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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

화곡

윤재성 | 새움 | 2019년 03월 19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1 리뷰 45건 | 판매지수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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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3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368쪽 | 428g | 136*200*30mm
ISBN13 9791189271480
ISBN10 1189271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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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뭘 하는 겁니까?”
가까이서 본 상대의 행색은 더욱 수상쩍었다. 한밤중인데도 스키 고글에 스키 모자, 코와 목을 덮는 스키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다. 항공점퍼는 천천히 돌아섰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안 하긴, 벽에 뭘 뿌렸잖아요. 들고 있는 건 뭡니까?” --- p.10~11

형진은 감기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밀어 올렸다. 첫 번째로 깜빡였을 때는 물살이 불길을 집어삼켰고, 두 번째에는 하늘과 땅이 잠겼고, 세 번째에는 그를 둘러싼 세계가 침몰했다. 이윽고 모든 것이 가라앉은 암흑이 찾아왔다. 의식이 끊길 때까지도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와줘요, 누가 좀. --- p.14

“이게 어떻게 된…….”
입을 떼자 거울 속 괴물도 아가리를 벌렸다. 형진은 제 음성에 흠칫 놀랐다. 듣는 사람이 도망칠 쇳소리였다.
“내 얼굴이 어떻게 된 거죠?”
“안면피부 대부분이 녹아내렸습니다. 불길에 직접적으로 노출됐어요. 재건수술을 한다 해도 예전처럼 돌아가긴 어려울 겁니다.” --- p.25

‘내가 사라진 줄 알았지? 천만에, 우린 하나야.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질 때까지.’
(…)
후드를 내리자 일그러진 살덩어리가 유리창에 비쳤다. 그를 보는 괴물과 마주 보며, 형진은 불현듯 깨달았다. 그가 정말로 잃은 것은 집도 가족도 아니었다. 방화범이 앗아간 것은 인간의 자격이었다. --- p.30~34

“쓰레기가 쓰레기장을 구르는 데 이유가 있겠습니까.”
최 전무는 웃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시대의 낙오자, 불순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컨베이어벨트에서 뛰어내린 겁쟁이들이라고. 몇 년쯤 지나니 생각이 바뀌더군. 여긴 내 발로 와서 내 힘으로는 나갈 수 없는 구덩이야. 내려올 때는 분명히 얕았는데, 올라가려고 돌아서면 저만치 높아져 있는. 그래서 다들 누군가 와주기만 기다리는 걸세.” --- p.39

그는 달콤한 백일몽에 빠졌다. 방화의 충동에 몸을 맡기는 상상이었다. … 처음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그의 혈관에는 피 대신 불길이 흐르기 시작했다. 심장 속에 들어앉은 괴물은 호시탐탐 탈출할 기회만을 노렸다. 술을 부어 불을 축이는 것도 이제 한계였다. 사나운 발화(發火)가 닥쳐오고 있었다. --- p.50

“이건 뭐죠?”
“업체에서 사용하는 내화도료요. 외부의 열을 감지하면 팽창해 단열층을 만드는. 보통 시공 단계에서 철골에 바르는데, 다 부풀기도 전에 철골이 휘어 버렸어. 그래서 이쪽 벽이 무너져 내린 거고.”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최고온도에 도달하는 시간이 빠르다면. 불길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뜨겁거나.”
잔해의 상태로 봐선 둘 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정혜는 손에 묻은 페인트 가루를 털고 돌아섰다.
“그래서, 결론은요?”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야. 그 미치광이가 돌아왔어.” --- p.84

눈부신 불길이 눈앞에서 터져 나왔다. 거대한 성냥이 성냥갑을 긋고 지나가듯, 놈이 뿌린 액체를 맞은 곳에서부터 느닷없는 화염이 솟아올랐다. 삽시간에 오감이 지워지고 세상이 녹아내렸다. 현실로 뛰쳐나온 환각 속에서, 그는 언젠가의 눈밭처럼 무릎을 꿇었다. --- p.174

철판과 철판이 긁히며 불티들이 쏟아져 내렸다. 사이드미러는 진작 다 날아간 뒤였다. 얼굴을 밝히는 불티 사이로, 창문을 내린 형사가 소리 질렀다. “문형진, 차 세워!” 형진은 마주 고함쳤다. “그럼 너도 죽어!” 형사가 뭐라고 더 소리쳤으나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옆의 미친놈이 코뿔소처럼 차를 들이박기 시작했던 것이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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