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조선인들을 핍박할 때 의열단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의열단은 조선 총독과 관료들, 친일파, 밀정을 암살 대상으로 정했고, 총독부와 식민 통치를 미화하는 언론기관, 각 경찰서를 파괴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실제로 행동했다. 조선 총독부, 종로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 식민 통치를 뒷받침하던 핵심
기관들에 폭탄을 던지고, 추격하는 경찰들과 총격전을 마다치 않았다. 나석주, 김상옥 열사 등의 이름을 교과서에서 배운 기억이 날 것이다. 이 의열단의 노선과 행동강령을 적은 문건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라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의열단은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
_ [프롤로그] 중에서
독립 투쟁을 하던 어느 민족도 혹독한 식민통치하에서 우리처럼 질기게 군사 훈련을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나라는 잃었지만, 항일 무장투쟁의 전통은 일관되게 유지됐다. 만주에서, 대륙의 천년고도에서 조선 사람들은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고 다가올 전쟁을 예비하고 있었다. 여러 곳의 군관학교에서 우리 말을 쓰며 훈련받고, 우리의 독립을 준비했다. 때론 실전이 오갔고, 항상 실전을 준비하는 훈련에 매진했다. 그들에게서 훗날의 한국 광복군이 나왔고 대륙을 누빈 조선의용군을 얻었다.
_ [03. 대륙의 군사 엘리트들과 훈련하다] 중에서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유관순에 버금가는 여성 독립 운동가였다. 그 자신이 의열단원이기도 했고, 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가 만들어졌을 때 교관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조선에서 자란 소년들이여. 가슴이 피 용솟음치는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는 눈물 거두고 결의를 굳게 하여 모두 일어서라. 한을 지우고 성스러운 싸움으로 필승의 의기가 여기에서 뛴다.” 전장을 누비는 건장한 남성이 남겼을 법한 이 말의 주인공이 박차정이다.
_ [04. 성별, 신분을 넘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뭉치다] 중에서
중경으로 본부를 옮긴 김원봉의 머리는 복잡했다. 의용군의 향후 행로를 결정해야 했다. 중국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선전부대로서 의용군이 활약해주기를 원했다. 국제적인 연대를 과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했으나 통제를 벗어나는 전투부대로 육성하는 것은 꺼렸다. 하지만 대원들은 매일 밤 총을 들고 전선을 누비는 꿈을 꾸며 잠들었다. 군인은 전장에 있어야 한다. 누적된 불만은 언제 터질지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의열단 시절부터 김원봉이 가장 신뢰하던 석정 윤세주마저 의용군을 전선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전선은 황하를 넘어 화북을 말했다.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일제와 교전하고 있던 곳은 동북 만주였지만 너무 멀었다. 하지만 화북 태항산을 중심으로 뻗은 전선에서도 모택동의 팔로군과 일본 황군의 전투는 치열했다. 의용군대원들이 바라는 전장이었다. 더구나 화북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숫자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그들에게 의용군을 알리는 일도 중요했다.
_ [08. 조선의용군의 미래를 결정할 기로에 서다] 중에서
조선의용군은 창립 초기부터 교육을 중시했다. 정규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국민당과 끈질기게 교섭했고, 어디든 부대 주둔지를 정비하면 교육 훈련 계획부터 세웠다. 실력이 있어야 독립 투쟁도, 전투도 할 수 있었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연안, 산동, 화중을 비롯한 넓은 지역 곳곳에 의용군의 교육기관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그 배움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이 중원촌(中原村, 쭝위엔춘)이다
_ [12. 합류하는 조선청년들을 위해 교육에 매진하다] 중에서
호가장 전투는 조선의용군에게 일대 전환이었다. 수천이 전사한 전투도 아니고 수십만이 학살당한 전투도 아니었지만, 호가장 전투는 중국 민중과 팔로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목숨을 걸고 의용군과 팔로군 주력의 길을 터주던 대원들의 헌신이 입에서 입으로 회자됐다. 의용군의 이름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실전을 예비하고 끊임없이 군사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원들의 자질이 우수했던 터라 실전에서 물러서거나 움츠리는 일도 적었다.
_ [13.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호가장 전투] 중에서
전선에서는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의용군의 상황도 비슷했다. 전쟁은 길었고 보급은 중요했다. 먹고 입고 쓰는 문제는 당장의 전투처럼 빛은 나지 않지만 어쩌면 총을 드는 일보다 더한 무게가 있는 일이었다.
_ [21. 전쟁은 길었고 보급은 중요했다] 중에서
사실 의용군의 연안 이동에는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의용군이 비록 공산당과 함께 싸우고는 있었지만, 시작은 약산 김원봉이었다. 김원봉은 중경 임시정부에 있었고, 국민당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북상해 공산당 팔로군과 싸우고 있는 의용군 대원 중에는 공산당원도 있었지만, 김원봉과 같은 성향이 있는 대원들도 상당수였다. 태항산에서 전사한 석정 윤세주가 대표적이었다. 처음 의용군이 공산당 근거지로 북상해 일본군과 교전하면서도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여긴 것이 의용군의 정치적인 성격을 증명한다.
_ [23. 김원봉, 임시정부와 멀어지다] 중에서
그토록 바라던 해방 조국에 왔는데 설 자리가 없어 다시 강을 넘어야 했다. 역사는 때로는 아무 보답이 없다. 그들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망치면서 북한에서 의용군은 금기어가 됐다. 애초 남쪽에서는 더했다. 의용군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주력이었으니 말할 필요가 없다. 의용군은 남북에서 모두 그 공이 지워졌다. 의용군 창설 80년,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누구도 쉽게 기릴 수 없는 역사가 되었다.
_ [24. 일생을 독립에 몸바친 투사들의 안타까운 최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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