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여기에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하나님’(히. 엘로힘)이 복수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왜 복수로 기록되어 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장엄의 복수’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위엄 있는 신적 존재, 혹은 왕을 기록할 때 종종 복수로 기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사용된 복수형을 ‘장엄의 복수’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을 복수로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장엄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태초부터 등장하신 하나님은 장엄하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찬양받기에 합당한 존귀하신 하나님이다. 둘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이 복수로 사용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흥미로운 점은 복수의 하나님인 ‘엘로힘’이 취하는 동사형태가 단수형태인 ‘창조하다’(히. 바라)를 취한다는 점이다. 복수가 행동할 때는 마치 하나의 존재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일체되심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찬송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그의 위대하심은 온 우주에 가득하다. 이 복수형태의 이름 엘로힘은 성경에 모두 2,750회나 등장한다 이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34쪽 1. 삶의 전제를 점검하라 중에서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매우 특별하게 다루셨음을 알 수 있다. 먼저는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이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여기 거룩하게 하셨다는 ‘카도쉬’라는 히브리 단어에는 ‘구별하다’ ‘구분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창조는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복주심과 거룩하게 하심으로 완성된다. 출애굽기 31장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안식일을 율법으로 제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자, 이 안식일이 누구의 안식일인가? 나의 안식일이다. 이 안식일은 우리들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다. 이것을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은 이 물질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주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이 날이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 시간이 아니라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하나님의 날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날이면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드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 날을 주님의 날이 아니라 나의 오락과 만족을 위한 날로 바꾸려고 한다. 주말 휴일이 노는 날이 아니다. 주님을 위한 날이어야 한다.”
79쪽 5. 안식, 중단할 수 있는 능력 중에서
“여기 사탄이 왜곡시킨 프레임의 특징이 나온다. 먼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그다음에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먹음직하다는 뜻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육체의 필요를 채우려는 욕망이다. 내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저 열매를 따먹음으로 내 필요를 채우고 싶은 욕심이다. 허기짐을 채우고, 육체의 곤고함을 채우고, 성적 충동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다. 또한 이는 보암직한 마음을 일으킨다. 멋지게 보이고 싶은 욕구, 보기에 멋진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내 눈을 충족시키고 싶은 욕구들이 담겨 있다. 또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마음을 일으킨다. 이것만 가지면 하나님을 뛰어넘는 지혜를 가질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욕망을 채울 수 있을 것 같고, 이루고 싶은 성공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사탄이 제공하는 프레임은 이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을 떠난 만족을 추구하게 한다. …이 프레임의 본질적인 특징이 무엇이냐, 바로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일서 2장 15~1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여기 보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인 사탄이 주는 프레임의 특징이 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준다는 것이다. 이는 선악과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다. 육신의 정욕은 우리 속에 ‘먹음직스럽다’는 욕망을 일으키고, 안목의 정욕은 ‘보암직하다’는 욕망을, 이생의 자랑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정욕’을 일으킨다.”
137쪽 10. 왜곡된 프레임이 가져오는 예상 밖의 결과 중에서
“방주는 삼 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단 하나의 창이 위를 향해서 하나가 나 있었다. 창문이 옆으로 나 있지 않고 오직 위로만 나 있다. 만약 창이 옆으로 나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홍수 때 휩쓸려 죽는 아비규환의 현장을 보았을 것이다. 거대한 홍수의 규모에 압도되어 두려워하며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보지 않고, 오직 위만 바라보도록, 하늘만 바라보도록 창을 위에 내도록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된 본질적인 방향을 시사한다. 우리는 위의 것을 바라며, 위의 것을 찾으며 살도록 지어진 존재라는 뜻이다. 그리고 방주는 특이하게도 동력이 없다. 엔진은 물론이거니와 그 흔한 노도 없다. 방주는 오직 하나님께서 동력이 되어 이끌어가시는 것이다. 어디로 갈지, 어디에 정착할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오직 방주 안에 있어야 안전하다.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면 된다.”
229쪽 17. 홍수, 그리고 방주 중에서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파격이 나타난다. 17절 말씀이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원래 계약체결식에는 서로 계약을 맺는 당사자 둘이 함께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다. 이렇게 지나가는 이유는 만약 이 계약을 지키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이 쪼개진 짐승처럼 쪼개질 것이라는 처벌조항을 감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죽어도 이 약속만큼은 지키겠다는 의지와 각오를 드러내는 의식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횃불처럼 나타나셔서 불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나가신 것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보여주고 약속하신 계획을 반드시 실행하고야 말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신다. ‘만약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에게 이런 저주를 내릴 것이다’라는 각오로 지나가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명예와 능력을 걸고 아브람이 후손을 얻을 뿐 아니라 반드시 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셨으면 아브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하셨던 것같이 함께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번 장의 본문을 보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아브람은 그 자리에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은혜’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은혜의 계약을 바로 ‘언약’이라고 한다. 이는 은혜의 계약이다. 아브람의 불성실함과 상관없이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반드시 이룰 언약을 체결하셨다.”
380쪽 30.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열심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