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마음 성장 - 어린이의 심리적 성장과 단계별 놀이
엄마와 밀착(bonding)을 다지는 단계
때로는 쌍둥이 모형을 등장시켜 자신과 엄마의 모든 것이 둘이 아닌 하나인 것처럼 똑같은 존재로 표현한다. 똑같다는 것을 표현하느라 어떤 어린이는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어떤 어린이는 점토 빚기 놀이에서 가운데에 잼을 넣어 토스트를 만들고는 “이 빵이랑 이 빵이랑 잼(마치 탯줄처럼 연결하는)으로 만난 거예요.”라고 말하며 흐뭇해했다. 또 다른 어린이는 하트 모양이 만들어지게끔 입맞춤처럼 부리를 맞대고 물 위에 마주 보고 떠 있는 백조를 그려서 사랑으로 묶인 엄마와 자신을 표현했다. (26쪽)
독립된 존재로서 자기를 인식하는 시기
이 시기는 아기가 엄마의 손길을 벗어나 스스로 걸을 수 있고,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대소변을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어 스스로 독립적 행보가 가능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이르면 아기는 엄마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도 혼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진다. …… 이 시기에는 놀이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다음과 같은 행동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용모는 지저분해지면서도 자신이 잘난 인물인 것을 알리려는 허세로 큰 기침 소리를 내거나 억지스러운 트림을 하는 행동,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도장 찍기, 이름 쓰기, 서명하기, 손 모양이나 발자국 찍기 등의 행동을 보인다. (86~87쪽)
인형과 로봇이 아니라, 퍼즐이나 바둑 같은 게임을 택하는 이유
어린이들의 놀이 선택은 다양하다. 전쟁 놀이 도구, 건설 놀이 도구, 소방 놀이 도구, 운송 놀이 도구, 병원 놀이 도구, 주방 놀이 도구, 동식물 모형이나 로봇 등을 매체로 선택하여 마음속 고민이나 소망이나 비밀을 상징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며 놀이하는 어린이들이 있다. 반면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형을 활용한 상징 놀이에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고 게임 놀이 도구를 주로 선택하여 놀기 때문에 단조롭고 건조한 듯 보이는 놀이를 진행하다가 종료하는 어린이들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대체로 상상력이 빈곤하거나 정서의 분화가 미숙하거나 감정 표현이 억압되어 있거나 상황에 대처하는 데 경직된 어린이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100쪽)
놀이의 언어와 상징 - 놀잇감과 놀이 행동에 담긴 의미
아이들은 왜 마술사와 신비한 주문을 좋아할까?
어린이들의 놀이에는 마법이나 마녀, 마술사, 신비한 주문, 비밀을 푸는 열쇠나 암호처럼 마법과 관련된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어린이들의 눈에는 일정하게 운행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마법이고, 또 그 가운데 한 현상인 뭇 생명의 나타남과 사라짐도 마법으로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마법과 관련된 놀이가 제법 자주 출현하는데 이것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발달 시기의 차이가 엿보인다. 즉, 자기 존재의 개별화 시기에는, 마법이나 마술을 시현하는 존재가 초월적 존재여서 그 마법을 통한 선물이 영웅화된 자신이 되거나, 또는 어린이 자신이 마법이나 마술을 주재하는 주인공이 되면서 영웅이 될 때가 많다. (135쪽)
남자 인형과 여자 인형
어린이들이 남녀 인형의 신체 접촉을 강렬히, 반복적으로 표현할 때 치료자들은 아무래도 성(性) 피해 에피소드는 없는지 의구심을 품기 쉽다. 그러나 보통은 선험적 지식을 동원한 공상적 소망의 표현일 때가 많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면, …… 선망하는 왕자에게 입맞춤을 받는 것으로 자신의 여성적 우월감을 표현할 수도 있고, 이상적 남성상을 아빠에게 투사하여 아빠 인형의 입맞춤을 받는 것을 통해 여성 역할의 예행 연습을 표현하는 것 등이 그렇다. 그러나 때로는 특별히 치료자가 신중하게 관찰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즉, 남녀 인형의 하반신 신체 접촉이 표현되는 경우다. 이는 일반적으로 어린이가 알기 어려운 구체적 행위이기에 단순한 공상적 이야기의 전개가 아니고 실제 경험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139쪽)
아빠 상어, 엄마 고래, 아기 돌고래
어린이들의 놀이에서 물고기 모형은 매우 친근한 것이다. 물고기끼리 싸워서 우두머리를 고르기도 하고, 일렬로 줄지어 여행도 하고, 사회적 역할을 나누어 수행하는 집단 전투를 즐기기도 하며, 바닷속 장면을 꾸미기도 하고, 때로는 물고기를 차용하여 가족 관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가족 관계를 표상할 때의 물고기 선택에서 가끔 치료자의 흥미를 끌 때가 있다. 이를테면, 아빠를 표상할 때는 상어를 선택할 때가 많고, 엄마를 표상할 때는 고래를 선택할 때가 많고, 어린이 자신을 표상할 때는 돌고래를 선택할 때가 많다는 점이다. …… 고래에게 모성을 부여하는 것은, 고난을 승화시키고 새로운 탄생의 여정을 경험하는 전래 이야기에서도 그 원형적 개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143~144쪽)
치료자를 위한 조언 - 놀이치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상황별 대처
어린이가 이유 없이 갑자기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
치료를 진행하는 동안 어린이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아파하는 경우가 있다. 이유를 찾지 못해 병원에도 가보지만, 진단 결과에도 아무런 이상 소견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아픔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생긴다. 첫째로는 어린이가 실제로 아팠던 경험을 해당 시기의 성장 작업에서 재현하고 극복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이유(離乳) 시기에 구토를 많이 했던 어린이라면, 성장 작업에서 이유 시기에 이르러 까닭 없이 자주 구토 증상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성장 작업 도중 나타나는 이유 모를 아픔은 해당 시기를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는 일시적 현상이다. (260~261쪽)
놀이실에서 놀잇감은 어떻게 배치할까?
성장 작업의 순서에 맞춰 총알, 화살, 다트 화살 등이 과녁에 맞고 다음 단계의 태아가 되려면, 아무래도 자궁을 상징하는 놀잇감에 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과녁의 위치는 과연 어디가 좋을까? 아마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위치이기보다는, 자궁의 상징이 될 만한 모래 상자나 커다란 바구니 등에 떨어지기 좋게끔 벽면에 달려 있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과녁에서 떨어져 모래 상자나 바구니에 담기는 화살이나 총알은 태아를 표상하기에 충분하다. 또는 어린이를 기다리는 엄마의 기척이 잘 느껴지도록 과녁을 벽면에 걸거나, 놀이가 끝난 후 엄마를 만나는 출입문에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농구대도 어쩌면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방향에 위치시켜도 좋을 것이다. (266쪽)
치료자의 역전이가 걱정스러울 때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쌓인 격렬한 울분을 억압했다가 치료자를 향해 거침없이 토로하는 전이 감정을 보이는 것은 치료자의 수용과 공감에 신뢰와 안정감이 생겼다는 징표다. 그러므로 치료자에게 향하는 어린이들의 직접적인 울분 때문에 치료자가 당황하거나 서운해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치료자 자신의 마음이 비워진 상태이고 한 공간에서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를 이뤘다는 뜻이기도 하다. …… 치료 공간에서 만나는 어린이를 상대하는 치료자는 자신의 존재를 잊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각성을 놓아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고정관념이 절대적 정의가 아니므로 그런 자기중심적 편견이 모두 사라지도록 노력하라는 뜻이다. (278, 279쪽)
무절제하고 거친 어린이를 이끌려면
놀이치료에 의뢰된 어린이들 가운데에는 풀어놓은 망아지 같다고나 할까, 늑대소년 같다고나 할까, 치료자가 짧은 시간 안에 어린이의 언행을 호전시키기 참으로 어려운 경우들이 종종 있다. 이런 어린이들은 우리가 흔히 ADHD로 알고 있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의 일반적인 진단 규준을 넘어서는 매우 높은 충동성을 보이며, 주의 집중도 어렵다. …… 이런 어린이들에게는 심리적 문제 해결 이전에 언행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훈련을 먼저 해야 한다. 물결이 고요해져야 연못 밑바닥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번잡한 언행을 가라앉혀야 어린이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어린이들은 치료 회기가 짧을 경우에 심리적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에 종료를 계획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때로는 분수와 절도가 없는 언행이 개선되는 것만으로도 치료가 성공에 이르렀다고 평가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282~283쪽)
“상담은 안 하고 왜 놀기만 하죠?” - 놀이치료에 대한 오해
부모들은 어린이가 놀이실에 들어가서 놀이해야만 놀이치료가 진행된다고 생각하기 쉽고, 또 놀이실에 들어가는 시각이 놀이치료의 시작이며 놀이실에서 나오는 시각이 치료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부모는 치료자와 나누는 대화만이 상담이라고 생각하여 놀이조차 하지 말고 치료자와 이야기만 나누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 (놀이치료에서는) 때로는 성장 작업의 진행 시기에 따라 어린이가 놀이실에서 잠자기를 원할 수도 있고, 치료자와 음식을 함께 먹기를 원할 수도 있다. 또는 시간 내내 꼼짝 않고 앉아만 있다 가거나, 울기만 하다 가거나, 치료자와 실랑이만 벌이다 가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예측이 어려운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면, 어린이의 치료 시작과 종료 개념을 좁게 국한하기가 어렵다. (292~293쪽)
어린이가 말할 때 목소리와 눈빛도 중요하다
들릴 듯 말 듯 혼자 하는 말인지 상대방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가 불분명하거나, 또는 말끝이 흐려져서 말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 어린이의 자존감이나 사회적 적응 능력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낮고 작은 소리로 혼자 하는 말이 많은 경우에는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경청해준 경험이 적고, 비난을 많이 받았거나 대화 상대 없이 외롭게 자라서, 자존감과 자신감이 낮고 타인과의 어울림에서 소외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298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