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철도는 열강 자본이 경쟁을 벌인 시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각 철도가 독립적인 경영체로서 운영되었고 서로 연락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철도의 규격 역시 차관을 제공한 해당 국가들의 기준에 따라 건설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통일성이 없었다. 철도의 기본이 되는 궤도를 봐도, 정타이철도와 퉁푸철도는 간선망이라고는 하지만 게이지(궤간)가 1미터였기 때문에 다른 노선과의 직통이 불가능했다.
국민당을 중심으로 신중국이 건설되는 노정에서 최대의 교란 요인은 국민당 내부의 반反장제스 전쟁이나 외부의 공산당이라기보다는 대륙 진출을 꿈꾸는 일본이었다. 일찍이 장제스의 북벌군이 만주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막으려 했던 일본은 산둥에 군사를 보내고, 중화민국 초기 군벌정치가로 북양 군벌北洋軍閥의 흐름을 이은 펑톈파奉天派의 총수인 장쭤린張作霖을 폭살하여 러일전쟁 이후의 기득권을 유지, 확대하려 했다. 이후 만주사변을 일으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줴뤄 푸이愛新?羅溥儀를 수장으로 하는 괴뢰 만주국을 수립한 일본은 영·미와의 협조 노선을 포기하면서까지 중국을 분할 점령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쌓여 있던 긴장의 에너지는 루거우차오 사건을 발단으로 중일전쟁 발발을 야기하였고, 그 결과 일본은 화북, 화중, 화남이라는 광활한 점령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곳의 점령 철도는 중국 대륙의 점령지를 유지하고 장제스의 충칭정부에 대한 군사작전을 가능하게 하는 병참logistics 기반으로 작용하였고, 나아가 일본 전시경제의 재생산에 필요한 석탄 광물 등의 주요 물자를 중국 대륙에서 일본으로 공급하는 선행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철도는 일본에는 새로운 네트워크의 확장이었기 때문에 그 운영을 위해 외부에서 대규모 물적·인적자원을 조달하고 새로운 철도 운영 주체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회사 체제를 정비하며 경영자원의 공급원인 기존 철도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 요청되었다. 실제로 만철, 일본 철도성, 조선 철도국의 대규모 인원과 철도차량이 화북으로 조달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화북교통주식회사라는 새로운 교통 주체가 창출되었다.
당시 ‘비해匪害’라고 불린 게릴라들의 활동으로 입은 피해를 주목해보면, 일본의 점령 초기에는 발생 정도가 산발적이고 소규모였다. 그러나 1938년 2월 10일에 발발한 징한 선의 바오딩保定과 둥창서우東長壽 간의 습격을 계기로 표 2-9와 같이 게릴라들이 전선에 폭넓게 걸쳐 준동했다. 규모와 수법 또한 점차 커지고 교묘해져서 수 킬로미터의 선로 궤도 반전, 소와 말을 이용한 궤도 파괴, 폭약과 지뢰를 이용한 열차 탈선, 교량 파괴, 발전소·신호소·역사 습격, 전신주 파괴, 통신선로 절단 등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다.
1939년 물자동원계획 할당 총수에 비해 입수된 양은 52퍼센트에 불과하였다. 레일은 지선과 측선을 철거하고 유용하여 임시변통했지만, 다른 공사들은 약 50퍼센트의 지연을 피할 수 없었다. 구리의 경우도 1939년 물자동원계획 할당 1,400톤이었지만 9월 말까지의 입수 실적은 13퍼센트인 180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기 자재가 대단히 부족했다. 침목의 경우도 같은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에 노후가 심각하여 안전한 열차 운행이 어려웠다. 따라서 증강 계획을 실시하기는커녕 일상적인 보수도 힘들었고, 게릴라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데도 큰 곤란을 겪어야 했다.
표 3-16에 의하면, 직장별 점유율에서는 일본인이 본사와 철로국 본부에 집중 배치되어 있고, 신분별 점유율에서는 직원 층에 집중되어 있다. 나아가 현업 부문에서도 표 3-17에서 보이듯 기무단의 사례와 같이 단장과 주임, 부단장 등의 간부진을 일본인들이 차지하여 현장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물론 중국인도 간부로 활용되기는 했지만 그 같은 사례는 일부였고, 1940년 9월과 1942년 3월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인 간부진은 오히려 감소했다. 이와 같이 화북교통은 상대적으로 적은 일본인을 현장 상층부와 관리통제 분야에 배치하여, 노동력이 격심하게 유동하는 가운데서도 운영 능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요원 배치 구조, 즉 계층 구조hierarchy는 다른 현장에도 나타났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