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정치가 실패한 나라
‘불황 10년’이라는 제목으로 모아놓은 나의 글들은, 아주 드물게 ‘약은 해법’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몇 십 원을 더 내는 정도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지만,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이 움직이는 일에 대해서는 옳은 것보다는 약은 것이 더 먼저일 수밖에 없다. 그게 우리의 삶이다. 그렇지만 너무 약은 해법만으로 이야기들을 구성하지는 않았고, 옳은 것과 약은 것에 대해서, 아주 긴 시선으로 한 번쯤은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려고 노력했다.
일본과 한국이 지독할 정도로 닮은 하나가 있다면, 정치는 ‘끝판왕’, 정말로 후진적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과 일본은 특이한 정치 구조 안에서도 사람들이 죽어라고 열심히 살아서 이만한 모습이라도 가지게 된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경제가 힘들어지면 정치가 좀 더 현명해지고 고분고분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한국이나 일본이나 경제가 힘들어지니까 정치가 더 난리를 친다. 아주 곤란한 상황이다. 20년 전 일본이 어떻게 했는지, 예를 들면, 골프장이나 테마파크, 지방 공항 건립과 같은 초기 대처에서 고이즈미 시절의 우정국 민영화까지…… 이미 우리가 충분히 지켜본 상황이다. 그런데 그 20년 뒤를 우리의 정치인들이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 복사본이라고 할 정도로 똑같이 하고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정치를 바꿔 우리의 삶을 바꾸자! 맞는 이야기인데, 냉정하게 말하면 일본에서도 아직,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그런 가능성은 전혀 안 보인다. 한국에서는 20대, 일본에서는 30대가 이미 한 번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이 정도면 정치권이 움직여 그 사회의 자원 배분을 크게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맞는데, 끝까지 부동산 버블로 결국 여러 채의 집을 가진 사람들을 살리는 방향의 결정을 한다.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조치인데, 한일 양국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치가 먼저 변화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맞는 방향이기는 한데, 불행히도 그게 향후 10년 내에는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한국의 정치가 10년 내에 좋아질까?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전에 좋은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삶이 먼저 무너질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그런 사례가 몇 번 있었는데, 1929년 대공황 이후 무너진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좋은 정치를 기다리다가 사람들이 먼저 망했다.
그러나 경제학자로서, 정치가 실패했다고 해서 개개인의 삶도 실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개인이 살아남아야 더 넒은 차원에서 다음 단계의 구상이나 도약을 도모할 수 있는 있다.
이 책에서 내가 각 분야에 대해 분석하고 제시한 내용은 친밀하고도 사랑하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해준 조언의 기본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정리한 것이다. 대부분 ‘약은 방식’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지금의 한국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국민’인데, 정부 부채에 비하면 개인 부채가 너무 많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시나리오가 일본처럼 ‘가난한 나라에 부자 국민’이 되는 경우이다. ‘가난한 나라에 더 가난한 국민’, 이건 중남미의 여러 국가가 걸어간 길인데, 그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들이라도 부채를 좀 털고, 씀씀이를 조정하고, 저축을 늘려서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모자 9개를 가진 사람과 모자 1개를 가진 사람의 만남’과 같은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모자 9개를 가진 사람이 결국 1개 가진 사람의 모자를 빼앗아서 10개를 채운다는. 우리 대부분은 모자 1개를 가진 사람들이다. 불황 10년을 맞아 우리가 치르게 될 게임의 기본은 자기 머리에 딱 1개 있는 모자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10년, 독자 여러분의 ‘그 모자’가 앞으로도 계속 여러분의 머리 위에 있기를 기원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