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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의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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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8월 3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504g | 125*188mm
ISBN13 9791196123482
ISBN10 1196123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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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잘못됐겠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미코시바가 간토 의료소년원에 있을 때 담당 교관이 이나미였다. 그는 성격이 무뚝뚝하고 거칠었지만 미코시바는 그에게서 속죄의 의미를 배웠다. 자신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내린 것도 이나미 덕분이었다. 불현듯 그의 두꺼운 눈썹과 아래로 처진 눈꼬리가 뇌리를 스쳤다. 불도그처럼 우락부락한 인상이었지만 웃을 때 묘한 매력이 느껴졌었다. 그런 이나미가 사람을 죽이다니. 꿈에도 상상 못 할 일이다. 미코시바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잠깐 다녀올게.” --- p.54~55

“교관님. 저는 교관님을 구하고 싶습니다.”
“노력하는 건 자유지만 난 도치노가 미워서 죽였네. 나한테는 확실한 동기가 있어. 또한 완벽하게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일을 저질렀지. 그 사실들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뒤집지 못할 걸세.”
너무도 단호하게 말하는 통에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실생활에서라면 모를까, 법정 다툼에서 이런 단호함은 부정적인 영향만 끼친다. 이 남자는 다투기 전부터 적의 총탄에 맞기 위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어떤 피의자건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이든 속죄할 권리가 있지. 내가 그렇게 가르친 걸 벌써 잊었나?”
미코시바는 말문이 막혔다.
잊었을 리 없다.
“남에게 가르쳤으면 스스로도 실천해야지. 난 내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였네. 그러니 내 죄의 크기에 합당한 벌을 받으면 그만이야. 나는 기꺼이 벌을 받기를 원하네.”
이나미는 결연하게 말했다. 정면에서 이야기를 듣는 미코시바는 크게 당혹했다.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처벌받기를 원하는 의뢰인. 지금껏 수많은 안건을 맡아 왔지만 이번 의뢰인이 떠올릴 수 있는 의뢰인 중 가장 최악이다. --- p.109~110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세상에는 사람을 죽여도 죄를 물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전쟁, 사형, 소년 범죄, 형법 제39조, 그리고 긴급 피난이다. 미코시바 자신도 소년법의 보호를 받아 형을 면했으니 그 점에서는 도치노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비단 법률에 의한 처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법률에 의해 처벌받지 않은 자도 결국 다른 무언가로 판가름을 받아 골고다 언덕을 오른다. 미코시바는 범죄자의 변호를 맡는 형편이 되었고, 도치노는 전직 소년원 교관에게 살해되는 처지가 됐다. 둘 다 벌을 받은 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쪽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지는 속죄, 다른 한쪽은 한순간에 끝나 버린 속죄. --- p.155

자네는 자네 일을 하라고? 형의 만기와 저세상으로 가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빠르냐고? 미코시바는 가슴에 분노가 차올랐다. 지금껏 만나 온 의뢰인은 대부분 겁쟁이에 교활하고 자신의 삶에 유독 집착이 강해 옆에서 보기 볼썽사나울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 이들을 승소로 이끌면서 적잖은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나미는 어떠한가. 배짱이 넘치고 매사 진지하고 삶에 집착이 없는 데다 마치 경건한 신자처럼 자신을 벌해 달라 말하고 있다. 웃기지 마! 이러면 조폭까지 써서 변호인 자리를 따낸 나는 뭐가 되나.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나 마찬가지 아닌가. 앞으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제멋대로 해석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만약 장수한다면 어쩔 생각인가. 10년, 아니 그 이상 교도소 안에서 틀어박혀 살 것인가. 그렇게 두지 않는다. --- p.195~196

“근데 말이지. 내가 생각하기에 범죄에 동기 같은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이 자식을 죽여 버릴까’ 같은 생각은 누구든 한 번쯤은 떠올리지. 하지만 그걸 실행에 옮기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사람의 영혼의 형태가 정해지네. 아무리 미사여구를 늘어놓아도 실제 자신의 손을 피로 물들인 인간은 악인이야. 재판관 앞에서 변명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에게는 할 수 없지. 그래서 도치노를 죽인 난 벌을 받아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짐승으로 남을 거야."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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