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경제발전에 성공하였다. 1960년대 초에 평균수명 50세의 2,000만 명이던 인구가 현재는 평균수명 80세의 5,000여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당시에는 현재의 구매력기준으로 1,700달러 정도였던 1인당소득이 지금은 3만6,600달러가 되었다. 이는 한국 사람들의 가치(value of Korean people)가 지난 60여 년에 걸쳐서 86배 증가했음을 나타낸다. 이런 정도의 국민가치증가를 시현한 나라는 세계의 200개가 넘는 나라 가운데 소수에 불과하다. 이는 대한민국이 흥성하였기에 달성할 수 있었던 일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우리 경제가 흥성하던 힘이 약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1960년대 초반부터 1997년 말에 발발한 외환위기 이전까지의 기간에 연 7%대에 이르렀던 1인당소득 증가율이 외환위기 이후로는 3%대 그리고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2%대로 하락한 데서 그런 조짐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성장능력 감퇴를 성숙한 경제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보다 잘살아야 될 미래의 대한민국 국민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북한 동포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힘을 보태야 할 일을 생각하면 성장률 하락 현상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성장둔화가 가져온 취업난만 보더라도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이 약화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사유, 자유, 경쟁 그리고 변화와 혁신이 경제발전의 궁극적인 힘 즉, 원동력이다. 우리나라가 남들보다 뛰어난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네 가지 원동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국가를 운영해 온 덕택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그러한 긍정적인 움직임이 정체되거나 반전되고 있다.
사유를 제한하고 공유의 영역을 확대하자는 경제사회화의 목소리가 높으며, 여론을 앞세워서 반대 목소리를 잠재우고, 승자독식은 안 된다면서 경쟁을 제한한다. 본인들이 선호하는 변화와 혁신은 옳다고 관철하려 들지만 남들이 주장하는 변화와 혁신은 거부한다. 사유, 자유, 경쟁, 변화와 혁신 모두가 도전을 받고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원칙이 퇴조하고 있다. 이 땅에 제대로 꽃피워본 적도 없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비판자들은 사회주의, 공동체주의, 국가주의 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대안들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 또는 국가가 결정한 대로 따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사회, 공동체, 국가를 내세우지만 정작 의사결정의 주체는 소수의 엘리트들이다. 즉, 비판자들이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엘리트주의이다.
경제발전에의 의지가 약화되고 있다. 성장은 그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분배개선에 힘쓰자고 주장한다. 소득이 수십 배 늘어났어도 그에 비례해서 행복이 수십 배 커진 것도 아닌데 예서 소득을 더 늘려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데 삶의 질이 개선될 수 있을까?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성장회의론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일자리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장회의론이 달갑지 않다. 모든 것이 열악하던 산업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성장회의론이 ‘배부른’ 소리로 들린다. 경제성장의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는 데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경제성장의 질을 높이려면 분배개선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분배가 강조되면서 두 가지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하나는 자조자립정신이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정도로는 부족하니 더 많이 나누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가능하면 모든 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던 사람들이 이제는 무슨 문제만 생기면 국가더러 해결하라고 요구한다. 왜 그런 일을 국가더러 해결하라고 하느냐고 물으면 국민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게 국가의 책무 아니냐고 반박한다. 어려움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국가가 나서서 분배 상태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복지 프로그램은 복지선진국과 비교하면 흉내 내기에 불과하니 더욱 확대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국가가 가진 자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둬서 어려운 사람들의 고충을 해소하는 데 쓰라는 것이다.
수월성을 추구하는 일을 이기적인 행위라고 비판한다. 남보다 월등하게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으며 많이 가진 자도 없고 적게 가진 자도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다 같이 소중한 사람들인데 그저 오순도순 살면 되지 얼마나 잘살겠다고 남을 괴롭히면서 경쟁해야 하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렇게 하면 발전할 수 없다고 말하면 무엇이 진정한 발전이냐면서 핀잔을 준다. 하향평준화가 좋으냐고 반문하면 비록 가난할망정 모두가 똑같이 살면 좋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국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헌신하는 정치인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세금, 다시 말하면, 남의 돈으로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사람이 많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자고 말하는 용기 있는 지도자가 없다. 솔선수범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지도자들은 더더욱 만나기 어렵다.
국정을 담당하는 관료들도 예전처럼 공공지출에서의 기율을 잡겠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어차피 세금을 더 거둬서 해결하면 될 일인데 정치인들이나 시민단체의 원성을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다. 나라의 곳간을 헐어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일만큼 신나는 일도 없다. 곳간이 빈 다음에 누가 그것을 채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예산을 집행하던 관료가 그 자리를 떠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쇠망하는 국가의 특징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한민국도 쇠퇴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사유, 자유, 경쟁, 변화와 혁신의 힘을 약화시키고도 성공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자조자립정신이 약화되고 근검절약의 미덕이 빛바랜 사회가 잘될 수 없다. 발전에의 의지가 약화되고 투자를 통한 성장보다는 분배를 더 중요시하는 나라가 성장할 수 없다. 평준화된 세상을 꿈꾸면서 수월성을 추구하지 않는 나라가 잘된다면 이상한 일이다. 대중 영합적인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나라가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대한민국,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그간 이루어온 성공을 예서 그르칠 수는 없다. 우리가 당장의 만족과 안일함에 정신을 쏟느라고 국운이 쇠퇴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남이 대신해줄 리가 없다. 모든 옳은 일에는 희생과 극기가 따른다. 개인이건 가계건 기업이건 국가건 고귀한 희생 없이 더 나은 미래를 갖겠다는 생각은 망상이다. 이제라도 마음을 가다듬어 흐트러진 나라의 근간을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그래야 더욱 성공하는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게임의 규칙을 재정비하는 것이다. 정부가 주도해오다가 근래에는 정치인과 시민단체를 비롯한 엘리트들이 주도하고 있는 게임의 틀을 수만 개의 경쟁적 시장이 주도하는 새로운 틀로 확실하게 바꾸는 게 급선무다. 반세기 이상 길들여져 온 관치를 청산하는 일이나 이제 막 맛 들이기 시작한 정치인과 시민단체의 주도권을 시장에게 돌려주는 일은 매우 어렵다. 시장자본주의의 주역이 되어야 할 기업 및 기업가들조차 정부에게 손을 내미는 게 현실이다. 정치인이나 정부가 일이 되게 하기는 어려워도 일이 되지 않게 하기는 매우 쉽다고 한다. 세계의 초일류 기업들과 경쟁하는 거대기업조차 정치인이나 정부 또는 시민단체에게 밉보여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 결코 잘되는 나라가 아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기업의 책임도 크다. 기업이 모든 면에서 떳떳하다면 내외부로부터의 부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된다. 그가 누구이건 부당한 일을 요구할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일류 기업이다. 그러나 다수의 기업과 기업가들이 편법으로 경영해온 죄과가 있어서 불합리한 압력에 대항하지를 못한다. 이제부터는 흔들림 없는 정도경영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기로 하자. 왜 기업경영만 정도이겠는가? 정치, 행정, 사법, 교육, 언론, 노동 등 나라 살림의 전 분야에 걸쳐서 정도(正道)를 따라야 한다.
이 책은 더 성공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방안을 찾는 노력을 기록한 저자의 연구노트를 정리한 것이다. 도움을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후 유익한 논평을 보내 준 장오현, 노석재 두 분 선생께 깊이 감사드린다. 이병욱은 자료정리와 편집과 관련하여 도움을 주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