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생애는 고요한, 어스레 반짝이는 에이번 강 근처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강은 그가 묻혀 있는 스트랫퍼드 성 삼위 일체 교회 곁을 흐르고, 강은 전 세계 방문객들이 그의 연극들을 관람하고 방청하는 한 극장도 지나간다. 드물게 홍수가 지면 강은 사납고 파괴적이라 행로를 가로막는 다리와 많은 것들을 휩쓸어 버리지만, 대개는 땡땡이 소년이나 끈기 있는 낚시꾼들에게 쾌적했고, 물 자욱 흉한 바위나 엉겨 붙은 모래가 큰 배 정박을 위태롭 게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강은 영국 동부 네이즈비 근처에서 풀 덮인 고원으로 들어서고, 몇 마일 동안은 에이번이라 하기가 좀 그렇고, 이 ‘에이번’ 용법은 켈트계 유럽 전역에 메아리친다: 브르타뉴 지방의 에이번 혹은 아벤, 이탈리아 아벤자, 그리고 스페인 아보나. 이 에이번은 처음에 그냥 실개천 정도이다가 버드나무 숲 개울로 이어지지만, 고도古都 워릭 아래에 이르면 느리게 또 장중 하게 워릭셔를 가르며 잉글랜드 한가운데를 베어 낸다. 북쪽으로는 아든 지역인데, 아든 숲은 셰익스피어가 살던 중세 때보다 더 옅어졌다. 이곳에는 들쭉날쭉한 밭과 평원, 해자를 두른 농장, 일군의 오두막들이 자리했지만, 마을은 별로 없었다. 남서쪽은 펠든, 새 풍치림 공원이 클랍턴과 골디코트, 에팅턴과 찰 코트에 조성되었다. 주변에는 좁은 줄로 경작된 밭들과 물론 십일조 곡식 저장 창고, 마을, 그리고 흑백의 반半목재 오두막들이 있었다.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은, 아든과 펠든 사이, 양쪽 산물을 교환 할 수 있는 장터 읍이었다. 서쪽 웨일스 언덕들이 비그늘 역할을 했으므로 기후가 온화했다. 농부들은 에이번 계곡 토지가 비옥한 것을 알았고 헨리 7세 치세 읍 후원자 휴 클랍턴 경이 놓은 다리를 활용, 시장에 물건을 내갔다. 1540년경 고고학자 존 릴런드는 14개 돌 아치가 있는 스트랫퍼드 다리를 보았고, 잘 짜여진 읍 설계에 주목했다. 구舊 스트랫퍼드 남쪽 교구 교회가 솟고, 여기서 북쪽, 부분 포장된 깨끗한 거리들을 걸으면 초등학교 설비의 ‘교사의 집’, 빈민구호소 구역, 길드 홀과 길드 예배당이 보인다. --- p.18~19
그의 재치와 희극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관객을 편하게 하기는커녕, 셰익스피어가 인간의 성격을 묘사하는 방식은 진실한 동시에 심오하게 까다롭다. 인간 성격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어떻게 보면 무자비했다. 인간적 곤경에 대한 그의 공감을 결코 넘어서지 않지만. 그가 자료를 사용하면서 가하는 주된 변화는 동기 및 정서와 연관이 있다; 그는 감정의, 그리고 폭력의 조야한 단순성을 거부한다, 자신의 무대 폭력은 확실하게 최대 효과를 발하게끔 하지만. 동료들에게 자극 받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었으며, 그의 드라마가 이제껏 어느 드라마도 하지 못한, 훌륭하게도 배우들의 일신과 관객 영향력을 담보함으로써, 언제나 그 이상을 주었다. 극단의 가장 세련된 솜씨에 도전장을 내밀지만, 자신의 작품을 연기하는 자들에게 그가 후하게 보답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으레 분위기, 주조, 그리고 템포를 행마다 바꾸는 식으로 대본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실상, 다양한 내면을 활용할 기회를 배우에게 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가 항용 배우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그리고 아마도 그가 그룹을 필요로 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만인의 마음을 지닌’ 것은 자신의 지적인 그리고 영적인 노력, 그의 추구, 그의 희망과 불만에서 기인한다. 자기 작품의 변증법으로 인간 성격에서 근거 있는, 가치 있는, 혹은 가능한 것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어두워진다. 헨리 8세, 그리고 『숭고한 두 친척』의 팔라몬과 아사이트는 우리의 무감각, 신의 부재, 그리고 눈먼, 이기적인 열정의 상투성, 진부함을 대표한다, 마치 인류의 황량한, 실망스런 과거가 더 황량하고 더 비극적인 미래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라는 듯이. 그렇지만 『숭고한 친척』 결말 부분 테세우스의 대사에서, 셰익스피어는 아마도 은연중 삶 자체에 대한 감사를 표한다.
1616년 부활절은 일찍 왔다, 3월 31일. 부활절은, 온갖 축복받은 그 의미에도 불구하고, 정작 4월을 축복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장티푸스 열 환자는 끊임없는 두통, 권태, 그리고 불면증, 그러다가 끔찍한 갈증과 불편에 시달린다. 용모가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그 열병의 원인이 무엇이었든, 성 삼위일체 교회에 설치된 셰익스피어 초상 얼굴은 그의 데드마스크를 본뜬 듯하다. 두 눈동자는 응시하고, 얼굴은 무겁고 코는 작고 오뚝하다. 근육의, 그리고 아마도 콧구멍의 위축 때문에, 윗입술이 늘어났다. 대체로, 간호를 워낙 잘 받았으므로 셰익스피어의 비참한 신세는 필요 이상으로 오래가지 않았을 법하다. 그는 4월 23일 사망했고, 이틀 후 성 삼위일체 교회 성단소로 옮겨졌는데, 이곳에 잎 사귀 무늬 매듭형 돌 장식이 있고, 남쪽에, 재갈 물린 곰과 워릭 백작의 남루한 지휘봉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무덤 덮개는 아마도 훗날 바뀌었을 것이다, 너무 짧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끝났다.
--- p.568~5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