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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살며 사랑하며

인도에서 살며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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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6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352쪽 | 153*224*30mm
ISBN13 9788997201051
ISBN10 899720105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미란다 케네디
미국의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 방송 NPR과 퍼블릭 미디어 마켓플레이스 특파원으로 뉴델리에 주재하며 서남아시아 전역을 취재했다. 5년간의 특파원 기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분쟁지역 취재와 아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을 취재했다. 특히 인도의 여성과 카스트제도, 세계화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썼으며, 워싱턴포스트,보스턴글로브,네이션,슬레이트 등에 기사를 게재했다. 인도로 가기 전에는 뉴욕에서 잡지사 기자, 퍼블릭 라디오 리포터로 활동했으며 9/11사태를 현장취재했다. 인도에서 돌아온 뒤에 워싱턴으로 옮겨 NPR 방송의 ‘모닝 에디션’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역자 : 송정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정신여중과 명성여고에서 교사로 일했고, 한국어판 리더스 다이제스트 창간 멤버로 참여해 이 잡지의 편집장과 주필을 지냈다. 30년 넘게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함께 하며 우리 글 번역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한일강제병합을 놓고 벌인 美.日제국주의의 추악한 밀거래를 파헤친 ‘임페리얼 크루즈’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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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책의 편집자 입니다.
2012-06-19
뉴욕에서 그럭저럭 지내던 여기자가 어느날 무작정 인도로 날아가 5년을 보냈습니다. 안정된 일자리를 구한 것도 아니고, 돌아오면 어떻게 된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인도의 보통 사람들의 삶을 통해 저자는 삶과 사랑,그리고 인도의 본모습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가슴 따뜻하고 삶과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명작입니다. -편집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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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여자 혼자 산다고?

델리의 퀴퀴한 4월의 공기가 목 안으로 휘감겨 들어왔다. 수백만 인도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돌고 돌았을 공기는 숨을 쉴 때마다 더 뜨겁고 끈끈해졌다. 얼굴을 가리는 부르카를 입으면 이런 느낌이 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먼지투성이 공기를 폐 속으로 퍼 담으려 애를 쓸 때 검은 색 목면 천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둘러싼 채 입을 가린 천을 들이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손님, 자연의 에어컨! 완전 통풍이죠, 헬리콥터 탄 기분입니다!”
삼륜 오토바이로 만든 오토릭샤가 내 옆으로 푹푹거리며 나가왔을 때 나는 너무나 기분이 언짢아 운전사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인도에 온 지는 두 주밖에 안됐지만 델리의 오토릭샤꾼들이 무더운 여름 일곱 달 동안은 땀에 흠뻑 전 채 뒷좌석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낮잠을 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온이 화씨 100도(섭씨 37.8도)를 웃돌면 그들은 인색한 고객들보다는 차라리 평화로운 낮잠을 확보하기 위해 요금을 갑자기 올린다. 그런데 그 운전기사는 돈에 몹시 궁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얼굴에 비해 너무나 작은 플라스틱제 안경이 더 어울리지 않아 보일 정도로 과장되게 장사꾼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고, 별 실랑이질 없이 괜찮은 가격에 합의했다. 릭샤 안으로 몸을 밀어 넣자마자 릭샤의 캔버스천 지붕이 햇볕을 가려주고, 양 옆이 트인 그의 ‘헬리콥터’ 안으로 가벼운 바람까지 제법 불어오는 통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릭샤 운전기사인 릭샤왈라가 금속 상자에서 잎으로 만 ‘판’을 꺼내서 이로 물어뜯자 빈랑나무 열매의 얼얼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씹는 담배처럼 매우 강한 자극제인 판은 인도 전역의 노동자, 배달 소년, 가게 점원들의 치아와 입을 뻘겋게 물들인다. 남아시아 지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우리 어머니는 길거리에다 피를 내뱉는 남자들을 보고 그들 모두 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어머니는 스물세 살이었는데 내가 여기 처음 도착했을 때의 스물일곱 살보다 나이도 어렸고 훨씬 더 순진했다. 사실 판은 크게 해롭지 않은 기호품이다. 한 친구가 나중에 알려줬듯이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의 피로를 이겨내는 방법 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인도 도시의 무질서와 불쾌함을 중산층이 에어컨과 기사 딸린 자가용에 의존해 견뎌내듯,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판과 손으로 만 담배 ‘비디’, 발리우드 영화 등 값싸고 접근하기 쉬운 방법으로 그것을 해소한다.
릭샤는 돈 없는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지저분한 거리인 파하르간지를 타닥거리며 지났다. 영국식 악센트가 구아바 행상인들이 큰 소리로 말하는 힌디어와, 붉은 색 셔츠를 입고 끈질기게 들러붙는 짐꾼 쿨리들의 외침에 뒤섞여 들린다. 뉴델리 기차역 인근인 이 지역은 군복무 의무를 마친 후 긴장을 풀기 위해 온 이스라엘인들, 아프가니스탄제 헤로인이나 러시아 매춘부를 찾는 타락한 유럽인들이 몰려오는 곳이다. 파하르간지는 ‘진정한 인도’는 아니지만 70년대에 히피 열풍을 따라 이곳 인도까지 왔던 우리 부모님들이 당시 찾았을 풍광의 한 변형이라 불릴 만하다. 그곳은 내가 책에서 읽고, 케이블 TV에서 본, 맥도날드사가 맥티키 알루를 파는, 세계화가 진행 중인 인도의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았다.
나는 요가는 하지만 그렇다고 인도의 뉴에이지 풍 아쉬람 체험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델리에서 그런 분위기로 옷을 입었다. 구슬이 달려 있는 오렌지 빛 롱스커트와 작은 구멍의 자수 장식이 있는 검은 면으로 만든 몸에 달라붙는 상의는 델리에서 그다지 점수를 따는 매무새가 아니었다. 델리에서 간결한 차림새는 극빈자와 조금 덜 가난한 자를 구별해 주는 유일한 표시일 때가 종종 있다. 갓 다림질한 실크 사리, 자그마한 구슬 슬리퍼를 신고, 베이비 파우더와 팜오일 향내를 풍기는 델리의 숙녀와 비교할 때 나는 너저분한 히피처럼 보였다.
로즈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식당 벽으로 반투명 도마뱀붙이 대여섯 마리가 지나갔다. 도마뱀붙이들 사이로 붉은 색과 핑크 색으로 유쾌하게 그린 힌두 신들의 프레스코화가 보였다. 나는 앞에 놓인 파파야 조각과 몽글몽글 덩어리 진 요구르트를 내려다보며 성사시키고 싶은 인터뷰 목록, 착수해야 할 숙소 물색 등등 그날 할 일에 정신을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어떤 나날을 보내건 관계없이 나름대로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혼돈스런 도시에, 마약중독자 여행객들이 찾는 싸구려 호텔들이 있는 주변 환경을 고려해 볼 때, 이 모든 일들은 지나치게 야심적이고 이상할 정도로 부적절해 보였다. 나는 낙담해서 게코원숭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원숭이들 사이로 힌두 신들의 프레스코화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단순한 여행객이 아니라 일거리를 찾아 인도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공공 라디오 프로그램의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번 돈을 모두 저축했다. 직접 해외로 나가 프리랜서 해외주재원이 되도록 시도해 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는 뭔가 변화시킬 힘이 있는 탁월한 경험이 부족해 실망스러웠고, 남자친구가 나로부터 멀어질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먼 곳,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국적인 장소에 떨어져 있으면 그에게 내가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인도가 그렇게 하기에 마땅한 곳이라는 데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 가족이 이 나라에 매혹을 느낀 역사는 영국의 외가 쪽 할머니인 이디스가 기독교 선교사로서 인도를 여행한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 쪽 가족은 긴밀하게 맺어진 소규모 방랑자 그룹이었고, 나도 늘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인도로 향한 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과 뒤섞인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친구들은 나의 그런 결심을 제대로 납득하지 못했지만, 나는 인도에서 내 꿈을 가장 충실하고도 흥미롭게 구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옮겨 다니는 것에는 이력이 나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도시들의 목록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어머니는 그 도시들을 죽 나열하기 위해서 종이와 펜을 꺼내들어야 했다.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을 네 군데서 다녔는데 첫 번째 학교는 어머니 출신 지역인 영국에 있었다. 주위 사정이나 직업 때문에 이사를 해야만 하는 다른 가족들과 달리 우리 부모님들에게는 이주 자체가 목적이었다. 가끔 그분들은 일부러 떠날 구실을 만들어 짐을 싸곤 하셨다. 공연학 교수인 아버지는 항상 이동 중인 삶을 그린 드라마에서나, 경력을 쌓고 좋은 급여를 받는 것 같은 실제적인 일에서나 동등하게 흥미를 느꼈다. 여러 곳에서 산다는 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라 부모님은 새 냉장고나 자동차를 절대로 구입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검소했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사과 속까지 먹으라고 하면서, 그렇게 해야 영국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러 갈 비행기표를 살 수 있다고 반 농담조로 말씀하시곤 했다.
이디스 할머니는 내 나이 열한 살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로부터 내가 물려받은 것은 코끼리 가족을 조각한 황동상들과 밀 먹인 종이 위에 세심하게 붙인 사진들을 모아둔 가죽 장정의 앨범뿐이었다. 부모님은 피츠버그에서 제법 오랫동안 정착해 사셨기 때문에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한 곳에서 다닐 수 있었다. 피츠버그에서 십대 시절을 보닐 때 나는 창턱에 크기순으로 나란히 진열된 세 마리 코끼리를 바라다보며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삶을 상상하곤 했다. 사진 속의 할머니는 항상 끈으로 묶는 편상화를 신고, 엄한 빅토리아풍 의상을 입고 계셨다. 이디스 할머니와 선교사 자매들은 그 장소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야자수숲 그늘 아래나 스리나가르의 달레이크에서 정교하게 장식된 카슈미르의 목제 선상가옥에 탄 모습이 특히 어색했다.
어떤 사진을 보면 이디스 할머니는 영양부족 상태의 인도인들이 메고 가는 지붕 있는 의자 가마를 타고 산길을 지나고 있다. 카슈미르 지방에서 공주처럼 가마를 타고 시원한 언덕 지대에 있는 여름 별장으로 이동하다니! 낭만이라고는 전혀 없는 산업화 이후의 도시에서 자란, 청춘기의 나에게 이러한 이미지들은 선교사가 된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 보도록 만드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물론 우리 가족은 교회에 거의 다니지 않았고,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그러니 어머니가 내게 해외주재원 같은 덜 종교적인 일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적절한 조언이었다.
비록 울타리 저편의 잔디가 항상 더 푸른 것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하기 위해 제대로 살펴보는 것은 늘 바람직한 일이다. 이는 우리 아버지의 신념이었고 나도 그런 기질을 물려받았다. 일찍이 나는 친구를 만들되 그들과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는 게 좋은 일이라고 배웠다. 친구들 무리에 얽매이거나 학교나 이웃에 소속되는 것, 이런 일들을 우리 가족은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방문한 유럽 도시들의 이름을 계속 적어두고 저녁식사를 하며 세상사에 관한 내 생각을 내세우는 그런 종류의 십대 소녀였다. 아버지에게 아일랜드 더블린대학에 자리가 주어졌을 때 그곳으로 따라가 대학 학점을 그곳에서 이수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가족들이 멋지게 벌이는 국제적인 모험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일랜드는 나 자신이 선택해 추구한 목적지는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부모님을 뛰어넘어 나 자신만의 의향에 따라 다시 지구를 종횡으로 누비고 싶었다. 뉴욕은 내가 바라던 모든 것을 내주었다. 뉴욕은 내가 평생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나처럼 모험이 지닌 가치를 인정하는 남자친구를 만나게 해주었다. 또한 뉴욕은 바퀴벌레가 드문드문 나타나기는 하지만, 잡지사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몇 년간 일한 후 인도 행 비행기표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집세가 충분히 저렴한 숙소도 제공해 주었다.
친구들이 나의 외국행에 대해 회의적인 것은 당연했다. 뉴욕은 꿈을 품은 작가에게 기회로 가득 찬 곳이고, 내가 선택한 개발도상국은 무엇으로도 나의 경력 상승을 보장해 줄 수 없었다. 프리랜서로 해외에서 활동하기로 결심한 저널리스트들을 많이 보았지만 그들은 중동 지역 같은 주목을 끌만한 지역을 선택했다. 그런 곳의 보도는 실제로 관심을 끌었다. 인도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었지만 그게 주요한 기사거리는 아니었다. 보도 책임자들에게 내 계획을 말하면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언급하자 그들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그 지역들에서 취재하는 것에도 관심을 갖고 있지만 절대로 전쟁이나 테러 전문 특파원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9.11 테러가 벌어졌을 때 나는 커널 스트리트 바로 아래 있는 라디오방송국에 있었다. 세계무역센터와 불과 몇 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 다음 2주일 동안 나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잠을 자고, 먹고, 일했다. 테러 현장인 그라운드제로를 떠났다가는 경찰이 다시 들여보내 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나는 구조대원들이 있는 데서 매일 밤을 보냈고, 이런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을 목격할 수 있어서 큰 행운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 즉 사건들의 내부로 파고들어 뜻밖의 밝혀지지 않은 안타까운 순간들을 뽑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기도 했다. 마음 한편에서 나는 아프가니스탄을 취재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일간 뉴스 보도라는 험한 경쟁생활을 벗어나 내가 관심을 갖는 지역으로 가고 싶었다.
나는 남아시아 지역에서 근무할 라디오 보도기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소액의 지원금을 받았고, 그 돈은 내 계획을 결행하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일거리를 받는다는 보장은 없는 상태였다. 단지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 NPR와 몇몇 보도매체에서 겨우 관심을 표시해 왔을 정도였다. 친구들은 뉴욕 언론계에서 꾸준히 일하다 보면 언젠가는 해외특파원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하지만 친구들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마냥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고용주가 내게 일거리를 줄 때까지 기다리느니보다는 요지부동으로 지켜져 온 관행의 틀을 깨고, 내 힘으로 밀고 나가 해외 주재 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뉴욕에서 사는 게 편안하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나는 밤늦게까지 잠 못 들고 누워 있다가 십 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불현듯이 공포에 빠져들곤 했다. 지금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일을 하며, 지금보다 아주 조금 나은 집에서 우리 부모님들이라면 세속적이라고 간주했을, 일정표대로 진행되는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 말이다. 지역사회에 속하기를 거부하며 약간은 반항적이고, 방랑벽이 있는 성인이 된 내게 인도는 거의 전설적인 전망을 지닌 장소로 부각되었다. 멀리 떨어진 낯선 나라는 내 마음 속에 일종의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 어느 때인가부터 나는 그곳이 나 자신을 저널리스트로, 여자로, 모험가로 자리매김시키기 위해 반드시 가야 할 곳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랩탑 컴퓨터를 설치하고, 기사를 작성할 작업실을 꾸밀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우선 명함에 넣을 주소가 필요했다. 인도에서는 명함이 필수적인 액세서리라는 걸 나는 금세 알았다. 인터뷰 시작 때 명함을 제시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 신분을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안개 속처럼 불분명한 인도의 정치와 문화에 대해 제법 유식한 인터뷰 질문을 만들기 위해 관공서들을 한차례 돌았는데, 그때 인도 공무원들과 지식 계층에게 나를 수준 있는 기자로 인식시키는 게 몹시 어렵다는 걸 충분히 알았다.
계급제도에 철두철미하게 젖은 인도에서 내 인터뷰 대상자들이 부적절한 옷차림을 하고, 소속도 없는 여기자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들은 뉴스 매체로부터 정식 파견된, 나보다는 훨씬 호화롭게 델리에서 사는, 나와는 다른 여건의 외국특파원을 만나는 것에 익숙했다. 예를 들어 뉴욕타임스의 특파원은 신문사가 수십 년째 소유하고 있는 식민지 시대의 넓은 별장식 방갈로에서 지낸다. 그밖에도 있으면 편리한 요소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도시 전역을 안내해 줄 전임 통역사, 운전기사 딸린 자동차, 수입 세탁기 등이 있으면 인도에서는 큰 도움이 된다. 뉴욕타임스의 방갈로에는 건물 외부 공간을 아름답게 꾸며 주는 정원사 외에도 상주하는 직원이 한명 더 딸려 있다.
신문 광고란에서 찾은 집세가 비싸지 않은 방을 보여주자 로즈 호텔의 접수계원은 강한 어조로 추천했다. “제 1등급 구역입니다, 아씨. 톱클래스죠.” 그래서 릭샤 바깥을 내다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곳 역시 야채 행상과 가난에 찌든 군상들이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수구 썩는 냄새와 튀김요리의 향신료 냄새가 한데 섞여 독한 술을 마신 뒤 같은 두통이 났다. 그때부터 나는 델리 시가지를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예쁘고 자그마한 마을인 양 산책하며 거니는 미국인이나 영국인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났다. 끝없이 펼쳐진 평면 같은 델리시는 갖가지 운송수단과 거지들로 꽉 차 있다. 로터리를 지나면 또 다른 로터리가 나타나고, 선명한 핑크빛 꽃이 넘실대는 부겐빌리아가 무성하게 연이어지다가 느닷없이 눈길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온갖 잡동사니가 숨 막힐 듯이 넘쳐나는 혼돈스러운 시장이 나타난다.
릭샤 바깥에서 깩깩 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는 원숭이가 공격해 오려나 보다 생각하고 몸을 움츠렸다. 델리 중심부에 있는 국방부 청사 위로는 짧은꼬리원숭이들이 마구 기어다니고, 위협적인 원숭이에 관한 이야기는 저녁 뉴스시간에 종종 등장한다. 나는 아직도 이 광포한 영장류들에게 쫓기는 엄청난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다시 눈을 돌려 보니 그 소리는 커다란 금속제 분마기 속으로 사탕수수 줄기를 밀어 넣고 있는 자그마한 소년이 내는 소리였다. 소년이 끽끽 하는 바퀴 손잡이를 돌리자 깔때기 밖으로 하얀 거품을 머금은 액즙이 뿜어져 나왔다. 2루피에 파는 진짜 사탕수수 즙이었다. 셔츠를 입지 않은 노쇠한 순례자가 절뚝거리며 그 앞으로 다가가 아무 말도 없이 사탕수수 즙 한잔을 받아든다. 칼로리가 몹시 필요한 사람처럼 보였다.
갑자기 릭샤 옆에서 소 한 마리가 똥이 말라붙은 꼬리를 내 얼굴 가까이에까지 휘두르는 바람에 나는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소똥 분말이 내 입술을 스쳤는데 흙처럼 습기가 느껴졌다. 내가 탄 릭샤는 동물, 짐마차, 스쿠터들이 뒤엉킨 좁은 길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가옥들이 길 쪽으로 침범해 들어오고, 청소용 양동이와 빗자루, 빨랫줄에 걸려 있는 긴 천으로 된 사리와 셔츠 등 집안의 물건들이 낡아빠진 발코니 위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 불안정한 구조물들을 보니 맨해튼 로어이스트사이드에 있는 19세기 셋방들 풍경이 떠올랐다. 이 집들이 진정 급성장하고 있는 인도 중산층의 집인가? 이곳이 새로운 고층 건물의 오피스 안에서 세계경제에 변화를 주면서 일하고 있는 콜센터 근무자들이 퇴근하여 낮 시간 동안에 잠자는 곳이란 말인가?
약 15분간 미로처럼 얽힌 거리를 따라 닥치는 대로 달린 후에야 나는 릭샤왈라가 갔던 길을 한 번 이상 다시 달렸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차선도 무시하고 그저 길 가운데를 따라 용감무쌍하게 가속기를 밟아댔다. 우리 두 사람은 주소가 제멋대로 매겨지고 다닥다닥 붙은 집들을 그저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432-L이라고 번호가 매겨진 집이 있는데 그 옆집은 34-B였다. 나는 좌절감에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니 어떻게 432-L과 34-B가 이웃이란 말인가?” 그러나 릭샤왈라는 전혀 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는 망고를 실은 수레를 밀고 있는 소년에게로 다가가 우리가 찾는 번지수를 외쳤다. 오토릭샤의 폭발할 듯 툴툴거리는 엔진소리 때문에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는 소년은 수레를 길 옆 쪽으로 비켜섰다. 그는 주위에 대해 전혀 무심한 채 폴리에스터 바지 사이로 사타구니를 긁으며 옆걸음질을 했다.
릭샤왈라가 모터를 끄고 나서야 비로소 다다다다 하는 오토바이 소리와 타는 듯한 열기 때문에 내 머리가 온통 쿵쾅거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릭샤왈라도 고통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더러워진 쿠르타 자락으로 얼굴을 훔쳤다. 쿠르타는 인도의 남자와 여자가 공통으로 입는 길고 느슨한 셔츠이다. 그러더니 발밑에서 종이 라벨이 한참 전에 다 벗겨진 오래 된 코카콜라 병을 꺼내 입술에 병 주둥이가 닿지 않도록 유의하며 물을 입 안으로 부었다. 그는 그 병을 나한테로 권했다가 내가 거절하자 아무 말 없이, 조금도 무안해하는 기색 없이 도로 가져갔다. 인도에서 외국인들은 어떤 물인지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망고 소년은 아주 고마워하며 그 물을 들이켰다. 병 주둥이에 입을 대지 않는 인도인 특유의 세균 방지법을 지키며 물을 마신 소년은 굶주림으로 눈이 푹 꺼져 있었다. 그런 얼굴은 델리 거리 어디에서나 보여서 이미 내게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길을 알려준 소년은 화씨 120도(섭씨 약 49도)의 진이 다 빠질 정도로 뜨거운 봄날에 반가운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신 것이었다.
일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더운 오후에는,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남부 유럽인들처럼 점심을 먹은 다음 낮잠을 자러 자기 집으로 간다. 이 문명화 된 호사는 델리에 사는 불완전 취업상태의 이주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에게는 들어가 쉴 집이 없다. 내가 2002년 인도로 오기 전 십년간 7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곤궁한 오지로부터 도시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인접국가인 네팔과 방글라데시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도시의 부와 기회를 찾아서 오지만 안타깝게도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찻잔을 나르거나 화장실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오후가 되면 시골 동료들을 따라 조그마한 그늘밑에 친근하게 무리지어 웅크리고 앉아 있거나, 시골소년들이 우정을 표시하는 방법 그대로 상대방 어깨에 손을 두르거나 느슨하게 손을 잡고 함께 걷는다.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특이한 게 보이면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시골소년들은 멈춰 서서 말똥말똥 쳐다본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나라들 중 하나인 국가의 수도이지만 뉴델리는 분명코 세계화와 거리가 먼 도시이다. 한마디로 이곳은 시골의 빈곤층을 끌어들이는 자석 같은 곳이다. 5성급 호텔 안에 안전하게 몸을 숨기지 않는 한 어딜 가나 내게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꽂혔다. 힌디어로 피부가 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페링기’나 ‘고라’들은 외국 이민자가 거의 없는 이 도시에서 눈에 띄는 존재다. 고라라는 말은 ‘희다’는 뜻으로 에누리 없이 정직한 표현이다. 페링기라는 말의 기원은 십자군전쟁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도의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도를 칭할 때 이 말을 썼는데, 프랑크라는 유럽계 사람을 가리키던 말에서 비롯되었다. 인도에는 수세기 동안 카스트 제도가 있어 왔고, 민족이나 피부색, 종교가 다양했다. 하지만 모든 침략과 식민지화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문화는 거의 항상 다언어 문화였다.
망고 소년과 릭샤 기사는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놓고 궁리를 했고, 결국 다른 사람들이 슬슬 다가와 그 의논에 끼어들더니 짐짓 심각하게 이쪽 혹은 저쪽을 팔로 가리켰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릭샤 안에 페링기가 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안으로 디밀고 나를 자세히 보았다. 우스꽝스런 인형극과 다름없었다. 남의 눈에 띄려고 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염색해 온 내 백금색 머리와 하얀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에는 적개심은 아니고, 호기심과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눈에 띄려는 목적은 인도에서 확실히 달성된 셈이었다. 결국 머리를 돌려 다시 본다든가 뒤늦게 깜짝 놀라기도 하는 등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별난 유명인 취급을 두어 달 받은 다음 나는 본래의 갈색 머리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뒷좌석에서 나는 릭샤왈라가 안내를 자청하며 모여든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샌들을 벗는 등 점점 편안해 했다. 나는 집을 구경이나 하게 될지 절망감을 느꼈다. 고작 3주 정도 배운 힌디어 실력이지만 릭샤왈라가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어디로 어떻게 갈까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냥 태평스런 잡담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스스로 나서서 길을 물어 볼 정도로 말을 많이 배운 것도 아니고, 릭샤왈라는 내가 초조해 한다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니, 그저 그들의 사교활동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뒷좌석에 파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칼을 휘두르는 동네 불량배에게 강도를 당했을 때처럼 나는 위기상황에서 분별력을 잃지 않는 나 자신에 스스로 만족해 왔다. 우리는 어느 정도 위험한 도시 지역에서 살았다. 나는 공립고등하교 신문에 갱단의 폭력에 관한 글을 썼다. 나는 스스로를 세상물정에 밝은 분별력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점점 열기가 심해지는 찜통 속 같은 릭샤 안에 있자니 릭샤왈라의 머리를 뜨거운 금속제 계기반에다 쾅 박아 버리는 이상한 공상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했다면 이미 반이나 깨어져 있는 상태인 그 오토바이의 앞 유리를 박살냈을 것이고, 나는 금발의 이상한 페링기가 아니라, 광포하고 미친 페링키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들이쉬고 뉴욕에 있던 인도인 친구의 충고를 떠올렸다. 만일 다듬어지지 않은 인도의 실제 상황에서 무슨 일을 이루려고 한다면 기꺼이 마음을 비우고 시간도 무한정 낭비해야 한다는 거였다.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는 것 외에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릭샤왈라가 결핵환자가 각혈하듯 붉은 ‘판’을 길바닥에 내뱉었다. 그리고 “한지, 마담, 좋습니다. 첼리예!” 하고 힌디어로 외치더니 시속 20마일의 오토릭샤 최고속도로 출발했다. 곧 우리는 한 무리의 흥분한 남자들 옆에 다시 멈췄다. 나는 목을 빼고 내다보았다. 전신주가 넘어져 있고 뒤엉킨 전선들이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어중이떠중이로 모인 사람들이 넘어진 전신주의 전선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은 모두의 일’이라는 인도인들의 철학이 발휘되는 중이었다.
결국 목적지인 그 집에 도착했고, 나는 갈라진 비닐 좌석에서 다리를 떼어냈다. 릭샤에서 내리는데 사이드미러에 내 모습이 흘깃 보였다. 머리카락 일부는 땀에 젖은 채 엉겨 붙어 있고, 나머지 머리칼은 바람에 날려 부풀어 있었다. 릭샤 운전기사는 엔진의 기름과 ‘판’ 때문에 시커멓고 빨갛게 물든 손을 내밀었다. 그는 길을 돌아왔다면서 요금을 두 배로 요구했다. 그는 1달러 50센트나 되는 거스름돈을 돌려주지 않은 채 자신의 ‘헬리콥터’ 시동을 걸어 버렸다.
나는 포기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 집에서는 한 여인이 흰색 레이스 커튼을 내리기 전에 얼핏 나를 내다보았던 것 같았다. 나는 주름 잡힌 스커트 자락을 펴고 손가락으로 엉클어진 머리칼을 다듬으려 노력하면서 벨을 눌렀다.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자그마하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일하는 소녀가 문에 나타났다. 소녀의 얼굴은 세상사를 다 안다는 듯 무표정했다. 집안에서는 오전의 기도 의식인 푸자 때 사용한 향냄새가 풍겼고, 위층 어디엔가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은 복도의 어두움에 적응하느라 아직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선명한 청색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 남자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환영의 뜻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갑자기 단정치 못한 내 옷차림이 너무 달라붙고, 너무 히피 같고, 너무 서구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소녀가 자그마한 플라스틱 쟁반에 찬 물을 들고 다시 나타나기를 희망하며 마른 목에 침을 삼켰다. 나는 이미 물 한 잔을 대접한 후 잠시 쉬도록 거실로 안내하는 하인이 있는 인도 중산층의 후한 대접에 길들여진 상태였다. 거실에서는 계절에 따라 탄산수를 뜻하는 인도 영어인 콜드 드링크 또는 달콤한 차이를 대접받는다. 그런데 집주인은 복도에서 나를 맞이하고는 어디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우리가 여기 찾아오는 데 좀 문제가 있었어요...”
나는 말을 멈췄다. 그가 나에게서 살며시 눈길을 떼어 내 어깨 너머를 응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누구를 바라보는지 보기 위해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그곳엔 문틀밖에 없었다.
“우리?”
나는 그 한 단어만 듣고도 그의 영어가 인도의 엘리트 예비교에서 배우는 영국식 영어 투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썹은 아치형이었다. 나는 어디로 시선을 둬야 할지 몰랐다.
“저하고 릭샤 운전기사라는 뜻입니다.”
“흠, 그럼 당신은 혼자이십니까?” 그가 문틀에 대고 말했다.
나는 잠시 멈추었다.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풍채가 당당한 인물이 발언한 질문은 실존적인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일부러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것은 가족이나 인간관계에 대해 보통의 인도인이 갖는 생각과 내 생각이 상당히 다르다는 하나의 증거였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내가 가족으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살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나이 스물일곱이면 자녀는 아니더라도 이미 남편을 포함하는 가족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집을 마련하려면 최소한 의지할 부모나 형제자매가 있어야 했다. 새롭게 세계화 된 인도에서조차도 가족이 대부분 사람들의 삶을 좌우한다. 델리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향상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의 겉모습은 대학에 블루진을 입고 가고, 여자 친구들과 토요일 밤에 영화를 보러 외출하는 등 독립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하기 전에 부모의 집으로부터 나오려는 계획은 갖고 있지 않았다. 결혼을 하면 그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 부모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내가 혼자 사는 것에 대해 여러 형태의 질문을 수도 없이 받게 되었다. “가족이 이곳에 있습니까?” 또는 “누구와 같이 있습니까?” 점차적으로 나는 내 대답을 듣고 슬픔을 나타낸 그들의 표정에 익숙해졌고, 그런 질문들에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부모, 자매, 고모들과 감정적으로 밀착된 관계를 갖고 있지만 지금은 다른 나라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살며 가끔씩만 소식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갑자기 떠올랐다. 스스로 옳다고 했던 것에 대한 당혹감이 시크교도 앞에 서 있는 동안 나를 휘감았다.
“우리 가족은 이곳에 살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나 혼자 지낼 장소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집주인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이 주택은 혼자 사는 여자를 위한 집이 아니오. 우리는 당신 같은 타입의 여성한테는 관심이 없습니다. 잘 가시오.”
그는 정성스레 광을 낸 구두를 신은 발길을 돌렸다.
심부름 하는 소녀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그제야 나를 안으로 들이게 할지 아니면 밖으로 내보내게 할지 주인의 신호를 기다리며 그녀가 내내 그곳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마치 다른 종류의 동물을 대하듯 무감각하게 나를 훑어보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 소녀가 비록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방금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간청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 주인이 바라는 바람직한 여성이 될 수 있나요?”
몇 달 후, 인도 여성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 때 그들은 남편 손에 이끌리지 않고 세를 얻으려는 여자는 누구든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말을 해 주었다. 결혼하기 전에 부모 집을 떠나려고 하는 젊은 여성들이 집주인들과 싸우는 내용을 보여주는 발리우드 영화까지 있다. 뜨거운 열기 속으로 슬그머니 돌아서 나오면서 나는 등 뒤에 꽂히는 네 개의 눈으로부터 나오는 시선, 소녀와 레이스 커튼 뒤에 숨은 여성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중략...)
나는 실제로 보게 된 것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고 세계화 된 나라를 기대했다. 빈곤은 예상했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서구에서 경험한 것에 가까울 정도로 관대한 중산층이 폭넓게 자라잡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인도 여배우들이 이브 엔슬러의 사실적인 페미니스트 연극인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무대에 올려 공연 중이란 얘기를 들었고, 그래서 꽤 높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인도에서는 솔직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곳은 고등교육을 받은 기업가 중산층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봉건적 생활원칙과 퇴행적인 관습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수백만 명의 까막눈이 시골사람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인도는 내가 살아온 문화와는 너무나 달랐고,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은 방식으로 나에게 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혼자 산다는 이유로 나를 매춘부로 취급한 델리의 집주인처럼 내 눈 앞에서 문을 쾅 닫아 버린 게 바로 인도였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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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의 인도, 신비의 인도를 생활 속의 인도, 현실의 인도로 끌어내어 일반인들의 인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힌 신개념의 인도 안내서이다. 여행자의 눈높이를 보통 인도인의 눈높이에 맞춰 인도 고유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 인습을 섬세한 터치로 그려냈다. 인도 고유의 냄새와 빛깔까지도 재치 있는 서술로 우려낸 수채화 풍속 화첩 같은 책이다. 온몸으로 인도의 향취를 흠뻑 맛볼 수 있는 책이다. 인도를 여행하려는 이들에게 필독을 권한다.
라윤도 (한국인도학회 회장.건양대 교수)
저자는 뉴욕에서의 기자생활을 접고 가능성과 좌절, 합리와 모순이 뒤엉킨 델리로 가 5년을 살았다. 그리고 쿠르타와 스카프를 두르고 스쿠터를 타고 번잡하고 지저분한 델리의 뒷골목을 누비며 느낀 인도의 참모습을 사랑하게 된다. 여성의 섬세한 시각과 저널리스트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사랑과 결혼과 같은 여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명한다. 급변하는 인도에서 유지되는 전통과 가족의 힘, 그리고 여성의 다양한 삶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권춘근 (전 포스코 인디아법인장. 현 포스코건설 해외영엄담당 임원 )
인도는 지방에 따라 다양한 기후풍토와 인종, 힌디어와 영어 외에 공용어만 21개에 이르는 그야말로 여러 이질적인 요인이 복잡하게 혼재한 나라이다. 이 책은 이런 복잡한 나라 인도와 인도인의 본모습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준다. 인도에 오래 살면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인도 중산층의 생각과 삶의 모습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김경율 (코트라 뉴델리 무역관장)
델리는 매우 빠르게 변하는 도시지만 아직도 치마 입은 여자를 보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여전히 매우 전통적인 사회다. 델리에서 특파원 생활을 할 때도, 그곳에 사는 여자들의 세계는 제대로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책은 미국 여기자가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5년을 살며 겪은 갖가지 경험을 담은 생활체험기이다. 처음 접하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흥미진진하다.
최준석 (주간조선 편집장, 전 조선일보 뉴델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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