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내 몸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게 싫어. 이게 말이 되는 소린지 모르겠지만. 난 그냥 산소를 이산화탄소로 바꾸려고 존재하는 도구 같아. 이…… 광활한 우주에서 그냥 하나의 유기체 같다고. 그리고 소위 내 ‘자아’라는 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도 무서워. 예를 들어서, 너도 분명 눈치챘겠지만, 지금 내 손에서는 땀이 나고 있어. 땀이 나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인데도 말이야. 그리고 일단 땀이 나면 멈출 수가 없고, 땀을 흘리고 있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선택할 수 없다면 어쩌면 나는 진짜가 아닐 수도 있잖아, 안 그래? 어쩌면 난 그냥 나 자신에게 속삭이는 거짓말일지도 몰라.”
“사실 난 네가 땀을 흘리는 줄 전혀 몰랐어.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해도 분명 도움이 안 되겠지?” --- p.118
집에 도착해 욕실로 가서 상처를 확인했다. 아까보다는 덜 부푼 듯했다. 아마도. 욕실 조명이 약해서 잘 안 보이는 걸 수도 있지만. 비누와 물로 상처를 씻고 잘 말린 다음, 다시 살균제를 바르고 반창고를 감았다. 늘 먹던 약도 먹고, 몇 분 뒤에는 공황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복용하라고 한 길쭉한 하얀색 알약도 먹었다.
혀에 알약을 올렸더니 희미한 단맛과 함께 녹아내렸고, 나는 약효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무언가가 날 죽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언젠가는 무언가가 날 죽일 것이다. 다만 그날이 오늘인지 아닌지 모를 뿐이다. --- p.148
나는 아까 데이비스가 한 질문,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을 생각했다. ‘사랑에 빠지다’는 참 이상한 표현이다. 마치 도랑에 빠지거나 바다에 빠져 죽는다고 할 때처럼 ‘빠지다’라는 표현을 쓴다. 사랑 외에 다른 것, 이를테면 우정이나 분노, 희망에는 ‘빠지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에만 빠질 수 있다 --- p.166
내 얼굴을 바라보는 데이비스의 얼굴을 보며 데이비스를 비춰 주는 불빛이 실은 내 방의 불빛임을 깨달았다. 상대의 침실 불빛이 각자의 액정에서 흘러나와 서로를 비춰 주고 있었다.
내가 데이비스를 볼 수 있는 건 데이비스가 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뿌연 은색 불빛 속에서 서로 상대에게 나를 드러내는 두려움과 흥분을 느꼈다. 마치 내가 있는 곳은 내 침실이 아니고, 데이비스가 있는 곳도 데이비스의 침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 우리 둘이 함께 있는 듯했다. 상대의 의식 속에 들어간 듯했다. 진짜 몸이 있는 현실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친밀감이었다.
전화를 끊은 뒤, 데이비스가 문자를 보냈다. 난 우리가 좋아. 진심으로.
왠지 모르게 나는 그 말이 믿겨졌다. --- p.199
가족 중에 죽은 사람이 있다는 건 엿 같은 일이다. 과거의 빛에서 위안을 찾는 데이비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앞으로 3년이 지나면 데이비스는 또 다른 별, 더 먼 과거에 있는 별을 찾아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별로 삼을 것이다. 그러다 또 시간이 지나면 더 멀리 떨어진 별, 또 더 멀리 떨어진 별을 사랑할 것이다. 빛이 현재를 따라잡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