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중순이었다. 혹자에 따르면 이승의 왕후가 저승의 왕후로 탈바꿈하는 날이었다.
여자는 머리에 쓰고 있던 입모(笠帽, 부인들이 쓰던 밀짚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새카만 몽수(蒙首, 일종의 쓰개치마)도 흘러내렸다. 자줏빛 술이 달린, 옅은 빛깔의 황견(黃絹) 치맛자락이 드러났다. 목에 건 염주도 풀었다. 어쩐지 죄인답지 않은 복색이었다.
여자는 군중 앞에 나섰다. 별의별 윤색된 이름으로 그녀의 평생을 모욕하던 민초들이었다. 짚더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참수(斬首)를 기다렸다. 이 나라의 임금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처형이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골을 낼 것이다. 그토록 절절히 사랑을 갈구했던 사내가 통보할 수 있는 최악의 이별이었다.
봉두난발과 복면으로나마 낯을 감춘 망나니가 절뚝대며 앞으로 나왔다. 그가 손에 쥔 칼날이 서슬 퍼렇게 번뜩였다. 죽음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최후의 속임수를 쓸 시간이다. 여자는 어깨를 당당히 폈다. 시선은 정면을 향했다. 억지로라도 의연한 척해야 했다. 원하는 대로만 보고 기억하기 마련인 사람들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이다. 사실은 겁이 났다. 달아나고 싶었다. 허나 여기서 비굴해지면 기어이 자신은 부정한 요부(妖婦)로만 역사에 남을 것이다.
문득 망나니가 여자의 뒤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낯선 외국어였다. 여자는 무심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목이 정확하게 드러났다. 바로 그 순간을 노려 섬광과도 같은 칼날이 날아들었다.
이윽고 인생의 모든 조각들은 한바탕 꿈처럼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 ◆ ◇
오랜 전쟁이었다. 결사항전을 벌였다. 조정은 바다를 접한 섬으로 도읍을 옮겼다. 민초들은 누가 시키기도 전에 의병을 자처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이민족의 우두머리를 황제로 섬기며 과중한 공물을 바쳤다. 딸들은 공녀로 보냈다. 이는 비단 양인들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귀족들도 피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래도 적응해야만 했다. 비록 국왕은 전처럼 외왕내제(外王內帝, 국외에선 제후로 국내에선 황제로 칭함)조차 못 할 신세로 전락했으나, 이민족 제국 황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부마국의 지위나마 얻었다. 새로운 권력관계를 등에 업고 권세를 틀어쥔 이들도 있었다. 관직을 독점하고 어마어마한 땅을 차지하며 떵떵거렸다. 세간에서는 그들을 부원배(附元輩)라 일컬으며 몹시 미워하였다.
지난한 복종의 세월은 80년 가까이 이어졌다.
리(異)는 진정한 사랑을 믿는 사내였다. 사람에겐 누구나 붉은 실로 맺어진 인연이 있다고 믿는 국왕이었다.
그는 젊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체구는 유려한 버드나무 가지처럼 늘씬했고, 묘한 밤색 눈망울에선 쾌활함이 빛났다. 반듯한 이마로 부드럽게 흘러내린 머리칼은 비단 같았다. 혈통 또한 괄목할 만했다. 그는 이런저런 정치적 이해관계와 족보상 문제가 꼬인 탓에 기적적으로 탄생한 ‘토종’ 임금님이었다. 이민족 제국의 피가 아예 안 섞였다곤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의 모후(母后)는 제국의 황녀가 아닌 순수한 고려인이었다. 오랜 세월 제국의 광포한 통치에 신음한 백성들은 충분히 열광했다.
그런 리가 맨 처음 사랑을 느낀 여인은 의외의 상대였다.
화국장공주. 이름은 보리살리. 제국 황제의 누이. 그녀는 본디 리의 형님과 가약을 맺었다. 그러나 병약했던 새 신랑은 금방 병사(病死)하였다. 때문에 제국은 입장이 공교로웠다. 차남으로서 그다음 서열인 리를 고려의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이야 별일 아니었다. 허나 더는 짝지어줄 황녀가 없었다. 안 그래도 제국의 피가 덜 섞인 왕자를 후계로 승인하는 게 껄끄러운 참이라 실로 난처했다. 하여 궁여지책으로 제국은 화국장공주를 리와 재혼시켰다.
애초에 거역할 수 없는 처지라는 굴욕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국장공주에게서 운명을 느꼈다. 척박한 땅을 딛고 자라난 제국 특유의 의연함을 지닌 여자였다. 자태는 풍만하고 미색도 빠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려서 모후를 잃고 외롭게 자란 그를 포용해줄 여섯 살 연상의 여자, 어머니처럼 기댈 수 있는 반려였다.
열여덟 살 풋풋한 연심을 담아 리는 화국장공주에게 구혼했다.
“천하의 그 어떤 여인도 그대에게 견줄 순 없습니다.”
화국장공주도 새 신랑감이 싫지 않았다. 잘생긴 소년이었다. 자신의 위엄과 광활한 제국을 동경하는 어수룩함도 귀여웠다. 그리고 그녀는 고귀한 핏줄로 태어나 제후의 비(妃)가 되리라 평생을 마음에 다지며 자랐다. 과부 딱지를 달고 초라하게 귀환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완벽하게 연모하고 있사옵니다.”
그녀는 제국의 억양이 강하게 튀는 고려말로 화답하였다.
신혼은 달콤했다. 국혼(國婚)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즉위하였다. 리는 화국장공주가 수놓은 비단을 연정의 증표로 가슴팍에 품고 다녔다. 그녀가 제국의 복색과 언어를 고집하는 것도 내버려두었다. 제국에서 따라온 그녀의 시종들이 방자하게 굴어도 용서했다.
백성들은 실망했다. 이번 임금도 우리의 편이 아니라고 통탄하였다. 그러면서도 희망을 놓진 못했다. 언젠가는 모두를 구원해줄 왕이 나타나리라는 믿음마저 없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만큼 화국장공주는 리에게 있어 모든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고, 처음으로 살을 섞었고, 처음으로 아내로서 존중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음만 영원히 붙들고 살 순 없는 사내였다.
다 죽이고 싶다.
애린은 궁정의 호화로운 치장을 멀거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황금칠을 한 저 문을 잠가놓고 기름을 끼얹은 다음 불을 지르면 아주 활활 타오를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제 기분이 상한 것만 따진다. 자신은 마음이 약하며 상처를 쉽게 받으니 예의를 갖춰달라는 둥 미리 방어하면서도, 온갖 합리화로 떡칠한 이유를 붙여 남에게 상처를 줄 땐 거침이 없다. 칭찬에는 한없이 인색한 주제에 갖가지 하찮은 트집을 잡으려 눈에 쌍심지를 켜기도 한다.
오늘도 그렇다. 아침부터 불쾌한 일을 겪었다. 애린은 제국에 사는 고려인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제국은 고려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사람에 대한 부분은 더 심했다.
『입시하라신다.』
거만한 표정의 궁녀가 미물을 대하듯 불쑥 말을 걸었다. 덕분에 애린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단조로운 웃음 한 자락을 입가에 걸쳐야 했다.
『감히 황후를 알현하옵니다.』
이윽고 애린은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제국 황실의 정궁황후(正宮皇后, 제1황후). 존함은 답나게리. 옥안에는 늘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으며, 사치를 멀리하여 검소한 의복만 고집하였다. 또한 아랫사람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애린은 그것이 모종의 처세술이라는 걸 알았다. 황금보다도 휘황찬란한 맞수를 견제하기 위해서 꾸민 가면일 뿐이다.
『초하룻날 제국을 떠난다면서?』
『예, 아비가 맡은 소임을 다했으니 응당 물러나야지요.』
애린의 부친은 뛰어난 역관이었다. 제국어에 능숙할뿐더러 특유의 풍습과 예의에도 익숙하였다. 그래서 고려의 왕후인 화국장공주의 눈에 들었다. 자연스레 고려왕의 신임도 샀다. 하여 작년부터 제국에 체류하며 나랏일을 거들었다. 그런 아비를 닮아 애린도 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한 조혼(早婚)을 하지 않았으므로 신세가 자유로운 덕에 용케 아비를 따라 제국에도 올 수 있었다.
애린이 조혼을 하지 않은 까닭은……. 적어도 지금은 논할 필요가 없다.
『내가 그동안 왜 너의 황궁 출입을 요하였는지 아느냐?』
답나게리는 그동안 한 번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애린은 그 속내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황실의 차황후(次皇后, 제2황후) 개(介)씨. 그녀의 본관은 여주로, 고려 태생의 공녀(貢女)였다. 다른 공녀들 같았으면 온갖 착취에 시달리다 스러졌겠지만 그녀의 운명은 남달랐다. 미모와 지력으로 고려 출신 환관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 환관은 황제의 다과를 도맡는 자리에 그녀를 밀어넣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녀는 몹시 총애 받았다. 다만 속국의 여자를 국모로 둘 수 없다는 여론에 밀려 정궁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개황후를 대하는 답나게리는 명문가 출신의 온순한 여자였지만 나름의 전략은 짜야 했다. 가면을 썼다. 아랫사람인 개황후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비록 처음에는 속국 사람들의 처지를 살펴 황제를 내조한다는 구실로 애린을 불렀지만, 사실 그녀를 가까이 두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적수를 잘 파악하기 위해 동족을 연구하는 전술! 과연 황궁은 향낭과 노리개로 치장한 여자들의 아름다운 전쟁터였다.
『마마의 덕성을 배워 황공했을 뿐, 그 밖의 일은 모르옵니다.』
애린은 순진한 척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그래야지.』
과연 답나게리는 그러한 처신에 만족했다.
『고려로 돌아가면 화국장공주에게 안부나 전해다오.』
『미천한 소녀가 왕후를 뵈올 일이 있겠사옵니까.』
『듣자하니 고려왕이 난봉꾼이라던데.』
답나게리는 미묘하게 웃었다.
『허면 또 모르지. 어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애린의 검은 눈이 순간 번뜩였다.
공식적으로 고려왕에게 화국장공주 외의 여자는 없다. 제국의 눈치가 보여서인지 후궁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물밑에선 무수한 여자들이 왕의 손길을 탔다. 대개 하룻밤 상대가 고작이지만, 길면 1년 넘게 왕을 섬기는 경우도 있다고.
처음에 화국장공주는 불성실한 지아비에 맞서 싸웠다. 왕의 첫사랑으로 지낸 세월의 여운이 짙어 그의 부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잔소리를 해봤자 수법은 교묘해지기만 할 뿐이다. 강력한 친정에 호소해도 여느 정숙한 아내들처럼 그 정도 일탈은 모른 척 눈감으라는 조언만 돌아왔다.
화국장공주는 자신감을 잃어갔다. 젊음의 절정기를 맞이한 잘생긴 왕에게선 후광이 비칠 지경이었다. 반면 그녀는 지아비보다 여섯 살 연상인 까닭에 필연적으로 먼저 세월의 풍파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어서 제국의 피가 섞인 고려의 후계자를 낳으라는 친정의 무시무시한 독촉은 싱싱했던 마음마저 병들게 했다.
그래도 화국장공주는 여전히 자신의 지아비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불성실한 지아비일지언정 다정했다. 왕은 하늘이 정해줄 때 건강한 아들이 생길 거라며 그녀를 위로했다. 다른 여자의 품에서 놀다가도 언제나 화국장공주에게로 돌아오는 나름대로의 헌신도 보였다.
숱한 체념의 끝에, 화국장공주는 결국 그 정도 호의에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화국장공주만 가엾지.』
답나게리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내들은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도 여자에게 자신이 위대하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한단다.』
처음으로 애린은 답나게리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앞으로도 전하께서 중전마마의 찬사에만 만족하실지 모르겠사옵니다.』
도발적인 응수였다. 어쩌면 여태 애린을 잘못 파악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의혹이 답나게리의 심중에 무심코 피어올랐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때도 우리 둘 다 무사할까?』
애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곧 있으면 천하를 소유할 마냥 몹시 뻣뻣한 절만 올렸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