리앙이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이 샤토브리앙과 직접 대면한 건 1802년 4월 22일 단 한 번뿐이었다. 분명 나폴레옹은 샤토브리앙을 자신과 대적할 만한 적수라고 여겼던 듯하다. 파리 변호사단의 변호사이자 문학사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는 칼을 뽑고 쓴 교차 전기의 맥락에서 다시 한 번 작가와 정치인을 맞붙였다.
-세바스티앙 라파크, [르 피가로]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의 재기 발랄한 책을 읽다 보면, 나폴레옹은 위대한 문체를 갖고 있는 작가들에게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케르의 만찬」과 이탈리아 원정 때 조제핀 드 보아르네에게 보낸 편지들에 담긴 서정적인 표현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여느 작가보다도 그를 사로잡은 문인은 다름 아닌 『기독교의 정수』를 쓴 작가 샤토브리앙이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이 샤토브리앙과 직접 대면한 건 1802년 4월 22일 단 한 번뿐이었다. 분명 나폴레옹은 샤토브리앙을 자신과 대적할 만한 적수라고 여겼던 듯하다. 파리 변호사단의 변호사이자 문학사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는 칼을 뽑고 쓴 교차 전기의 맥락에서 다시 한 번 작가와 정치인을 맞붙였다.
-세바스티앙 라파크, [르 피가로]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는 『말로와 드골』, 『모네와 클레망소』에 이어 이번에는 『나폴레옹과 샤토브리앙』의 교차 전기물을 완성했다. 책 한 권에서 두 위인의 전기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보완해 가며 함께 담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서로를 찬미한 동시에 서로를 증오했던 위대한 두 남자,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편의 회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 지어진 두 남자를 앞세운 탁월한 책이다.
-오드리 르 루아, [악튀알리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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