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좌 視座 란 주체의 로케이션에 입각해 미지의 세계와 낯선 타자를 만나는 사유 체계이자 과정이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은 단순한 생활 조건의 인지 여부가 아니라, 주체와 타자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지각하는 시선과 사고의 발명 과정이다. 즉, ‘시좌’는 비평의 조건과 가능성을 통찰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는 비평의 한계와 과제를 함께 사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p.37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역사의 사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하였지만, 지금 내가 선 이곳이 과연 그러한 사유/비평의 출발점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다만, 비평적 시좌의 갱신과 통찰을 통해 이 무력한 글쓰기를 이어나갈 뿐이다. 새로운 비평의 가능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그것을 잊지 않을 뿐이다. --- p. 48
비평은 특정 장르의 언술 형식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촉구하고 제기하는 다양한 ‘질문’을 통해 동시대적 삶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언어와 감수성을 발명하는 실천적 개입이자 자기 혁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신경숙 사태 이후의 비평의 역할과 가능성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창비』와 『문동』의 ‘실패’를 사유하고 성찰하며 재전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특정한 매체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는 수준을 상회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정도의 자기 점검 이후에야, 우리는 힘겹게 신경숙 사태를 마주할 수 있다. --- p. 60
지역은 혁명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를테면, 마산과 부산, 3·15와 4·19의 기억은 냉각된 역사에 온기를 주입한다. 추모의 열기는 국가의 관리 속에서 집단지성화되며, 문학연구자는 약속된 분량만큼의 애도를 전각한다. 이 글 역시 정해진 원고 매수에 맞게끔 재조직화되어 제출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또 하나의 기록이자 추모의 방편이 될 것이다’라고는 쓰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투쟁의 기억이 “보편사의 방법론인 가산 加算 적” “사실의 더미” 속에 매몰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 p. 71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3·15’를 ‘4·19 혁명’의 계보학에서 이탈시키는 ‘혁명의 서사’가 아니며, ‘3·15’, ‘김주열’을 신화로 재현하는 ‘의거의 서사’가 아니라, ‘혁명’을 신화화하는 모든 개념 자체를 기각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열정 ?lan 의 화약고로 타오르고 있는 전복적사건, 즉 ‘신적 폭력’의 순간을 함께 하는 것이다. --- p. 110
지역문학공동체는 창작, 교육 활동, 연구, 비평 등을 통해 상호‘소통’하면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문학사회에서 ‘동상이몽’하거나, ‘한 자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지역문학공동체는 ‘관심’으로 포장된 ‘무관심의 비평적 응대’ 속에서도 시적 주체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문학적 실천을 지향하여야 한다. 이것만이 지역의 문학을 해석학적 악순환에서 구출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 p. 139
이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는 문학이라는 것이 결국 골방에서 혼자 창작하고 작은 에꼴에서 자기 성취나 뽐내는 나르시시즘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문학은 내성적 언어를 통해 사적 취향을 향유하는 문예의 마당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나 신념을 생산하고 분배하기 위해 교전交戰하는 쟁투의 장인 것이다. --- p. 173
이 와중에도, 새 문학관(‘부산문학관’)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지역의 브랜드 창출과 문화콘텐츠 생산이라는 공정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역의 문학관이 도시문화산업의 대상으로 ‘활용’ 가능성을 부여받는 순간, 지자체의 관심과 재정 지원도 활발해질 것이다. 그러나 도시개발 전략의 순기능 창출보다 중요한 것은 문학관의 존재 조건을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문학과 자본의 이중주, 그 경계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시 문학(들)이기 때문이다. --- p. 216
비평은 선택과 배제이며, 그래서 비평은 무사공평한 행위는 아니다. 하지만 시 작품에 대한 ‘공평’하지 못한 선택이 반드시 ‘공정’하지 못한 해석 행위인 것만은 아니다. 즉, 시 텍스트의 내적 차이를 궤멸시키고 무화하는 ‘무사공평의 비평(학)’이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주어지는 텍스트와 마주하며 하나의 비평적 궤적을 충실히 그려나갈 뿐이다. 지면의 한계상, 이 자리에서 다 말하지 못한 시인과 시에 대해서는 향후 연속 작업을 통해 새롭게 가늠할 것을 약속한다.
--- p. 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