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마 한가롭게 푹신한 의자에 엉덩이를 파묻고 이 책을 펼쳐 든 채, ‘이 책 재미있겠는걸’이라고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리오 영감의 불행한 이야기를 다 읽은 다음 당신은 곧장 맛있는 저녁을 먹을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의 그런 무심함을 작가 탓으로 돌릴 것이다. ‘참, 과장도 심하군’이라고 생각하거나 ‘너무 시적으로 썼어’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꼭 알아두시라! 이 드라마는 허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모든 것이 사실이다. 너무도 사실적이라서 읽는 이는 이 드라마에서 자기 집, 또는 자기 마음속에서 벌어질 만한 일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p.11
부인이 죽자 고리오의 마음속에는 아내를 향한 사랑 대신 부성애라는 감정이 무럭무럭 자라나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되었다. 아내에게 쏟던 애정을 그는 두 딸들에게 옮겨 쏟아부었다. 그가 부자인 것을 다들 알았기에 자기 딸들을 아내로 주겠다며 접근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지만 그는 그냥 홀아비로 살겠다고 했다.
그는 당연히 두 딸에게 분에 넘치는 교육을 시켰다. 연 수입 6만 프랑 이상의 부자이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단 1,000프랑도 쓰지 않는 그가 딸들 교육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딸들은 승마도 했고 마차도 가졌으며 마치 부유한 늙은 영주의 정부라도 되는 듯이 풍족한 생활을 했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도 딸들이 하고 싶다면 아버지는 스스로 서둘러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그는 딸들이 자기에게 잘못하는 짓까지도 사랑할 정도였다.
딸들이 출가할 나이가 되자 그녀들은 각자 취향대로 남편을 선택할 수 있었다. 딸들이 각자 아버지 재산의 반씩 지참금으로 가져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스타지는 미모 덕분에 레스토 백작의 구혼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귀족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를 배우자로 택했다. 반면에 델핀은 돈을 좋아했다. 그녀는 독일 출신으로 신성로마제국의 남작이 된 은행가 누싱겐 씨와 결혼했다.
고리오는 그 뒤로도 제면업에 계속 종사했다. 딸들과 사위들은 그가 이 사업을 계속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체면이 손상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일을 그만두라는 딸과 사위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는 상점을 팔고 은퇴했다. 은퇴한 후에도 그의 수입은 연간 8,000에서 1만 프랑은 되었다. 두 딸은 은퇴한 아버지를 집에 모시기를 꺼려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자기들 집에 드나드는 것까지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완전히 홀로 된 영감은 결국 보케 하숙집에 투숙해서 숙식을 해결하게 된 것이다. --- p.76~78
“아니, 이보다 더 나은 데 살면 뭐하려고? 당신에겐 설명하기 어려워. 요컨대 이거야. 내 인생은 내 두 딸에게 있다, 이거란 말이오. 딸들만 따뜻하면 나는 춥지 않아요. 딸들이 웃으면 나는 하나도 지루한 게 없어. 내게 슬픔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딸들이 슬플 때뿐이라오. 자식이 행복해질수록 더 행복해지는 것, 이런 건 설명 못 해요. 학생도 나중에 알게 될 거요.
아마, 이건 이해할 거야. 나는 아버지가 되고서야 진정으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오. 저렇게 사랑스러운 딸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소? 다만 나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내 딸들을 사랑해요.
이봐요. 내 사랑스런 딸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사람 신발도 닦아주고 그 사람 심부름도 다 해줄 수 있소. 그 아이 하녀를 통해 그 마르세라는 사람이 못된 개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소. 그놈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니까. 그렇게 예쁜 내 딸을 사랑하지 않다니!”
외젠의 눈에 고리오 영감이 숭고해 보였다. 고리오 영감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를 빛나게 한 것은 타오르는 부성애 바로 그것이었다. 이 순간 영감의 목소리에는 위대한 배우가 보여주는 몸짓 같은 것이 있었다. --- p.111~112
“오, 가엾은 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네가 이 친구 집을 마련하고 마치 결혼 앞둔 신부처럼 이것저것 사들이는 걸 보면서 ‘우리 딸 형편이 어렵겠다’고 생각했단다. 소송 대리인 말로는 네 남편에게 제기한 소송을 통해 그자가 재산을 내놓기까지는 반년 넘게 걸릴 거라더라. 나는 생각했단다. ‘좋아, 내 평생 연금 공채를 팔면 되지!’ 그래서 매년 1,350프랑씩 받을 수 있는 연금 공채를 팔았어. 그걸 1,200프랑짜리 연금 공채로 바꾸고 나머지 돈으로 물건 값들을 지불한 거야. 나는 그 정도로도 충분히 지낼 수 있어. 나는 저 하숙집 꼭대기 방에 살면서 1년에 150프랑만 내면 돼. 또 하루에 2프랑이면 왕자처럼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어. 난 낭비도 안 하고, 옷도 거의 필요 없어. 그러니 1,200프랑이면 오히려 돈이 남아. 자, 너희도 행복하지?”
누싱겐이 아버지의 무릎으로 뛰어오르더니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사랑하는 아버지, 진짜 우리 아버지! 하늘 아래 아버지 같으신 분은 둘도 없으실 거예요.” --- p.185~186
6시에 고리오 영감의 시신은 묻혔다. 무덤 주위에는 딸들이 보낸 사람들이 서 있다가 노인의 영혼을 위한 짤막한 기도가 끝나자마자 사라졌다. 매장 일꾼이 일을 끝내자 외젠에게 와서 팁을 달라고 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크리스토프에게 1프랑을 꾸어야 했다. 돈을 꾼 것 자체는 별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라스티냐크의 마음속에 무서운 슬픔이 밀려왔다.
해는 지고 축축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그는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리오 영감과 함께 청춘의 마지막 눈물을 묻어버렸다. 순수한 마음, 거룩한 감정에서 우러나온 눈물이었으며, 그 땅에서 다시 샘솟아 하늘까지 가 닿을 그런 눈물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스티냐크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크리스토프는 그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 하숙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라스티냐크는 높은 언덕 쪽으로 몇 걸음 걸어 올라갔다. 센강 양쪽 기슭을 따라 등불이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등불을 따라 구불구불 누워 있는 파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가 뚫고 들어가고자 했던 그곳, 방돔 광장 기둥과 앵발리드 둥근 지붕 사이, 그 멋진 사교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웅웅거리는 벌집과도 같은 그곳에서 꿀을 빨아내기라고 할 것 같은 시선으로 그곳 파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중하게 말했다.
“자, 이제 파리와 나, 우리 간의 대결이다!”
라스티냐크는 저녁을 먹으러 누싱겐 부인 집으로 향했다. 그 사회에 대한 그의 첫 번째 도전의 발걸음이었다.
--- p.255~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