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3·1 독립운동은 우리 역사에 중요한 전환기를 마련했다. 20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할 만큼 독립운동이 범민족적으로 전개되자 당황한 일제는 조선 식민통치 방식을 그동안 헌병경찰을 내세운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변경했다. 문화정치에서는 헌병경찰은 없앴지만 보통경찰의 수는 늘려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탄압했으며, 친일파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민족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했다. 이처럼 문화정치라는 미명 아래 이전보다 더욱 악랄하고 교묘한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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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다공원은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공장소라는 점에서 거사를 치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목을 빼고 이제나저제나 민족대표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2시가 가까워져도 민족대표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자 군중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정작 시간이 되니까 민족대표들이 몸 사리느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둥, 우리만 여기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갈 게 뻔하다는 둥…….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며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으며 우왕좌왕했다. 일부에서는 민족대표들 없이 우리끼리 행사를 갖자고도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뾰족한 답을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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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간은 2시 30분경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경신학교를 졸업한 정재용이 팔각정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는 누군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급한 마음에 자신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던 것이다. 마침 그의 주머니 속에는 파고다공원으로 오는 길에 받아둔 기미독립선언서가 들어 있었다. 정재용은 기미독립선언서를 꺼내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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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이렇게 서둘러 토지조사사업을 벌인 것은 지세수입地稅收入때문이었다. 이권만 있으면 기회를 엿보는 일본이 강제로 대한제국을 합병한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것만 봐도 그렇다. 이전쟁을 수행하려면 막대한 자금과 물자가 필요할 터, 그 자금과 물자를 식민지 대한제국에서 충당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방안이었던 것이다. 이후 이들의 수탈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피도 눈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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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일제의 식민 지배하에 들어가자 뜻 있는 애국지사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국민들도 나라의 이런 꼴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도 점점 한계에 이르렀다. 일제의 무자비한 무단통치는 그 어떤 사소한 행위도 민족이나 독립과 관련한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선각자들은 중국으로 러시아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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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회원들은 애국계몽운동을 해온 인사들이라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이들은 회원 가입에 적극 나서 1910년경에는 회원 수가 약 800명에 달했다. 당시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 운동가들을 거의 모두 망라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렇다 보니 신민회는 항상 일본의 탄압 대상이 되었음은 불문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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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은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민중들이 힘을 합치고 떨쳐 일어나 결국 철옹성 같은 차르 체제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에게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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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청년당의 설립 취지는 “독립을 완성하고 독립을 회복한 다음에는 문화적 도덕적으로 민족을 개혁하여 신대한 민족을 만들며 학술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해서 대한민족의 신문화가 전 인류에 게 위대한 행복을 주도록 한다”였다.
‘대한독립·사회개량·세계대동’ 3가지를 당의 강령으로 삼은 신한청년당의 이념은 “대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해서 공화정체의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사회의 모든 부분을 시대의 조류에 맞게 적절히 대개혁을 단행하며, 대한민족이 만든 신문화가 전 인류에게 공헌하도록 국제협력을 하는 조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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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을 시발로 벌이려는 독립운동에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렇게 본다면 독립선언일은 고종의 인산을 보기 위해 경향 각지에서 서울로 몰려든 군중이 많을 때를 택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다. 여러 가지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장례를 치른 다음보다는 치르기 직전 군중이 몰려들고 있을 때가 적기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리라. 독립선언을 준비하는 민족대표들도 이 점을 감안하여 독립선언일을 3월 1일로 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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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선언서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알아볼 것이 있다. 바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이다.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의 주도자들이 이후에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인사들이며, 또 내용도 상당 부분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대동단결선언은 1917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규식·박은식·신채호·조소앙 등 14명이 작성하여 발표했다.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할 무렵은 정세가 상당한 위기감이 감돌 때였다. 1915년 7월, 신한혁명당은 고종황제를 모셔와서 망명정부를 세운다는 계획 아래 성낙형成樂馨을 몰래 국내에 잠입시킨다. 하지만 국내에 들어온 성낙형이 변석붕邊錫鵬 등과 함께 고종의 밀명을 받을 방법을 협의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히면서 이 거사는 수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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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선언서 역시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생각을 지배하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바 크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 민족한테는 적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잘 알고 있었고, 특히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안창호는 이 점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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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국내에서 기미독립선언이 선포되고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독립단 동맹휴학촉진부를 결성해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하거나, 고국으로 돌아와 3·1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19년 2월 8일부터 5월 15일까지 재일유학생359명이 귀국했는데, 그 가운데 127명이 서울로 돌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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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개약진으로 해외에서 또 국내에서 각 진영별로 논의되던 독립선언에 대한 열망은 1919년 2월 들어 하나의 흐름으로 연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우선 도쿄에서 귀국한 송계백을 만난 현상윤은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와 그의 친구인 최남선에게 송계백을 데려가 ‘2·8 독립선언’를보여주고 도쿄 유학생들의 계획을 설명하게 한다. 또한 은사인 보성학교 교장 최린에게도 송계백을 데려간다. ‘2·8 독립선언서’를 본 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 지금까지 의견 개진 수준에 머물러 있던 독립선언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맘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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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은 독립운동이 한 개인이나 한 정파의 일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종교든 정파든 모든 것을 떠나 함께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역설하는 한편, 지금이라도 함께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강조했다. 죄책감을 갖고 있던 최남선도 함께해야 한다
고 거들었다. 이승훈 역시 함께하는 것에 대해 마다할 이유가 없으므로 그 자리에서 흔쾌히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이승훈은 전날 밤 기독교 인사들이 합의했던 바가 있으므로 단독으로 수락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양해를 구하고 동지들의 의견을 모은 다음 그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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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에게서 독립선언서를 받은 최린은 그것을 자기 집 벽장에 걸려 있는 거문고 속에 보관했다가 천도교 교주 손병희, 기독교 측 함태영 등에게 보여주고 동의를 얻는다.
한편 기미독립선언서 뒤에 있는 ‘공약삼장’의 집필자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다. 대략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이 모두 썼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불교 측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한용운이 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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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인쇄소에서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이상하게 생각한 신철은 문을 밀치고 보성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막 인쇄된 기미독립선언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손 쓸 틈 없이 순식간에 당한 이종일은 순간 당황했다. 이 일로 거사가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모
골이 송연했다. 어떻게 해서든 신철을 설득해야 했다. 해서 이종일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만은 안 되오. 이 일은 멈출 수 없는 일이오. 하루만 봐주시오.
의암 선생님(손병희-필자)한테 갑시다.”(이종일, 『묵암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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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일본경찰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다가와 손수레를 세우더니 불심검문을 시작했다. 검문이라는 것이 눈으로 대충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손수레에 실린 짐을 죄다 확인할 태세였다. 일본 형사는 손수레 위에 얹혀 있는 족보를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한 권 한 권 족보가 내려지자 이종일은 안절부절못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이제 곧 독립선언서가 드러날 판이었다. 큰일났다. 독립을 선언하겠다는 거사가 또다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이종일은 시쳇말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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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는 일본의 침략으로 민족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또 심리적으로 위축돼 결국 민족의 존영이 훼손됐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에 기여할 기회마저 잃었다고 개탄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는 이 억울함을, 고통을, 위협을 없애고 나아가 민족적 양심과 국가적 의리를 지키기 위해 떨치고 일어나니, 그 누구도 어떤 강자라도 이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외친다. 우리는 무슨 뜻이라도 펼칠 수 있다고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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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과연 진정한 독립을 이루었는가”라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진부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에겐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분단된 조국을 평화의 한반도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목격하는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의 행태는 물론이거니와, 이들의 ‘승인’ 없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듯한 좌절감 또한 우리를 옥죈다.
하지만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듯 지금의 우리는 평화가 이룩된 나라를 만들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다 알고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평화의 길은 입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천해야만 비로소 완성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