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몬스터 콜]을 보고 꿈을 꾸었다.
괴물이 물어본다. 너의 비밀은 무엇이냐고.
나는 열네 살에 이불에 소변을 쌌다고 말해준다. 괴물은 고개를 젓는다.
다른 비밀이 있다고 한다.
나는 말한다. 열네 살에 집 근처 공터에서 불을 질러본 적이 있다고.
괴물은 다른 게 있다고 한다. 나는, 고민을 한다.
그런데 그 비밀을 숨기고 싶었다. 다른 비밀을 말하겠다고 맘을 먹었다.
나는 선물을 좋아한다. 어릴 적에 선물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어서 선물을 좋아한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강아지, 베이비, 아이돌. 그들의 공통점은 존재만으로도 선물을 받는다는 것.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호감을 얻는다는 것.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오게 한다는 것.
난 거기에 하나 더 적어 넣는다. 윤준기. 나 자신도 대가 없이 선물을 받는다. 밝고 긍정적이고 늘 다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니까. ---「만약에 몬스터가 묻는다면
」중에서
그들은 침대에 나란히 1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음악이 둘 사이를 감싸는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 만져 봐도 돼요? 여친 생기면 긴 머리 쓰다듬어 보는 게 꿈이었어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기는 조금 다가와 손을 뻗어서 유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기분이 안정됐다. 준기는 휴대폰을 껐다.
“전화 꺼놔요. 우리 둘만 있고 싶어.”
유진은 휴대폰을 껐다. 준기는 가만히 손을 들어 눈을 감은 유진의 눈꺼풀을 만졌다.
“키스해도 돼요?”
유진은 말없이 있었다. 준기는 떨리는 눈꺼풀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손을 당겨 유진을 안았다.
“일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만 내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외로웠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힘들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점점……. 이러다 나만 고립되는 거 같아.”
“도와줄게요. 난 그 시절을 겪어봐서 알아요. 그럴수록 스스로 빠져나와야 돼요. 처져 있으면 누가 도우려고 안 해요. 먼저 손 내밀고 아프다고 해요. 곁에 있을게요.”
준기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매일 이렇게 같이 있고, 같은 꿈을 꾸고 싶어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라는 영화에서, 한 직장에 근무하는 남녀가 같은 꿈을 꾸고 그걸 매개로 사랑에 빠져요. 나도 그러고 싶어요.”
유진은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너와 나 단둘의 비밀일기」중에서
감건호는 유진의 잔과 자신의 잔을 나란히 놓았다.
“두 개 중 왼쪽의 것이 서울, 오른쪽이 시골 산간지방입니다. 어디가 더 성범죄에 관대할까요.”
“방금 고립될수록 더 죄인으로 몰고 간다면서요.”
“아뇨, 사실은 오른쪽 시골이 관대하죠. 할아버지들이 다섯 살 어린아이 성기를 잡고 고추 뗀다는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은요? 재판에 회부되죠. 물론 지금은 시골도 많이 바뀌었죠. 하지만 같은 범죄를 서울과 시골에서 동시에 누군가 저지른다면 용서하자는 사람들은 시골 쪽이 많습니다. 다 아는 처지에, 누구네 집 아들이랴, 무슨 잘못을 저질렀겠어, 술김에 한번 그런 것이겠지. 이런 식으로 감싸줍니다. 하지만 재판을 받고 정식으로 교도소에 갔다 오면? 도시에서는 모른 척 회피하기 일쑤지만 연령이 높은 토박이들이 주 구성원인 시골에서는 철저하게 범죄자로 낙인을 찍죠. 그 녀석의 할아버지, 증조할애비가 어땠다더라, 내 그럴 줄 씨앗부터 알아봤다는 둥 말들이 돌죠. 가족이 떠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하여튼 저는 실종을 키워드로 해서 소년범으로 의심받은 아이가 입은 피해나 좁은 사회에서의 불신의 시선, 그리고 소년범 관련 개정안과 성범죄 고지 제도 등을 다뤄 보려구요. 여러 아이템 중에 준기가 들어 있어요.”
유진은 감건호의 말을 들을수록 그의 진의가 궁금했다. 말이 중구난방으로 오갔다. 아무래도 시청률을 잡기 위해 흥밋거리 방송을 하는듯한 의심이 들었다.
감건호가 조심스레 유진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혹시 그 녀석이 뭔가 폭력적인 행동은 안 하던가요?”
유진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세요. 경찰에 가보고 나한테도 전화하고. 혼자서는 감당 못합니다.”
“아, 아니예요. 그런 일 없어요. 전혀.” ---「그의 또 다른 얼굴」중에서
“준, 준기야……, 이러지 마. 부탁이야.”
“누굴 만나고 다니는 거야, 박. 경. 식? 뭐? 나를 살인자로 모는 그 개또라이랑 만나고 다녀?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정말! 썅! 나를 미친 새끼로 보는 거야? 누나와 나 사이가 그간 교감하고 사랑했던 게 의미가 없어?”
“준기야, 준기야. 이러지 마! 제발, 이성을 되찾아. 이렇게 화내고 분노한다고 될 일이 아…….”
유진의 말이 끝나기 전에 준기는 주먹을 날렸다. 유진은 뒤로 넘어가 서가에 뒤통수를 부딪고 쓰러졌다. 준기는 유진의 얼굴에 주먹을 몇 번 더 날리고 목을 졸랐다. 유진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사, 살려, 제, 제발 이러지…….”
준기는 손을 풀어 유진의 머리채를 억세게 그러쥐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고 물을 머리에 뿌렸다.
“더러워, 더러운 년. 누나가 순수해서 나의 첫 경험과 키스를 준 거야. 이제 모든 게 엉망이 됐어.”
유진은 온몸이 흠뻑 젖었다.
“더러워. 씻어. 씻으란 말이야. 냄새가 나! 씻어내지 않으면 앞으로 키스는 못 해.”
“준, 준기야. 왜, 왜 이래…….”
준기는 유진을 끌고 나와 바닥에 밀쳤다. 발길질을 했다.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유진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서 뭔가 잡으려 했다. 바닥에 놓아둔 두꺼운 책들이 잡혔다. 잘 읽히지 않아 정리하려고 쌓아둔 책들이 허물어졌다. 유진은 가장 두꺼운 책을 들어서 준기의 머리를 향해 날렸다.
탕! 소리와 함께 준기가 손을 풀었다. 유진은 캑캑 대며 기침을 했다. 준기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홱 돌아갔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누, 누나 괜찮아요? 이러려고 이런 게 아닌데……. 이것 봐봐.”
준기는 지갑을 꺼내더니 명함만 한 사이즈로 코팅한 무언가를 건넸다.
이 분이 길에서 쓰러져서 발견되거나, 병원 응급실 입원할 상황에서는 저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윤준기 010-2738-XXXX ---「삼켜버린 빨간 독사과」중에서
함백산의 나뭇가지에 핀 눈꽃 수천 송이 수만 송이가 보였다. 손에 잡히는 구름의 바다와 눈송이들, 안개와 찬 공기. 어디선가 강풍이 불어와 준기의 몸을 날렸다. 하늘 높이 풍선처럼 올랐다. 몸이 휘청거렸다.
TV에서 본 대만의 풍등처럼 하늘로 올랐다. 어지럽고 포근했다.
끝이면서 영원한 순간. 저지른 죄가 뇌리를 스쳤다.
연극을 보고 좌석에 떨어져 있던 누나의 지갑을 숨겼다가 나중에 찾아주는 시늉을 했다. 그녀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 유진을 웃게 하고 불안과 우울에서 들어 올리고 싶었다. 밤의 공원에서 닫힌 펜스에서 나오게 해준 것처럼.
그 죄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일까? 그녀를 속인 죄 말이다.
---「함백산에서 피어난 겨울 야생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