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를 좀 더 일찍 만났다면 국내도설의 '재미'가 영 시들해졌다고 쉽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뒷심 강한 8개의 단편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이 발칙한 상상력과 허심탄회한 문장력을 보여준다. 만화같은 표지와 장난치는 듯한 제목이 주는 느낌 딱 그대로, 이기호의 세계는 가볍지만 실용적이고 진중하다.
이제 작정하고 자기 얘기를 썼다는데, 사실 이 작품들 속에 정상적인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말도 안되는 소설을 읽어주는 소설가(나쁜 소설), 콘크리트로 굳게 닫힌 교보문고를 뚫어 보겠다는 작가(수인), 국기 게양대와 사랑에 빠진 로맨티스트(국기게양대 로망스), 박경리 선생과 친척이라고 한번 한 거짓말 때문에 심하게 삶이 꼬여버린 백수(원주통신) 등, 모두가 아킬레스건을 잘려버린 절뚝발이 소시민들이다. 주인공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비열하고 불쌍한 모습들이 '사회'와 충돌해 변질되어 가는 과정이 리얼하고도 황당하다. 그래서 인물들은 엉뚱해서 귀엽고 어리숙해서 즐겁다.
8편의 단편이 모두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재밌는데 그 중에 특히 직업과 맞닿아 있어 그런지 <수인(囚人)>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황석영 선생이 '글쓰기는 노동이다'라고 했던 말을 가장 직접적으로 묘사한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일 것이다. 어느 무명 소설가가 자기 작품을 찾기 위해 교보문고를 뒤덮은 25m 두께의 시멘트벽을 곡갱이 하나로 뚫어 가는 작업, 이 작업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노동이 아닌가. 작가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뚫어야 할 두터운 벽, 대중들이 알아주는 작가가 되기 위해 통과해야하는 깊은 굴 앞에서 매일같이 찍고 또 찍는다.
그의 전작 <최순덕 성령충만기>도 이 책을 보고 반해서 찾아보게 되었는데 풀어가는 '설'이 보통이 아니다. 가끔 인터넷에 인기 있는 패러디 글들을 보면 그 기발함에 땅을 치게되듯이, 집중해서 쉬지 않고 읽으면, 번뜩이는 말장난과 위트 속에서 패러디 영화 한 편을 고스란히 건져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소설이 그렇듯 이 모든 것이 '웃기자'는데서 끝나지 않는다. 주인공을 첩첩산중으로 끌어들이고야마는 주변 기재들의 이중성을 곰곰히 따져본다면 소설 보는 재미는 어느새 배가 될 것이다.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좋아해 '요즘 무슨 책이 재밌소?'라고 묻던 택시 기사님께도 주저없이 추천한 적이 있는데, 그 택시 기사님을 다시 만난다면 이번에는 꼭 이기호 책을 추천하고 싶다.
그의 소설은 앞선 세대가 공유했던 그 숱한 절망과 고통, 그리고 보편적 주제를 같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앞선 세대와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기호 소설이 파괴력이 높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즉 그의 소설이 유달리 혁신적인 소설로 다가오는 것은 단지 그것이 전세대와 다른 삶의 징후에 눈을 돌렸기 때문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다루어져오던 그 징후들을 영원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길항시켰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이기호의 소설은 먼저 이기호의 소설 그 자체로 읽힐 때가 되었다. - 류보선 (문학평론가)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이 아이러니의 소설공학은 2000년대 문학이 선사하는 여러 유쾌함들 중에서도 가장 '개념 있는' 유쾌함 중의 하나다. 그 아이러니의 저의(底意)가 대부분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최근 젊은 작가들에게서 다양하게 복제 혹은 변주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이러니의 '원천기술'은 그에게 있는 것 같다. 조롱과 연민 혹은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우리 이럴 줄 알았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